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해 주장과 핏자국 감정 요구는 양립 가능하다

제가 알기로 진중권씨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김명호 교수와 박훈 변호사가 박홍우 부장판사 옷에 묻은 핏자국과 박홍우의 피가 같은지 여부를 감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박홍우가 자해를 했다고도 주장하는데 이것이야말로 언어도단이고 자가당착이다."

얼핏 들으면 그럴 듯합니다. 진중권씨 말대로 박홍우 판사가 자해를 했다면 자기 옷가지에 일부러 다른 피를 묻힐 까닭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재판 과정을 들여다보고 한 번만 더 생각해 보면 진중권씨 주장이 엉터리임을 바로 알 수 있습니다.

이렇습니다. 경찰과 검찰은 박홍우 판사 몸에 상처가 났다고 했습니다. 길이 2cm에 깊이 1.5cm입니다. 그런데 석궁을 쏘면 위력이 두께 2cm짜리 합판을 뚫고 15cm가 더 나갈 정도입니다. 그리고 불완전 장전 상태에서 석궁을 쏘면 발사가 되지 않고 흘러내린다는 증언(이것도 1심에서 나왔지 항소심에서는 다루지 않았습니다)도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발사된 화살에 맞았다면 치명상을 입었어야 하고 그렇지 않다면 화살로 말미암은 상처는 전혀 없었어야 맞습니다. 따라서, 경찰 수사에서부터 법원 재판에 이르기까지 박홍우 판사랑 석궁을 잡고 몸싸움을 벌였고 그 과정에서 화살이 발사됐는지는 몰라도 일부러 쏘지는 않았다고 한결같이 주장하는 피고인으로서는 의심이 갈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박홍우 판사랑 석궁을 붙잡고 몸싸움을 벌였다고 한결같이 주장하는 김명호 교수의 영화 속 모습.


먼저 박홍우 판사 몸에 실제로 상처가 나지 않았을 개연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경찰과 검찰 수사 기록에는 상처(박홍우 판사 몸에 났다는)를 찍은 사진조차 들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김명호 교수와 박훈 변호사로서는 박홍우 판사의 것이라는 옷가지에 묻은 피와 박홍우 판사의 피가 정말 같은지 확인해 보자고 요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개연성도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앞에 말씀드린 실험과 증언을 따르면 석궁에서 발사된 화살 때문에는 그런 조그만(길이 2cm, 깊이 1.5cm) 상처가 날 수 없는만큼, 박홍우 판사가 자해를 했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는 핏자국 유전자 검사만으로는 풀 수 없는 문제입니다.

물론 저도 개연성은 높지 않다고 보지만, 어쨌거나 사건이 일어난 다음 박홍우 판사는 자기 발로 걸어서 자기 집에 들어갔다가 10분쯤 있다가 나왔습니다. 이는 자해를 하려면 충분히 할 수 있는 시간은 됩니다. 하지만 대법원 판결문은 이와 다릅니다.

증인 진술과도 맞지 않는 대법원 판결문


대법원 판결문은 "(목격자들은) 피해자의 옷을 들추니까 시뻘겋게 피가 묻어 있어서 경찰과 소방서에 바로 신고했다는 것이고, 출동한 소방관의 진술에 의하면 배꼽 부위에 상처가 있었고 출혈로 인하여 속옷이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그 사이에 피고인 주장처럼 위 피해자가 스스로 자해를 할 시간이나 기회를 갖기는 불가능했을 것으로 보인다)."입니다.

대법원 판결문에 나오는 이런 정황은 항소심 법정에서 증언을 통해 나온 것이 아닙니다. 항소심에 나온 증인은 모두 일곱 명이라고 알고 있는데 이들은 이런 시뻘겋게 피가 묻은 정황을 진술하지 않았습니다. 도대체 무엇을 보고 이렇게 적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게다가 이와는 다른 진술이 있기까지 합니다. 2008년 2월 25일 항소심 6차 공판에서 현장에 출동했던 권영록 119 대원은 박훈 변호사가 "구급 활동 일지에 '피의자가 1~2m 전방에서 석궁으로 활을 쏘았다고 하며, 화살이 복부에 맞고 튕겨져 나갔다고 함'이라고 적혀 있는데 피해자 박홍우한테서 직접 들은 말인가요?"라고 물은 데 대해 "예."라고 대답했습니다.
 

증인 진술과 다른 판결을 내린 신태길 재판장의 영화 속 모습.


화살이 박홍우 판사 몸에 꽂히지 않았다는 얘기입니다. 그런데도 검찰은 반대 신문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항소심 재판부 신태길 재판장은 이에 대해 충분히 증거 조사를 하지 않은 채 엉터리 판결을 내렸고 대법원 판결문 또한 이에 대한 검토 없이 이렇게 적었습니다.

