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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친일인명사전>(인명편, 전3권) 편찬이 완료되었다. 8일 숙명여대 안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국민보고대회는 갑작스런 장소대관 거부와 경찰의 원천봉쇄로, 인근 효창원 안에 있는 백범 김구 선생 묘소에서 진행됐다.

연합뉴스와 뉴시스 등에 뜬 사진을 보니 오히려 백범 묘소가 친일인명사전 국민보고대회의 자리로 훨씬 어울렸다. 백범 선생 묘소에 책을 헌정하는 방식으로 시작되었으니, 훨씬 모양새가 났다. 현장에 있던 지인과 민족문제연구소 간부들도 '차라리 잘 됐다'며 이구동성이었다.

친일인명사전 발간에서 막판까지 국민의 관심을 끌게 해줬던 것은 바로 박정희 전 대통령과 장지연 경남일보 주필의 유족들이었다. 유족들이 법원에 친일인명사전 게재 및 발행금지 가처분신청을 냈기 때문이다. 이 덕분에 오히려 이날 국민보고대회가 더 큰 국민적 관심 속에 열릴 수 있었다.

갑작스런 장소 대관 거부로 보고대회는 백범 묘소로 옮겨 진행됐다.


어쨌든 법원은 지난 6일 이들의 신청을 기각했다. 재판부는 "친일인명사전에 장지연 선생을 게재하는 것이 표현의 자유의 한계를 넘어 명예 등 인격권을 침해하는 것으로 보기 부족하다"며 "표현행위의 사전금지가 허용되는 경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없다"고 기각 사유를 밝혔다.

공교롭게도 법원이 가처분신청을 기각한 날, 11월 30일로 활동기간이 만료되는 대통령 직속기구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반민규명위, 위원장 성대경)은 <친일반민족행위 관계 사료집>(전16권)을 완간했다.

대통령 직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6일 발간한 사료집. 여기에도 장지연의 친일시문이 다수 실려 있다.


이 사료집 13권에는 장지연의 대표적인 친일시문 10편과 경남일보에 실린 친일 기사 7편이 실렸다. 반민규명위의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서 장지연이 빠지긴 했지만, 그의 친일행위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님을 이 사료집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막판까지 논란을 빚은 장지연의 친일행적에 대해 <친일인명사전>은 모두 6페이지를 할애하여 서술하고 있다. 200자 원고지로 무려 70매가 넘는 분량이다. 주요 내용을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장지연 張志淵│1864∼1921, 언론인

1864년 11월 30일 경상북도 상주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인동이다. 초명은 장지윤(張志尹), 자는 화명(和明)·순소(舜韶)다. 호는 위암(韋庵)·숭양산인(崇陽山人)이다. (중략)

1905년 4월 정6품 승훈랑(承訓郞)의 품계를 받았고, 7월부터 9월까지 민영기(閔泳綺)·윤치호(尹致昊)·이달용(李達鎔) 등과 함께 일본의 신문사를 시찰하고 돌아왔다. 같은 해 11월 20일자 <황성신문>에 '을사늑약'을 반대하는 논설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을 게재한 일로 다음 날인 21일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이 일로 11월 20일자 <황성신문>이 압수되었고, 1906년 2월 12일까지 정간되었다. 1906년 1월 석방되었으며 <황성신문> 사장직에서 물러났다. (중략)

1909년 10월 경상남도 진주에서 창간된 지방신문 <경남일보>의 주필로 초빙되었고, 1911년 10월 진주로 이사했다. (중략)

