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거 뭐야? 그림책도 아니고, 그림책이 아닌 것도 아니고! 이상한 책이었습니다. 글이 주욱 이어지다가 다음 쪽으로 넘기면 그림이 나옵니다. 글은 무슨 말인지 알아채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글 읽은 뒤끝에 그림을 만나면 단박에 '팍' 느껴진답니다. 그러나 그 느낌을 말글로 풀어내기는 어렵습니다. 그냥 온 몸을 향해 '확' 끼쳐올 뿐입니다.

초등학교 독후감상문 쓰는 식으로 하자면, '<먼 곳에서 온 이야기들>을 읽고 책 속에 들어가 논다는 말이 무엇인지 알았다.'입니다.

머리가 꽉 채워지고 가슴이 부풀어오르는 데서뿐만 아니라, 머리가 텅 비워지고 또한 가슴에서 무엇이 빠져나가는 데서도 즐거움을 누릴 수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책은 오스트레일리아 작가 숀 탠이 풀어내놓은, 어린 시절 일상을 돌아보는 듯한 이야기 열다섯 편으로 꾸려져 있습니다. 하나같이 이상한 내용이고, 또 동시에 이상하게도 아름다운 이야기들입니다.

나뭇잎 모양으로, 병뚜껑 두 개 정도 크기로 그려진 외국인 교환학생 에릭을 다룬 작품 '에릭'을 보기로 들면 이렇습니다. 이 모습은 그 외국인 교환 학생의 행동거지(그리고 문화적 배경)를 주인공 어린이가 잘 알 수 없었음을 표상한다 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소박하고 사랑스러운 느낌도 준다. 이해하기는 어려웠어도, 존중하고 인정한다는 느낌을 주기에는 충분합니다.

더욱이 커피잔에 '서식'하던 에릭이 소리없이 떠나기 앞서 남긴 풍경은, 이런 느낌이 틀리지 않았음을 실증합니다. 서식처 커피잔에는 "잘 지내다 갑니다. 고맙습니다"라는 메모가 꽂혀 있고, 둘레에는 해와 불과 갖은 식물을 닮은 것들이 밝게 피어납니다.

사계절출판사 제공.


에릭의 서식처와 갈 때 남긴 것들. 사계절출판사 제공.


"몇 해가 지난 지금도, 어둠 속에서 여전히 잘 자라고 있다. 새로운 손님이 올 때마다 제일 먼저 그것을 보여 준다. '우리 집에 머물렀던 외국인 손님이 남기고 간 것 좀 보세요.'"

'우리의 원정'은, 감탄스럽기까지 하답니다. "형하고 나는 도로 교통 지도가 왜 268번 지도에서 끝나는지에 대해 크게 의견이 엇갈린 적이 있었다." 나는 분명 뒷장이 떨어져 나갔다고 생각했고 형은 말 그대로 정확하게 그려진 것이라 말했습니다.

"268번 지도에는 골목길과 큰길, 교차로와 막다른 길들이 지도 가장자리까지 메우고 있었다." "그러니까 내 말은, 마치 거기에서 스르르 세상이 사라져 버린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건 말이 안 된다."

형제는 20달러라는 거금을 내기에 걸고 탐험에 나섰습니다. 글로 된 결말은 이렇습니다.

"모험이 가져다 준 흥분은 점점 사그라졌다. 다리가 아파 오고, 자외선 차단제를 챙겨 오지 않은 일로 서로 계속 책망하긴 했지만, 그 때문도 아니었다. 무언가 분명히 설명하기 어려운 것들이 있었다. 더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점점 더 똑같은 풍경들만 나타났던 것이다. 새로운 거리도, 공원도, 쇼핑몰들도, 마치 특대형 조립 세트 하나에서 꺼내 만들어진 것처럼 우리 동네 것들과 똑같아 보였다. 이른바 이름만 다를 뿐이었다."

그러고는 "우리는 앉아서 다리를 쉴 생각밖에 없었다. 성질 급한 형은 저만치 앞서 가고 있었다. 내가 따라잡았을 때 형은 길 한가운데서 등을 보인 채 앉아 있었다. 낭떠러지 아래로 다리를 흔들거리면서. '20달러 줘야겠네.' 내가 말했다."

그런데 이렇게만 끝난다면, 현대 사회의 특징인 자본 증식을 위한 '무한 복제'를 비판적으로 일러주는 범상한 작품으로밖에 여겨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책장을 넘기면 이어지는 형과 동생이 앉아 있는 그림이 있습니다. 이 그림에서는 무엇인가를 깨친 듯한 형제의 심정이 읽힙니다. 조금은 허망하다는 생각, 그러면서도 기분을 조금 편안하게 해 주는 나른함. 그 끝에 놓인, 이들 형제에게 들켜버린 현대 사회의 새로운 비밀, '무한 복제'.

사계절 출판사 제공.

이밖에 다른 것들도 마찬가지로 아름답고 재미나지만 '멀리서 온 비'는 더욱 그렇습니다.

그림 속에 글이 들어가 있는 이 작품에 담긴 '우주' 규모의 풍성함을, 한두 줄 말글로는 도저히 표현하지 못하겠습니다. 사람들이 쓰는 숱한 시(詩)들이, 그런 시에 담긴 감정들이 어떻게 순환하는지 즐겨 짐작해 보게 만든답니다.

사계절 출판사 제공.

몸소 한 번 들어가 보시기를. 들어가 몸소 누려 보시기를. 사계절, 95쪽, 1만2000원이랍니다. 하하. 

김훤주

먼 곳에서 온 이야기들 - 10점
숀 탠 지음, 이지원 옮김/사계절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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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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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주완 2009.10.17 20:3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참 특이한 이런 책도 있네요. 저도 함 볼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