이른바 '선진국'에는 이런 도시가 드물게나마 있을 것 같은데, 우리나라에도 '인문학을 공부하는 자치단체'가 있습니다. 공부를 해도 돈이나 권력과 관계되지 않은 분야는 찬밥 신세인 우리 실정에서는 참으로 뜻밖이고 또 놀라운 일입니다.

자치단체장은, 인기 있는 정책을 먼저 하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대학 같은 학문 공동체에서조차도 크게 대접을 받지 못하는 분야인 인문학을 꾸준히 하는 데가 있습니다. 무슨 '시민 아카데미' 따위를 한다 해도 대부분은 얄팍한 처세술 따위 책으로 전국에 이름을 얻은 인물이나 불러대기 십상인데 이 도시는 그렇게도 하지 않습니다.

경남 김해시입니다. 단체장이 소신이 있으면 이런 일이 우리나라에서도 벌어질 수 있나 봅니다. 김종간 김해시장은 2007년 10월 '책 읽는 도시'를 선포했습니다. 도서관을 확충하는 한편 2008년부터는 여러 방면으로 인문학 읽기에 나섰습니다. 올해는 이태 째입니다. 인생을 살아가는 새로운 즐거움과, 돈이나 물질이 아닌 다른 가치에 대한 눈뜸을 위해서겠지요.

되풀이 말씀드리지만, 전국 자치단체들이 저마다 많은 돈을 들여 갖가지 축제는 떠들썩하게 벌이면서도 인문학은커녕 그냥 책읽기에도 관심을 두지 않는 현실에서 아주 색다른 정책입지요. 이처럼 인문학 공부를 도시 차원에서 하게 된 까닭이 궁금하시지 않은가요? 지금 어떤 상태에 있는지도 함께요.

1. "우리는 인문학의 힘을 믿어요!"

인문학은, 알려진 그대로, 인간이 놓인 조건과 상태를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문학 역사 철학 언어학 미학 고고학 등을 뭉뚱그려 말합니다. 이밖에도 많습니다만. 도대체, 인간이란 무엇인가, 세계는 어떻게 짜여 있는가, 참된 값어치는 무엇인가, 인간과 세계와 값어치는 어떻게 관계하고 있는가…….

이런 인문학은, 한 마디로 '돈이 안 됩니다.' 잘라 말하면, 인문학으로 제대로 밥벌어 먹는 사람은 해당 분야 대학 교수들말고는 없습니다. 물론 '인문학도 돈 되는 학문'이라 말하는 이도 있지만, 이는 인문학을 천대하는 현실에 대한 '역설(逆說)' 또는 인문학이 근본에서 품고 있는 값어치에 대한 '역설(力說)'일 따름입니다.

대부분 인식이 이런 가운데서도 김해시는 인문학 읽기를 '주요 시책'으로 삼을 수 있었던 까닭이 있습니다. 시민사회의 요구와 희망입니다. 이런 요구와 희망을 알아차린 '개념 있는' 공무원입니다. 시장의 스스럼 없는 자세도 한 몫 했겠지요. 김해시는 평생학습지원과와 도서관정책팀을 만드는 등 조직을 갖추고 적극 나섰습니다.

지역 대학(학자)과 공공도서관을 인문학 공부의 주체로 세웠습니다. 조강숙 도서관정책팀장은 "우리는 인문학의 힘을 믿어요."라 했습니다. "재미로 읽는 통속 소설이나 사회과학 서적, 실용을 위한 재테크나 처세술을 다룬 책과 달리 인문학은 삶 전체를 관통하는 가치가 무엇인지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도록 합니다. 겉으로는 표시가 나지 않지만, 그런 고민과 성찰을 한 번이라도 거친 이는 그렇지 않은 사람과 사는 세상이 다릅니다."

바탕이 되는 시민사회는 더욱 중요합니다. 김해 인구가 늘면서 새로 들어온 사람 가운데 젊은 층을 중심으로 책읽기에 대한 요구가 높아졌으며 이는 공공도서관 확충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독서실 노릇을 벗어난 제대로 된 도서관은, 인문학 공부의 풀(pool)이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게다가 김해에서는 다른 도시에는 없는 일이 일어나 있었습니다. 공공도서관 사서들의 비공식 공부 모임과 학교도서관을 생각하는 사람들의 모임(학생사모)에서 제각각 공공도서관과 학교도서관을 모조리 빠짐없이 조사해 실태가 어떻고 무엇이 모자라는지를 파악하는 '자발적 노력'이 있었던 것입니다.

