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산형무소 재소자 학살에 이어 마산·창원·진해 보도연맹원 학살사건의 진실이 마침내 밝혀졌습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위, 위원장 이영조)가 이 사건에 대한 '진실규명' 결정을 내렸기 때문입니다.

물론 진실위의 내부적인 결정은 지난달에 이루어졌습니다만, 관련 법률에 따라 국회 보고를 거친 후 공개하도록 되어있기 때문에 오늘에야 알려지게 된 것입니다.

이 또한 진실위는 아직 공식발표하지 않았지만, 확인된 희생자 유족들에게 전달된 '진실규명 결정서'를 제가 입수해 보도함으로써 알려지게 된 것입니다.


그동안 적지 않은 민간인학살 사건에 대한 진실규명 결정이 있었지만, 특히 저는 이 사건에 대한 감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문제제기 10년 만에 받아낸 마산 창원 진해 보도연맹원 사건 진실규명 결정서.

1961년 5·16쿠테타 세력이 진상규명운동에 나선 유족회 간부들을 모조리 잡아 가두고 합동묘까지 부관참시한 만행을 저지르는 바람에 철저히 은폐되어버렸던 이 사건을 다시 세상으로 끌어낸 사람이 바로 저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한 유족으로부터 결정서를 건네받아 손에 쥐는 순간 하마터면 눈물이 나올 뻔 했습니다.


마산·창원·진해 보도연맹원 사건을 경남도민일보에 처음 보도한 것이 1999년 9월이었으니 그로부터 국가기관의 진실규명에 이르기까지 꼭 10년이 걸린 셈입니다.
 
이후 2000년부터 현대사 연구자인 김동춘 강정구 교수와 여순사건을 파헤친 이영일 여수사회연구소장 등과 함께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범국민위원회'를 만들고 전국의 관련단체를 찾아다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어쨌든 진실위는 희생자 유족들에게 전달한 '경남 마산·창원·진해 국민보도연맹 사건 진실규명 결정서'에서 "한국전쟁 발발 후 1950년 8월까지 마산지구 CIC, 마산육군헌병대, 마산·진해경찰서 소속 경찰이 마산·창원 관내 보도연맹원과 예비검속 대상자들을 소집·연행하여 마산 앞바다 등 관내 여러 지역에서 집단 희생시켰다"고 공식 확인했습니다.

민간인학살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범국민위원회 창립 첫해인 2000년 12월 23일 문경에서 열린 송년회에서 찍은 사진. 당시 화소수가 떨어지는 내 디지털카메라로 찍어 화질이 좋지 않지만, 남아 있는 유일한 사진입니다.


진실위는 이 사건에 대한 조사 과정에서 당시 창원군 주민 김상복을 비롯하여 마산·창원·진해지역 주민 77명의 희생자 명단을 확인했다고 밝혔습니다. 진실위는 그러나 이들 외에도 '부산·마산·진주형무소 사건'에서 희생자로 확인된 이 지역 40명을 포함하면 최소 117명이 확인되었으며, 1960년 마산지구피학살유족회가 가해자들을 고발하면서 밝힌 마산지역 희생자 274명의 명단을 종합하여 희생자는 대략 400여 명일 것으로 추정된다고 덧붙였습니다.


진실위는 "이 사건이 한국전쟁기에 발행하였다고 하더라도 국민의 생명을 빼앗거나 인신을 구속하는 처벌을 할 경우 합당한 이유를 가지고 적법한 절차를 따라야 함에도 군·경은 정당한 재판절차를 거치지 않고 예비검속한 사람들을 불법 살해했다"며 "이는 인도주의에 반한 것이며 헌법에서 보장한 국민의 기본권인 생명권을 침해하고 적법절차 원칙과 재판받을 권리를 침해한 불법행위"라고 규정했습니다.

역시 2000년 10월 22일 거창학살 위령제 및 위령공원 기공식 때 김동춘, 강정구 교수, 채의진 문경유족회장 등과 함께 찍은 사진입니다.