주필로 있을 때 <경남일보>는 1910년 11월 5일 일본 천황 메이지(明治)의 생일인 천장절(天長節)을 맞아, 1면 제호의 위와 옆에 X로 엇갈린 일장기와 오얏문양으로 장식하고, 아래에는 '봉축천장절(奉祝天長節)'이라 표기해 이를 기념했다. 다음 해인 1911년 11월 2일에도 천장절을 기념해 2면을 일장기와 오얏문양으로 장식했는데, 2단을 합친 전체 크기에 '축천장절'이라 표기하고 기념 한시(漢詩)를 게재했다. 천장절 기념 한시는 <경남일보>의 주필로 재직하던 시기에 무기명으로 게재되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동쪽 바다 일본에서 해가 떠오르니 태양이 빛나는구나 / 무지개와 북두성이 정기를 길러 우리 천황께서 나셨다 / 보위에 오르신지 44년 동안 성수무강하셨네 / 덕과 은혜가 두루 미치고 위엄이 널리 빛나는구나 / 뭇 백성들을 어루만지시니 우리 동양의 기초를 세우셨네 / 오호라 이러한 해가 만년이 되어 영원하리라."

<경남일보>는 1911년 11월 3일 개최되는 천장절 경축행사를 위해 10월 27일부터 본문에 고정란을 만들어 '천장절 축하 의절(儀節)'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매일 게재했다. <경남일보>가 주관하는 천장절 경축행사도 열렸는데, 진주군 수정봉(水晶峰) 정상에서 천 가지의 등화로 봉장한 '축 천장절'이란 네 글자가 밤을 밝히는 가운데 진행되었다.

1913년 7∼8월경 신병을 이유로 <경남일보> 주필을 그만두고 마산으로 이주했다. (중략)

매일신보사는 조선의 문사(文士)로 널리 알려진 장지연을 영입하기 위해 적지 않은 노력을 기울였다. (중략) 전 편집국장 나카무라 겐타로(中村健太郞)는 경성일보사 2대 사장을 지낸 아베 미쓰이에(阿部充家 : 1914.8∼1918.6.재직)가 재직 당시 "언론의 웅(雄)으로서 이름이 높던 장지연 씨를 회유하느라고" 고심이 많았음을 밝혔고, 전 편집국장 방태영(方台榮 :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은 자신이 장지연을 매일신보사로 영입했음을 밝혔다.

장지연은 <매일신보> 1915년 3월 14일자 '기창만필(羈窓漫筆)'(3)에서 "평소의 뜻 배불리 먹고 따스한 옷을 바라는 것 아니었는데, 그대의 권유하는 뜻에 감격하여 종유(從游)하게 되었다"고 하면서 아베가 자신을 알아주고 권유한 데 감격해 그와 사귀게 되었음을 밝혔다. (중략)

1914년 12월 열린 불교진흥회 설립총회에서 간사에 선출되었다. 불교진흥회는 친일 승려 이회광(李晦光)의 주도로 설립되었고, 설립취지에서 "위로는 일본 천황의 통치를 보필하며, 아래로는 백성의 복을 도모하고 불교를 진흥하여 우리 동포로 하여금 모두가 불교에 귀의하게 하고자 불교진흥회를 발기 한다"라고 하여 설립당시부터 뚜렷한 친일색채를 표방해 회주(會主) 이회광은 많은 승려들의 비난을 받았다. 1917년 2월 불교옹호회(佛敎擁護會)로 개편되었다. 1915년 7월에는 불교진흥회가 개최한 천도식(薦度式)에 사용된 제문을 지었다. <매일신보> 7월 6일자에 불교진흥회 간사 장지연의 제문과 함께 중추원 고문 조중응(趙重應) 자작이 지은 제문이 실렸다.

1914년 12월 23일자 <매일신보> '사고(社告)'와 함께 같은 날짜 1면에 숭양산인 장지연의 실명으로 '고재만필(古齋漫筆) - 여시관(如是觀)'의 연재가 시작됐다. 이후 1918년 12월까지 4년여 동안 <매일신보>에 한시를 포함해 약 700여 편의 글을 실었고, 이 중에는 조선총독부의 시정(施政)을 미화하고 옹호하는 여러 편의 글과 한시가 포함되었다.