조강숙 팀장이 말하는 현실적인 계기는 이렇습니다. "2007년 '책읽는 도시 김해'를 선포하고 지난해 시장께서 '전국 독후감 대회'를 해보라고 했어요. 그것을 구체화하는 과정에서 차별화하려다 보니 '청소년'과 '인문학'이 중심 주제로 나왔습니다." "모든 시민을 주체로 삼지만 청소년에 집중하고, 모든 분야를 아우르려 하기보다는 인류의 성찰과 지혜가 담긴 인문학에 초점을 맞춰 남들이 안 하는 일을 한 번 해보자는 것입니다."

2. 비경쟁으로 치르는 제1회 청소년 인문학 읽기 전국 대회

대부분은 무슨 정책을 정하면 그것을 곧바로 눈에 보이는 성과로 만들어내려 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김해시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무슨무슨 대회를 하기에 앞서, 앞에 말씀드린 포부의 실현을 위해 청소년에게 인문학을 하는 즐거움을 일러주는 강좌를, 학생사모 주관으로 열도록 2008년에 지원을 했습니다.

김해외고 강명관 강의에서 토론하는 학생.


'1318 북클래식'입니다. 7월 12일 연구공간 수유+너머의 고미숙 대표가 '공부의 달인, 호모 쿵푸스'(경원고), 부산대 강명관 교수가 9월 20일 '조선의 뒷골목 풍경'(김해외고), 영산대 배병삼 교수가 '논어, 사람의 길을 열다'(분성여고), 수유+너머의 고병권 교수가 '고추장, 책으로 세상을 말하다'(가야고)를 강의했습니다.

학생들 반응은 이랬답니다. "소설책 읽는 것보다 훨씬 재미있었어요." "별로 궁금해하지 않은 것들에게서 새롭게 많이 배웠습니다." 여기에 청소년 인문학 공부의 여지가 있었습니다. "인문학에 관심 있는 아이들은 틀림없이 있는데, 이들은 학교 교육에서 사각지대에 있습니다. '별난 녀석'으로 '왕따' 비슷한 취급을 받는 것입니다. 이들에게 훌륭한 인문학자를 만나게 해 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올해 들어 인문학 읽기 전국대회를 열게 된 까닭입니다. 10월 30일과 31일 김해도서관과 한옥체험관에서 열리는 제1회 대회를 위해 전국 1639개 고교에 공문을 보냈습니다.(학교 주소 명단 찾고 적느라 고생 꽤나 했겠습니다.) 그리고 32개 학교에서 참여하겠다는 답장이 왔습니다. 이를 위해 6월 26일에는 김해도서관에서 '교사 워크숍'을 열기도 했습니다.

안 그래도 경쟁에 시달리는 아이들인지라, 또 인문학을 하자는 취지와도 어긋나지 않게 하려고, 대회는 모두 비경쟁으로 진행합니다. 주제는 '사람답게 산다는 것……'입니다. 추상적이지요. 소주제(지정 도서)는 '삶과 죽음'(<나무의 죽음>) '소유냐 존재냐'(<소유냐 존재냐>) '행복한 삶이란'(<경쟁은 어떻게 내면화되는가> '사랑'(<난설헌, 나는 시인이다>) 등 4개입니다.

독서감상문은 쓰지 않는답니다. 인터넷 '펌질'이 일반화돼 있는 현실에서 '독창성'을 담보하기 어렵기 때문이랍니다. 독서토론과 스토리 텔링, UCC(동영상) 발표로 대회를 치릅니다. 아울러 지정도서의 지은이 또는 옮긴이를 모셔와 밤새워 함께 토론하고 함께 결론을 이끌어내는 소통하는 시간을 마련해 놓았습니다.