진실위는 이번 사건에 대한 조사과정에서 <경남도민일보>의 발굴 보도와 기록을 중요한 자료로 활용했음을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결정서의 참고문헌을 소개하면서 "특히 <토호세력의 뿌리-마산현대사를 통해 본 지역사회의 지배구조>는 <경남도민일보>가 1999년부터 2001년까지 100회를 연재했던 '지역사 다시읽기'를 수정·보완한 내용으로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사건과 관련된 다수의 증언과 기록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또한 마산 시민극장에서 마산형무소로 이송된 보도연맹원 및 예비검속된 사람들의 희생과정도 <경남도민일보>에 보도된 윤봉근(마산시 창포동 주민·당시 20세, 현재 작고)의 목격담을 인용하고 있으며, 역시 <경남도민일보>가 발굴한 1960년 10월 23일자 마산매일신문 기사와 희생자 명단, 마산여중 학적부에서 확인한 시국사건 관련 제적 학생의 보도연맹 가입 사실, 구산면 심리 해안가에 묻힌 희생자 9명의 묘(일명 아홉이묘) 등을  중요한 조사근거로 삼고 있습니다.

진실위가 결정서에서 밝힌 마산·창원·진해 보도연맹원 사건의 진실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 또한 2000년 사진인데요. 김동춘 교수와 강금실 변호사, 강정구 교수, 강창일 교수(현 국회의원), 서중석 교수 등의 얼굴이 보이네요. 강금실 변호사도 당시 많은 법률적 조언을 해주었습니다.


◇보도연맹 결성 과정 = 국민보도연맹은 '전향자를 계몽·지도하여 명실상부한 대한민국 국민으로써 받아들인다'는 목적을 표방하고 1949년 4월 20일 결성되었다. 당시 김효석 내무부장관이 총재를 맡고 백한성 법무부차관, 장경근 내무부차관, 옥선진 대검찰청 차장이 부총재를 맡은 정부주도하의 관변단체였다. 1949년 9월 20일부터 지방지부 조직에 착수하였는데 도내 각 경찰서 단위로 하부조직을 편성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보도연맹 경남도연맹은 명예이사장 최철용(경남도경 경찰국장), 이사장 신영주(경남도경 사찰과장), 간사장 노백용, 사무국장 강대홍, 총무부장 성낙명, 보도부장 임순야, 선전부장 권일초, 조직부장 전호일, 조직부 차장 김대일, 재정부장 전창호, 사업부장 이성출, 훈련부장 조대순, 부녀부장 최소남, 간사 문병원·장수봉·이만용·김필란이었다.

1949년 12월 7일 마산 부림극장에서 결성선포대회를 연 마산연맹은 검찰지청장이 위원장을, 경찰서장이 이사장을 맡고, 위원은 시장·군수·형무소장·경찰서 사찰계장이, 상임지도위원은 차석검사·경찰서 사찰계장·간사장이 맡았다. 아울러 지부장 서병균(혹은 서정균), 사무국장 김종규, 총무부 정인수, 보도부 김순정, 사업부 김종신, 선전부 최광림, 조직부 배린, 재정부 박양수 등 우익단체간부들이 선임됐다.

보도연맹의 일차적인 가입대상은 '좌익전향자'였으나, 정부가 의도했던만큼 조직 확대가 쉽지 않자 정부는 일선 읍·면·동 등 일선행정기관에 인원수를 할당했다. 경찰과 행정기관은 할당된 인원을 채우기 위해 주민을 상대로 비료와 밀가루 등 배급을 미끼로 가입을 유도했고, 보도연맹에 가입하지 않으면 빨갱이로 몰린다고 협박하기도 했다.

2001년 경남도민일보 강당에서 우리가 개최한 유족증언대회 모습입니다. 당시 대회에 나와 증언을 했던 분들은 대부분 진실규명 결정 대상에 포함되었습니다.


보도연맹 조직확대 과정의 무리함은 2001년 6월 14일 <경남도민일보>가 1949년부터 1950년 사이 경남·부산지역에서 발행된 신문의 보도 내용과 지역 내 중·고등학교의 학적부를 찾아내 '중·고등학교 학생들도 보도연맹에 가입시켰음을 확인'한 결과로도 알 수 있다.

<경남도민일보>에 따르면 '1949년 12월 28일자 <남조선민보>에 보도연맹 마산지부가 마산상고, 마산중, 마산여중 교감 이상과 연석회의를 개최하여 이들 3개교 학생 중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중퇴한 300여 명 전부를 보도연맹에 가맹시키기로 합의'했다고 한다. 이와 함께 <경남도민일보>는 마산여중 학적부를 확인한 결과 1948년 159명, 1949년 122명이 제적 또는 자퇴하였는데 이 중 적지않은 학생이 시국사건으로 구속되어 제적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음을 밝혔다.