1910년대의 <매일신보>는 식민정책과 관련한 각종 법령·제도를 일제의 입장에서 설명하고 전파하는 기능을 수행하였으며 다양한 방면에서 구체적이고 적극적으로 식민주의적 관점을 관철하고 있었다. 식민체제의 우월성과 근대성을 내세우거나, 동화정책(同化政策) 선전을 제일의 목적으로, 조선인의 열등함을 강조하는 한편 식민지 개발정책을 '시혜'로 받아들이도록 강요했다. (중략)

식민지가 된 원인을 단체성이 없는 조선인의 민족성 때문이라고 보았는데, "한인은 단체성이 없다."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말을 빌어 인용하면서 같은 민족을 열등 인종으로 치부하기까지 했다.

1915년 4월 3일의 '신무천황 제일(神武天皇祭日)'을 맞이해 같은 날짜 <매일신보>에 일본 천황가의 계통을 소개하면서 "신무는 영웅의 신명(神明)한 자질로 동정서벌(東征西伐)하여 해내(海內)를 평정하고 나라를 세워 자손에게 전해 주었으니, 지금에 이르도록 2576년간을 123대 동안 황통(皇統)이 길이 이어지고 있다. 이른바 만세일계(万世一系)란 것이 바로 이것이다. 어찌 세계 만국(萬國)에 없는 바가 아니겠는가"라고 하면서 특별히 이 글을 지어 바친다고 밝혔다. (중략)

1917년 6월 순종이 일본 천왕 다이쇼(大正)를 만나러 간 것에 대해서는 "이왕 전하 동해를 건너시니 / 관민이 길을 쓸고 전송했네 / 오늘 같은 성대한 일은 예전에 드물던 바 / 일선융화의 서광이 빛나리라"라고 했다.

순종의 일본 방문은 동생인 영친왕 이은(李垠)이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것과 일본 황실과의 결혼 내정에 감사의 뜻을 표한다는 명분으로 추진되었다. 그러나 일제의 숨겨진 의도는 영친왕과 일본 황실의 결합을 통해 이왕가의 권위를 낮추어 식민통치의 효과를 극대화시키려는 것이었다. 이를 두고 "일선융화의 서광이 빛나리라"고 찬양한 것이다.

한편 1916년 12월 10일자에는 2대 총독으로 부임하는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를 환영하는 한시가 게재되었다.

"채찍이며 모자 그림자에 수레 먼지 가득한데 / 문관과 무관들 분분히 새로 악수 나누네 / 한수의 풍연 원래 낯이 익으니 / 매화도 예전처럼 기뻐 웃는 듯."

하세가와는 청일전쟁 때의 공적으로 남작에 올랐고, 1904년부터 1908년까지 한국주차군사령관을 지내면서 이토와 함께 '을사조약'을 강요했으며, 통감부가 설치되자 임시 통감대리를 지냈다. 합병 후 총독으로 승진해 조선으로 다시 돌아오자 이를 환영하면서 '한수의 풍연 원래 낯이 익으니 매화도 예전처럼 기뻐 웃는 듯'이라고 표현했다.

1917년 10월 문예구락부가 주최하는 문예대회 고시원(考試員)으로 참여했다. 문예구락부(文藝俱樂部 : 총재 후작 朴泳孝)는 1911년 7월 한문의 폐지에서 유래되는 위기감과 부당성을 알리기 위해 조직되었다. 문예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도 "시의(時宜)에 관계된 것을 제거 한다"고 하여 식민지 현실에 대한 비판적 언급은 금지했다.

1918년 12월 1일자에 실린 '마산에 신조(新造)한 석탑'이 <매일신보>에서 확인되는 마지막 글이다. 1919년 4월 양산(梁山)을 유람했으며, 1921년 1월에 병을 얻었으나 회복되지 않고 더욱 심해져 음식을 줄이고 술도 끊으면서 치료하다가 1921년 10월 2일 사망했다. 1962년 3월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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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김주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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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그런깜냥 2009/11/08 19: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박정희는 굵직한 건수만 세어보면 이번 인명사전 등재까지 합해서
    스포츠용어로 그랜드슬램 이군요.

