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50년전, 이땅의 모든 민중이 이승만의 자유당 독재에 신음하고 있을 때 이른바 사회 지도층이라는 사람들은 뭘 하고 있었나. 또 3·15의거 당시 모든 마산시민이 궐기했을 때 소위 지역유지와 지식인, 기업인들은 어떤 행동을 보였을까?

그들 지도층의 당시 행적을 찾기란 쉽지 않다. 왜냐면 5·16군사쿠데타 이후 재빨리 지역 기득권을 되찾은 그들이 스스로에게 부끄러운 기록들을 철저히 은폐해 왔기 때문이다.

어쩌다 그런 부분을 언급하는 경우가 있더라도 구체적으로 이름은 거론하지 않고 은근슬쩍 변죽만 울리다 넘어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광석씨(언론인·시인)가 쓴 '3·15정신과 마산문학'이라는 글은 김팔봉씨가 1960년 5월 <사상계>를 통해 발표한 '부정선거와 예술인의 지성'이라는 글을 인용하면서 은근히 당시 문인들의 자세를 이렇게 꼬집고 있다.

"(…)우선 4월혁명에 한국의 작가들은 어떻게 참여했는가의 물음이며, 둘째는 4월혁명이 문학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느냐는 문제인 것이다.(…) 김팔봉씨는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작금 1~2년 이래 더욱 이번 선거를 치르고 나서 내가 슬프게 생각하는 것은 문학하는 사람들의 정신이 문학 이하로 떨어지고 있다는 현상이다(…). 사회의 부정을 폭로하고, 현실의 모순을 고발하고, 어디까지나 정의와 자유와 인권을 부르짖으며 민중과 함께 노래해야 할 예술인들의 본연의 자세는 어떻게 되었는가? 41년전 우리가 독립만세를 절규할 때, 조선인한테는 감히 왜놈들이 집단적으로 사격을 못했던 총격을 대한민국 경찰관이 마산에서 강행해 가지고 젊은 학생들을 죽이기까지 한 이 나라의 현실에서 예술가니, 문학가니, 소설가니, 시인이니 하는 위인들이 민중의 마음을 등지고 그들을 배반하고 가는 곳은 어딘가.'

그나마 이러한 문인들의 자기 비판적 발언이나 폭력에의 간접적인 항거도 마산사태가 있고 난 다음부터의 자각증세였음을 환기하게 된다.(…)"

이광석씨는 그러나 팔봉이 직접 지적한 '민중을 배반한'그 문인들이 '가고파'의 주인공 이은상과 박종화·김말봉이었다는 사실은 끝내 밝히지 않는다.

▲ 50년 전 4월 11일 최루탄이 오른쪽 눈에 박힌 채 시체로 떠오른 김주열 열사.

기자 협박한 전직 언론인, 누굴까?

최루탄이 눈에 박힌 채 중앙부두에 떠오른 김주열군의 시체를 촬영, 세계적인 특종을 했던 당시 부산일보 허종 기자가 쓴 '내가 겪은 의거얘기'라는 글에서도 시민봉기를 공산주의자의 책동으로 조작하려 한 시의원과 자신을 협박한 언론계 출신의 자유당 간부를 모두 익명으로 처리하고 있다.

"한편 서울로부터는 국회 조사단이 오고 검찰에서는 유명한 한옥신 부장검사와 허형구 검사(전 법무장과)가 파견되어 마산데모를 객관적으로 조사하고 있었는데 가관스런 현상은 국회조사단에 대한 시의원의 엉터리 증언이었다. 당시의 시의원 김모씨는 마산데모를 적색분자의 책동으로 몰아부치려는 자유당에 편들어 신마산 뒷산에 봉화불이 올랐다고 터무니없는 허위증언을 하고 있었다. 지금 보건소 자리가 상공회의소 회의실에 돼 있을 때인데 나도 그 증언을 목격했었다.(…)

김주열군의 어머니가 아들의 책가방을 들고 마산시가지를 헤메고 있을 때 마산시청 뒤의 저수지에선 시체수색작업이 실시되었다.(…)시청 뒤 저수지에서 시체수색이 있은 다음날인 3월 하순의 어느날 이른 아침 채 잠도 깨기 전에 머리맡의 전화벨 소리가 요란했다. 수화기를 든 바 얼음장 같은 목소리가 귀창을 때렸다.