◇사건 경위 = 마산·창원·진해 예비검속 대상자들은 한국전쟁 발발 후(1950년 6월 하순부터 8월 사이) 관할 지서의 소집통보를 받거나 경찰관에게 연행되어 희생되었는데, 각 지역별로 희생경위를 살펴보면 △마산시내 거주자와 창원군 진전·진북·진동면 거주자 중 일부는 1950년 7월 15일 마산 시민극장으로 소집·연행되어 마산형무소에 구금 중 마산 앞바다에서 희생되었고, △창원군 다른 면 거주자들은 관내 지서로 소집되거나 연행되었는데, 예를 들어 상남면 희생자들은 창원군 웅남면 아리송골에서, 대산면 희생자들은 김해시 진영읍 창고에 구금 중 김해시 생림면 나밭고개에서 희생되었으나 나머지 면 희생자들의 경우 정확한 희생경로와 장소가 알려지지 않았다.

한편 △진해경찰서로 소집·연행된 희생자들은 진해시 여좌동 가마니골과 내서면 진동고개에서 희생되었고, 나머지 사람들은 진해 앞바다 등지에서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희생자들의 소집·연행과정에서 경찰과 군의 지휘 하에 각 지역의 우익청년단, 민보단, 구장 등이 동원되었고, 이송은 주로 경찰과 헌병이 담당하였으며, 희생자 분류와 총살 집행은 CIC가 관장하였다.

◇희생자의 신원과 수 = 1960년 6월 5일 경남도지사실에서 열린 '국회 양민학살사건 조사특별위원회' 조사에 증인으로 출석한 희생자 유족 김용국은 어떤 근거인지는 밝히지 않았지만 마산지역 보도연맹사건 희생자가 1681명이라고 증언한 바 있다. 김용국이 마산피학살자유족회 간부였고 국회 조사에서 증언한 내용이므로 신빙성이 있어 보이지만 1681명이라는 주장에 대해서는 별다른 근거나 자료는 없어서 진실위가 이를 확인할 수는 없었다.

이번 진실위 조사에서 희생자로 성명이 밝혀진 사람은 대략 400여 명이지만, 형무소 재소자 사건에서 이미 규명된 40명을 제외하고,유족의 신청을 바탕으로 최종 결정된 진실규명 대상자 77명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마산매일신문이 1960년 7월 23일자로 보도한 마산지역 학살 희생자 명단입니다. 마산매일신문은 1960년 3·15마산의거 직후 주간지였던 '마산타임스'가 일간으로 전환하면서 조간과 석간 하루에 두 번 발행한 신문이었는데, 1961년 5·16쿠데타 이후 폐간되어 사라졌습니다. 이 기사 사본을 구한 것은 정말 기적같은 일이었습니다.


◇진실규명 대상자 명단(괄호 안은 당시 지명) = 차의수 김형찬 권태용 홍식조 강신구 허성 차해운 배선이(이상 마산시내) 권오철 심을섭 서재호 김한준 강신호 고유식 정성화 이양순 김천덕 김광수 이기운 이판대 김용구 이갑니(이상 진전면) 오재기 오덕환 오장세 오성환 오세태 오유환 최진호 김여태 김종명 이항재(이상 진북면) 추계출 임지훈(이상 진동면) 지흥수 송규섭(이상 내서면) 김용필 김주철 김덕규 민영희(이상 북면) 김흥수 김득록(이상 동면) 김훈배 안문호 안용택 우성덕 이효임 우임덕 최도이 조양래 정석윤(이상 상남면) 허원 박경만 윤재구 임재규 정현영 김종록 손갑수(이상 웅남면) 김천수 방영도 문일상 문을상 문정상 김정석 장재원 류학열 서차득 임원식(이상 대산면) 배소갑 김병문 김상복 구수조 여석재 이원철(이상 진해읍) 우인준(이상 웅동면) 이일갑(이상 웅천면) 김영호(이상 천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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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김주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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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실비단안개 2009.12.28 19:3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10년만의 결실이군요.
    수고하셨습니다.

    웅동 주민이 포함되었기에 놀랍고요.

  2. 보라매 2009.12.29 23:2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전에부터 여러모로 참 답답한 마음을 가졌던 역사중 하나였는데 큰일을 끄집어 내셨고 큰 결실을 얻었네요.
    애 쓰셨습니다.

  3. 꼬장선비 2010.01.19 17:1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기자님의 노력으로 가슴앓이만 하던 희생자 가족들이 말할 숨통이라도 틔인것 같아 천만다행입니다.

    대한민국국민의 한사람으로써 감사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