  2. BlogIcon 林馬 2009/11/09 11: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은 학교다닐때 국사시간 시험맴버로 빠지지 않았는데...
    마산현동의 장지연로는 어떻게 되는거지요?
    진실을 왜 지금까지 숨기며 속였을까요.
    참 입맛이 없어지네요.

    • BlogIcon 김주완 2009/11/09 12:03  댓글주소  수정/삭제

      처음엔 독립지사였으나 이후 변절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요즘도 젊을 땐 운동권이었다가 시간이 지나면 꼴통 기회주의자들이 되는 사람들이 많죠. 장지연도 그런 케이스인 것 같네요.

  3. 브네딧 2009/11/09 15:4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지금 학교시험에 장지연의 시일야 방성 대곡이 나오는데.. 안타깝네요.

  4. BlogIcon 한민족 2009/11/09 16:1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한질 사고 싶다...... 얼마정도 할까?

  5. 시일야방성대곡 2009/11/10 10:4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1945년 11월 5일, 백범 김구는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임시정부 수뇌들과 함께 충칭(重慶)을 출발해 상하이(上海)에 기착한다. 13년 전 첫 임시정부가 수립된 땅으로, 일제의 압박을 피해 항저우(杭州•1932), 전장(鎭江•1935), 창사(長沙•1937), 광저우(廣州•1938), 류저우(柳州•1938), 치장((綦江•1938), 충칭(1940) 등지로 옮겨다니며 독립운동을 한 그로서는 감회가 새로울 수밖에 없었다. 항저우로 쫓겨갈 때에 비해 상하이에 거주하는 동포 수가 수십 배 늘어났다는 얘기를 듣고 백범은 말을 잇는다. “하지만 독립정신을 굳게 지키며 왜놈의 앞잡이가 되지 않은 사람은 10여 명뿐이다.”

    왜 아니겠나. 백범 같은 위인이라면 모를까 광기 서린 일제의 총칼 아래서 민족 지조를 지키며 살 수 있었던 조선인들이 얼마나 됐겠나 말이다. 한두 해도 아니고 40년 가까이 방치된 세계사의 그늘 속에서 하루 살기를 걱정하는 범부로서 언감생심 광복의 꿈을 품을 수 있었을까 말이다. 백범은 다 이해하면서도 유독 한 사람만은 용서할 수 없었다. 백범일지에 이렇게 전한다. “민족 반역자로 변절한 안준생(安俊生)을 교수형에 처하라고 중국 관헌에 부탁했으나 그들이 실행하지 않았다.”

    안준생이 누군가. 우리가 자랑하는 독립운동가 중 부동의 1위 영웅인 안중근 의사의 둘째 아들이다. 그는 1939년 10월 15일 서울 장충단 공원, 지금의 신라호텔 자리에 있던 박문사(博文寺)를 찾는다. 이름 그대로 안 의사한테 사살된 조선총독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추모하려고 만든 절이었다. 준생은 이토의 영전에 향을 피우고 “아버지의 죄를 내가 속죄하며 보국의 정성을 다하겠다”고 맹세한다. 다음날엔 이토의 둘째 아들인 일본광업공사 사장 분키치(文吉)를 만나 직접 사과했다. 이 만남을 담은 사진은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 10월 18일자에 ‘극적인 대면, 여형약제(如兄若弟) 오월(吳越) 30년 영석(永釋)’ 즉, ‘형•동생으로 30년 원한을 영원히 풀다’라는 제목으로 대문짝만하게 실렸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전만 해도 준생은 독립운동에 관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조국과 달리 학교 보내주고 집 구해준 일제의 책략에 끝내 굴복하고 이용되고 만 것이다. 백범은 호랑이한테서 난 ‘개’를 용서하기 어려웠겠지만 나는 그를 친일파로 모는 시각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는 안중근의 핏줄이었기에 불운을 감내할 수밖에 없었던 희생자였을 뿐이며, 죄가 있다면 그것은 거사를 치른 애국자의 친아들 하나 제대로 추스를 수 없었던 부끄러운 조국이었다.