경남서는 가야고 간디고 경원고 김해외고 대아고 마산여고 분성여고 장유고 진례중 졸업생 연합, 창원명지여고의 독서 동아리들이 참가합니다. 부산서는 강서고 금곡고 낙동고 데레사여고 부산남고가, 서울서는 광문고 서울외고 송곡여고 중앙고 청량고가, 경북서는 김천고가, 전남서는 목포고 한빛고가, 강원서는 민족사관고 진광고가, 경기서는 수원연합 이우고 조원고 진성고가 옵니다. 중국서도 오는군요. 중국연대한국학교입니다.

3. 시민·공무원·시민운동가·기업인을 위한 강좌도

김해시가 몸소 진행하는 '시민을 위한 인문학 강좌'는 공공도서관에서 돌아가면서 마련합니다. 그러니까 2008년 8월 30일~11월 8일 열 차례 치른 '토요 인문학 강좌'와 12월 8~19일 여섯 차례 마련된 '송년 선물 인문학 강좌'는 한 차례 두 시간 강의로 끝나는 단발성이었습니다. 반면 올해 6~12월 진행되는 '시민 인문학 강좌'는 책 한 권으로 지은이와 함께 세 차례 여섯 시간 깊이 공부하는 연속성이 특징이랍니다.

'이야기로 떠나는 가야 역사 기행' 지은이 이영식 교수의 강의.


6월과 7월 김태언의 <마을이 세계를 구한다>와 이영식의 <이야기로 떠나는 가야 역사 기행>을 했습니다. 9월에는 조용현이 <보이는 세계는 진짜일까>를 7·14·21일 김해시청 소회의실에서 연속 강의합니다. 10월 <동양 철학의 흐름>(안종수), 11월 <불이사상으로 읽는 노자>(이찬훈), 12월 <조선시대의 한시>(강석중, 이상 인제대학교 교수)도 마찬가지 진행입니다.

시청 과장급 이상 간부와 시민단체 임원급이 대상인 'CEO 독서 아카데미'도 3월부터 다달이 한 차례씩 마련했습니다. 일반 공무원에게도 열려 있습니다. 참여하면 자기 계발 공부 시간으로 인정하고 인사 고과에도 반영한답니다. 반면, '너무 바쁜 분들이라' 꾸준한 참여가 잘 안 되는 단점이 있답니다.(비판 좀 받겠군요, 하하.)

제게 돋보이는 부분은 기업인들입니다. 눈에 불을 켜고 돈버는 궁리만 해도 시간이 모자란다고 여기기 십상인 기업인들이 인문학 공부를 위해 모인다니 어쩌면 신기하기조차 합니다.(이들이 왜 이러는지는 다음에 따로 알아보겠습니다만.) 김해기업연구소(소장 원종하 인제대 교수)가 주관하고 김해시와 인제대가 거듭니다.

다달이 셋째 수요일 아침 7시부터 9시까지 하는 '김해 기업 CEO 조찬 독서포럼'. 50명 정원에 회비는 50만 원입니다. 김해시는 강의료를 지원합니다. 기업인 모임이라 경영·경제를 빼기는 어렵지만, 강사 면면은 대충 이렇습니다. 강명관 부산대 한문학 교수, 배병삼 영산대 교수, 이종화 진해 기적의 도서관 전 관장, 강은교 시인(동아대 교수), 임학종 국립 김해박물관 관장…….

일단은 이렇게 말씀드리고요, 곧이어 참여 주체들의 얘기를 올리겠습니다. 여기에는 그이들이 느끼는 보람과 인문학을 하는 취지, 이를 통해 지역사회에서 또는 학교에서 무엇을 이루려고 하는지 등등이 담길 수 있으리라고, 저는 기대합니다. 하하.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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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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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다단계 2009.08.28 14:5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부럽습니다. 제가 어릴때만 해도 책사랑이나 독서 모임이 끊이질 않았는데....아쉽네요

  2. 달콤시민 2009.08.28 17:4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굉장히 멋진 도시네요.. 시민도, 공무원도 ^^
    깨어있는 도시라는 생각이 팍팍 듭니다~
    사실 제가 인문학을 전공했기 때문에 더 반가운게 아닌가 싶네요 ^^
    학교 다닐때는 이렇게까지 중요한 학문일거라고는 생각못하고, 바보같이 공부한 것 같아요~
    깨어있는 김해시의 미래를 기대합니다 ~!