"허군인가?…내 김인데…."

"아니 선생은 어쩐 일이십니까?"

"…사람이란 신경이 날카로워지면 무슨 일을 저지를는지 모르는 법인데 내가 지금 몹시 신경이 날카롭네. 이 사람아 자네가 요새 좀 심하지 않나…." 찰그락 전화는 끊어졌다. 김모 선생이란 언론계 출신으로 내가 평소 존경하던 자유당 시당 간부였으며, 그분도 나를 아껴왔던 처지였다. 그러다가 3·15의거를 계기로 마치 압박자와 피압박자 같은 사이가 돼버렸다. 데모대는 기자가 나타나면 기고만장했다. 마치 보호자가 나타난 것 같았다. 그러나 자유당으로선 눈에 가시가 아닐 수 없었고, 더구나 김주열군의 시체찾기로 내가 좀 심하게 굴었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 형세 아래 기자를 협박한다고 무선 득을 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이만저만한 오산이 아닐 수 없었다.

전화기를 든 내 손이 떨릴 것 같은 분노를 느꼈다. 아니 몽둥이에 얻어맞기라도 한 것 같았다. '천하공당 자유당이 협박을 한다…, 내가 존경해온 분이지만 좋다. 해보자. 이젠 죽기 아니면 살기로구나…'싶어졌다.

얘기가 앞질러지지만 정권이 무너진 5월 어느날 그분은 중간에 사람을 넣어 나를 만나러 왔었다. 신마산의 콜럼비아 다방에 중재자의 뒤를 따라 나타난 김 선생은 냉정한 태도의 나더러 "허군 사람이 살다보면 별일이 다 있는 법인데 내가 지나쳤던 점 양해하고 마음을 풀게"하고 달랬다. 그러나 나의 입에서는 대답이 나오질 않았다. 처음 그분을 본 순간 섬뜩한 기분을 느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언론계 출신의 자유당 간부? 그리고 김씨? 웬만하면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인물이다. 그러나 허종씨가 직접 거명하지 않는 이상 실명을 밝히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어쨌든 그 김모씨는 단순히 자유당 간부직만 맡고 있었을 뿐 아니라 3·15시민의거가 한창 진행되고 있을 당시까지도 이를 진압하기 위해 기자에게 협박전화까지 했던 적극적인 민중의 배반자였던 것이다.

@사진 : 3.15의거기념사업회.


3·15부정선거 당시 자유당과 적극적으로 결탁, 불법 정치자금을 제공하고 특혜대출과 탈세를 일삼아온 사람들의 부정축재조사기록과 혁명재판기록을 살펴보는 것도 의미가 있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지금의 삼성·LG·현대 등 재벌기업 상당수가 이미 그때부터 자유당과 깊숙이 유착돼 있었다는 것이다.

◇부정선거원흉 자유당 기획위원사건 관련기업=대한양회(이정림)·태창방직(백남일)·조선방직(정재호)·럭키화학(구인회)·한국나이롱(이원천)·기아산업(이철호)·대한중기(김연규)·고려모직(한태일)·동신화학(현수덕)·삼성무역(이병철)·극동연료(이용범)·부산일보(김지태) 등.

◇탈세(특수조세사범)=삼성(이병철)·삼호(정재호)·대한(설경동)·개풍(이정림)·이양구(동양제과)·백남일(태창방직)·이용범(대동공업)·구인회(럭키화학)·최대섭(동화산업)·조성철(중앙산업)·정주영(현대건설)·조승구(삼우토건)·김용산(극동건설)·최재형(무학주정)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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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김주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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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실비단안개 2010.04.22 10:1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읽었습니다.
    정 때문에 - 아니면 명예훼손(명예도 갖지 못한 것들이 따지지만), 아니면 말 하지 않아도 다 아니까~

    6월 2일, 우리가 남이가~ 에 넘어가면 안되는데.

  2. 2010.06.26 01: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