    다행히 최근 한 좌파 단체가 펴낸 이른바 ‘친일인명사전’에는 그의 이름이 들어 있지 않다. 하지만 내 생각과 같은 이유가 아닌 모양이다. 그보다 친일 행적이 덜한 사람들이 친일파로 이름을 올리고 있으니 말이다. 만주국 중위였다는 경력만으로 친일파가 된 박정희 전 대통령이 대표적인 경우다. ‘시일야방성대곡(是日夜放聲大哭)’으로 을사늑약을 규탄한 위암 장지연 같은 이도 친일적인 글 몇 편 탓에 더러운 이름이 되고 말았다. 반면 좌파 인사로 신문에 학병 권유문을 썼던 몽양 여운형 같은 이는 무슨 이유인지 명단에서 빠졌다.

    이런 중심 잃은 선정으로 누가 무엇을 얻는지 모르겠다. 식민지 시대에 살아남기 위해, 후배 기자에게 떠넘기지 않고 주필로서 스스로 짐을 진 사람들을 을사오적과 같은 부류로 만들어 대한민국 국민 중 누가 득을 볼 수 있는지 모르겠다. 이런 사전은 차라리 없는 게 낫다. 미국 독립전쟁 뒤 조지 워싱턴 대통령과 찰스 톰슨 대륙회의 의장은 회고록을 쓰지 않기로 합의한다. 독립이라는 영광스러운 대의(大義)도 지도자들의 욕심 탓에 얼마나 자주 재앙을 맞을 뻔했는지 국민들이 알면 환멸을 느낄 게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쓰려던 사실이 우리처럼 왜곡된 가치 판단에서 나온 것이라면 더욱 그랬을 것이다.  

  6. 똑바로 알고 쳐 씨부려라 2009/11/24 05:2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김희선 의원의 부친 김일련은 또한 어떠하였는가? 일제시대에 면장을 지낸 유시민의 아버지 유태우와, 훈도노릇을 하던 유시민의 백부, 훈도였던 김근태의 아버지, 일본유학파 출신 청양면장이었던 총독부 공무원 이해찬의 아버지, 일본군 오장이었던 이미경 의원의 아버지, 조선인으로 일본 천황의 경호원이 됐던 일본헌병 장교 이봉권, 나석주 의사를 사살한 동양척식회사와 식산조합의 직원으로 20년 근속한 정진철, 정동영의 부친 등 민족문화연구소측 친일파 세력의 수는 무수히 많건만" 증거와 증인이 있는 확실한 친일파는 빼고 소설을 써서 박대통령을 친일파로 조작한 책을 믿어줄 사람이 있을까?

  7. 아무리 발버둥처도 진실은 2010/01/03 09:0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친일에서 박정희대통령예기가 많이 나오는데
    박정희대통령 살아계실때 본인에 예기는 어느정도 했는것같다
    본인도 생각를 해보면 내가죽어서 과거가 감추어지는 일도 않을터이고
    내가대권를 잡아서 하고싶은것 다 하고 떠나는데 무슨 여한이 더 있겟는가
    그러니 소상히 여러말 필요없고 한마디 내무덤에 침를 배터란말 한마디
    말속에 모든뜻이 담겨저있다
    박정희대통령님에생각은 오히려 나는 부끄럽지만 대통령를 지낸 분으로서
    나라를 생각하지 않을가
    잘 모르지만 친일사전 만든분들한테 오히려 고개숙여
    감사하다고 저새상에서 내려다 볼지도
    박정희대통령 후손보다는 조국를 위한마음이 본인에 마음이 틀림없다고 본다
    그리고 개인적인 생각은 과거는 부그럽지만 권력18년를 잡은 사람답게
    본인에 부끄러움를 말 한마디로 남기고간것이 역시 대권를 잡은 사람 답다
    만약에 본인 치부에 대해서 한마디도 안남기고 갔다면
    그나마 더 안좋은 사람으로 역사에 이름 남겨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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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에어컨 공기는 식물에 어떤 영향 미칠까?