    • 김훤주 2009.08.28 18:0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멋진 도시 맞습니다. 시장이 한나라당 소속인데도 괜찮습니다. 김해농고 출신이랍니다. 상고 나온 같은 김해 출신인 노무현 전 대통령처럼, 혼자 공부하면서 갖은 책을 많이 읽었나 봅니다.(제 짐작입니다만)

      물론, 모든 도시가 다 그렇듯이, 멋지지 않은 구석도 아주아주 많기는 합니다. 하하.

  3. 송순호 2009.08.28 19:4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김해의 도서관 정책이 늘 부릅습니다.
    마산도 따라 배울려고 노력을 합니다만
    아직 공무원들이 준비가 덜 되어 있습니다.

    마산시도 도서관 정책이 조금씩 변하고 있습니다.
    작은 도서관을 시발점으로
    다양한 콘텐츠를 만들 수 있도록 도와 주세요.
    저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 김훤주 2009.08.29 11:1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다른 데는 몰라도 마산은 시장이 문제입니다. 황철곤, 진짜 피곤한 존재입니다. 이명박이랑 마찬가지로, 집에 가서 손주 보면서 쉬면 딱 좋겠는데..

  4. 김우재 2009.08.28 21:2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감동입니다. 다만 앞으로 폭이 더욱 넓어지길 기원합니다. 그나저나 수유너머에서 주로 강의를 맡고 있군요. 용자 강유원 교수님이 함께 하실 수 있으면 좋을텐데 그게..

  5. 도야지 2009.08.28 23:2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김해시 멋지네요..

  6. 인문학 2009.08.29 00:3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인문학도 돈 되는 학문이지요. 인문학 앞에서 돈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좀 미안하기는 하지만, 수많은 책들과 문화 컨텐츠의 바탕은 인문학이잖아요. 다만 당장 돈 안되는 것 같아서 한국에서 발전하지 못했지만요.

    다만 걱정되는 것은, 지자체의 한정된 예산을 지역 현안 다른 부분이 아니라 도서관 사업에 투입하는 것이 전체 지역 주민의 이익을 줄이게 하지는 않을까 하는 점입니다.

    • 김훤주 2009.08.29 11:2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렇지는 않은 것 같고요. 도서관은 마을 정자처럼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 싶고요, 인문학 읽기 같은 것은, 이를테면 보통 기초자치단체마다 앞다투듯이 하는 무슨무슨 축제 하나에 들이는 예산만 있으면 몇 해는 충분히 할 수 있지요.

  7. 반짝이 2009.08.29 20:2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우리나라 국민들보다 일본국민들이 책을 많이 읽는다 하는데, 일본 가 보니 모퉁이만 돌면 동네 도서관이 있더군요. 우리나라도 초중고의 학교도서관만 잘 활용해도 될 것 같은데.
    무엇보다도 아이들은 과중한 학습노동에서, 어른들은 야근에서 해방되어야 책읽을 마음도 시간도 확보할 수 있겠지요. 김해시, 홧팅입니다!

  8. wheelbug 2009.08.31 16:2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말 김해시는 멋진 곳이군요.
    취업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인문계열 학과를 없애버리고도 이를 경쟁력이라고 자랑하는 무식한 대학들이 많습니다. 이런 대학 총장님들이 한 번 읽어봐야 할 포스트입니다. 물론 온통 삽질에만 혈안이 되어 있는 정부나 내년 지방선거에만 정신이 팔려있는 자치단체장들도 함께 읽어봐야겠지요.

  9. 김희경 2009.09.04 10:1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녕하세요.
    저는 서울 도봉구에 살고 있습니다.
    김해의 인문학강좌 듣고 싶네요.

    저희 지역도 인문학 강좌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민간영역에서 연합해서 진행하는
    생기발랄인문학강좌, 도봉여성희망학교가 대표적입니다.
    특히 도봉여성희망학교의 경우, 강의에 그치지 않고 후속모임도 운영하여
    지역에서 인문학적 실천도 고민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