간간이 비가 내리긴 하지만 아직도 여전히 덥다. 올 여름은 특히 후텁지근한 것 같다. 습기도 높고 불쾌지수도 높다. 사무실의 내 자리 옆에는 분재가 하나 있다. 무슨 나무인지는 잊어버렸다. 내 자리 옆으로 오게 된 지는 2개월..

내가 신문 1면에 반성문을 쓴 까닭

나는 신문을 진보와 보수로 편을 가르는데 별로 동의하지 않는다. 그저 올바르고 정의로운 신문이냐, 사이비 기회주의 신문이냐로 나눌 수 있을 뿐이다.(☞경향·한겨레가 과연 '진보 언론'인가?)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은 신문을 그렇..

고향서 먹은 생물 갈치구이, 역시 이 맛!

어제(21일) 오랫만에 고향집에 다녀왔다. 9월 초에 돌아오는 어머니 제사를 앞두고 제사용품과 그릇 등을 가져오기 위함이다. 이번 제사부터 처음으로 고향집이 아닌 내가 사는 마산 집에서 모시게 된다. 고향집이라곤 하지만 어머니..

막내 남동생에게서 받은 만년필 선물

나는 8남매 중 다섯째다. 위로 누나가 넷 있고, 아래로 여동생 둘, 막내로 남동생 하나가 있다. 나는 장남이다. 손위 매형 네 분과 손아래 매제 둘도 모두 장남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큰 매형은 장남인 내가 어렸던 탓에 맏사..

주대환 "야 4당 통합후 민주당 흡수해야"

주대환. 마산 출신의 진보정치 사상가다. 나이는 56세. 민주노동당 정책위원장을 거쳤지만, 지금은 소속된 정당이 없다. 지금 그의 공식 직함은 '사회민주주의연대 공동대표'다. 원래 마산 출신인 그는 서울대를 다니다 학생운동으로..

편집국장을 맡은 후 양복을 입는 까닭

신문사 편집국장을 맡은 후부터 평일에는 계속 양복 차림으로 출근하고 있습니다. 평소 저와 알고 지내던 사람들에게는 이런 모습이 좀 낯설게 보였나 봅니다. 얼마 전 어떤 분으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왜 계속 양복을 입고..

기자보다 훨씬 글 잘쓰는 개그맨들

"하늘나라 선녀님들의 의상이 더 예뻐지겠네요." 개그맨 김제동이 앙드레 김의 타계 소식을 듣고 자신의 트위터에 올린 글의 한 구절이다. 김제동 말고 어떤 글쟁이가 이렇게 멋진 추모사를 쓸 수 있을까? 김제동의 촌철살인은 평소..

중앙일보의 노골적 불법 판촉, 딱 걸렸네

블로그를 하다 보니 참 재미있는 일이 많다. 그 중 하나는 내가 사는 지역을 벗어나 전국에서 각종 제보가 들어온다는 것이다. 아래 사진은 전라북도에 사시는 한 독자께서 핸드폰 카메라로 찍어 보내 주신 것이다. 한 식당의 벽에..

꼬부랑 할머니와 젊은 여성의 아름다운 동행

토요일은 신문사의 휴일이지만, 간부 교육이 있어 택시를 타고 나오는 길이었습니다. 방금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택시가 회사 앞 신호등에 걸려 신세계백화점 맞은 편 육교 옆에 멈췄을 때였습니다. 육교 계단으로 한 아주머니가 꼬부..

김태호 총리후보는 왜 계란후라이를 태웠나?

김태호 국무총리 후보자가 1시간 전(6시 30분쯤) 자신의 트위터(@hohodamo)에 아래와 같은 글과 사진을 남겼네요. "미숫가루에 우유 섞어 한잔 아~양이작다. 그래서 계란후라이, 다탔다. 라면은 자신있는데... http..

내가 신문 1면에 반성문을 쓴 까닭

나는 신문을 진보와 보수로 편을 가르는데 별로 동의하지 않는다. 그저 올바르고 정의로운 신문이냐, 사이비 기회주의 신문이냐로 나눌 수 있을 뿐이다.(☞경향·한겨레가 과연 '진보 언론'인가?)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은 신문을 그렇..

중앙일보의 노골적 불법 판촉, 딱 걸렸네

블로그를 하다 보니 참 재미있는 일이 많다. 그 중 하나는 내가 사는 지역을 벗어나 전국에서 각종 제보가 들어온다는 것이다. 아래 사진은 전라북도에 사시는 한 독자께서 핸드폰 카메라로 찍어 보내 주신 것이다. 한 식당의 벽에..

아내가 남편 사무실에 보낸 꽃바구니

경남도민일보는 사원윤리강령과 기자실천요강에서 취재원으로부터 1만 원 이상의 선물을 받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그러면 인사이동이나 승진 때 의례적으로 들어오는 축하화분들은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한국사회의 오랜 관행으로 보내오는..

[10문 10답]블로그가 결국 직업이 되었습니다

좀 멋쩍네요. 그동안 블로그에 대해 여러 포스팅이나 서면인터뷰도 적지 않았는데, 다시 쓰려니 새삼스럽기도 하네요. 이 블로그의 공동운영자인 김훤주 기자가 저를 지목한 것도 좀 그렇고, 저를 소개한 내용도 손발이 다 로그아웃되려..

지저분한 곳에서도 일출은 아름답다

일출은 언제, 어디서 봐도 아름답다. 낮에 가까이 가보면 지저분하기 짝이 없는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의 바닷가에서도 일출은 아름답니다. 붉은 햇살이 세상의 더러운 것을 가려주는 효과인 것 같다. 그래서 일출 때 찍은 사진만 보..

단체수련회 가면 좋을 부산 제1호 국민호텔

어제(12일) 부산에 다녀왔다. 부산지하철노동조합의 간부수련회에서 '인터넷을 통한 소통'을 주제로 강연을 했다. 노동조합이 간부교육에서 이런 주제를 다루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그러나 그와 관련해서는 나중에 따로 이야기하기..

삼천포대교 일대에서 엉겨붙은 봄과 바다

어린이날 하루 전날, 삼천포대교를 다녀왔습니다. 아니 제대로 말하자면 창선-삼천포대교가 되겠습니다. 그러니까, 다녀와서 찾아봤는데 창선-삼천포대교가 맞더군요. 삼천포대교는 창선-삼천포대교를 구성하는 여러 다리 가운데 하나일 뿐..

편집국장을 맡은 후 양복을 입는 까닭

신문사 편집국장을 맡은 후부터 평일에는 계속 양복 차림으로 출근하고 있습니다. 평소 저와 알고 지내던 사람들에게는 이런 모습이 좀 낯설게 보였나 봅니다. 얼마 전 어떤 분으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왜 계속 양복을 입고..

이렇게 보니 마산도 제법 아름답네요

장마철입니다. 세상이 온통 흐리고 어둡습니다. 이런 장마철에도 가끔 시야가 깨끗해질 때가 있더군요. 모처럼 비가 개였을 때 구름은 있지만, 평소와 달리 뿌연 공해가 없어 선명한 시야가 펼쳐집니다. 요 며칠간 간간이 개였을 때..

만년필 마니아가 비싼 노트를 쓰는 이유 : 시아크

나는 필기구를 좋아한다. 특히 만년필로 글쓰는 걸 즐긴다. 만년필로 글쓰기를 하다보면 종이 지질도 따지게 된다. 잉크를 잘 흡수하면서도 번짐이 없어야 한다. 종이가 지나치게 매끈하여 글을 쓸 때 미끈거리는 느낌이 들면 만년필로..

'추적 60병'이라는 술집 간판을 보고…

제가 몸담고 있는 경남도민일보는 경남 마산 어린교 오거리에 있습니다. 양덕동인데요, 큰길을 건너면 사보이호텔 있는 쪽 산호동이 됩니다. 점심 때 밥먹으러 길 건너 산호동으로 가곤 하는데요, 어제 사보이호텔 뒤쪽으로 해서 돌아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