제발, 실사구시(實事求是) 좀 하시기를

진중권씨가 1월 29일 트위터에 올린 글을 봤습니다. 거두절미하고 말하자면 "부러진 화살이 실화냐 하는 논쟁은 일단락 된 것 같다."입니다. 말하자면 진중권씨는 줄곧 허구라고 주장해 왔는데 이것이 충분히 받아들여졌다는 뜻입니다.
 


저는 아니라고 봅니다. 물론 영화에 허구가 많이 들어 있습니다. 영화에서는 사실에 대해 선택과 집중을 할 수밖에 없는데, 이조차 허구라고 한다면 저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습니다. 다만 저는 영화 속 법정 장면은 100% 사실이라고 봅니다.

여기서 사실이라는 말은, 법정에서 실제로 있었던 행동과 발언이라는 뜻을 넘어섭니다. 피고인 김명호가 아무리 죽을 죄를 지었고 성격이 괴팍하다 해도 재판을 제대로 받을 권리는 있는데 그 권리가 철저하게 짓밟혔다는 측면에서 일관되게 취사선택한 사실들이라는 뜻까지 담겨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저는 진중권씨가 이어지는 트위트에서 "사법부에 대한 불신을 대변하기에 석궁 재판은 적절한 소재가 아니었"고 "영화에서 얻어진 사법 개혁의 정당성은 허구로 빚은 정당성에 불과"하며 "실제로 사법 폭력이 저질러진 사례들을 사용했어야 그 정당성이 현실성을 띠겠"다고 한 대목이 안타깝습니다.
 
재판을 재판장이 자기 마음대로 진행하고 피고인의 권리를 묵살하고 제대로 된 증거 조사 없이 판결을 내리는데 어떻게 사법 폭력이 아니라 할 수 있습니까? 석궁 사건과 석궁 재판은 구분해서 봐야 합니다. 석궁 사건은 진중권씨 말대로 사법부에 대한 불신을 대변하기에 적절한 소재가 아니지만 석궁 재판은 그런 불신을 대변하고도 남을만큼 적절한 소재입니다.

저는 진중권씨처럼 잘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도 1963년에 태어나 진중권씨와 같은 시대를 살아왔으며 진중권씨와 마찬가지로 이른바 운동판에서 한 번도 주류에 몸담지 않고(또는 못하고) 30년 가까이를 비주류로 살아왔습니다. 그런 면에서 여태껏 제게는 진중권씨가 나름대로 각별하게 여겨졌습니다.

저는 진중권씨가 지금껏 보수와 진보에서 모두 넘쳐나는 '조건 없는 제 편 감싸기'와 '자기가 좋아하는 존재에 대한 성찰 없는 열광'을 경계하고 비판해 온 데 대해 아주 훌륭하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번 부러진 화살을 두고 한 발언들도 그런 맥락에서 나왔다고 저는 알고 있습니다.

이를 소중히 여기면서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부러진 화살에 대해 실사구시를 해 보시지요. 그리고 제 글을 한 번이라도 읽어봐 주시기 바랍니다. 사실 제시에서든 논리 전개에서든 제 글이 틀렸다면 그에 걸맞게 근거를 대면서 짚어주시면 됩니다. 그렇지 않다면 부러진 화살이 허구라는 주장은 거둬 주시기 바랍니다.(이어집니다.)

김훤주
부러진화살
카테고리 정치/사회 > 법학
지은이 서형 (후마니타스,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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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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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우보정진 2012.02.06 19:5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읽었습니다.
    저는 그 영화 오늘 아침에야 보았습니다. 시골에 사니, 상당한 거리를 달려가서...... 참으로 좋은 영화, 재판의 문제를 적확하게 지적 묘사한 작품이었습니다. 여러번 울었습니다. 악법이든 선법이든 사법부에서부터 절차에서부터 제정된 그대로 지켜야 합니다. 1심에서부터... ! 판관들을 판결의 내용에 앞서 절차에서부터 겸손하고 철저하게 법대로 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법이 미덥고 통하는 안정된 나라가 됩니다.

    • Favicon of http://2kim.idomin.com 김훤주 2012.02.07 10:4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옳으신 말씀입니다. 절차나 과정에 잘못이 있는데 결과가 반듯하게 나올 리가 없습지요. 그것도 일부러 그리 했는데 더 말할 나위가 어디 있겠습니까?

  2. 우보정진 2012.02.06 20:0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글이나 드라마 영화의 힘은 그 미치는 영향력이 매우 넓고 큽니다. 요즈음 월 화요일 밤에 올라오는 빛과 그림자라는 드라마 1970년대의 정치 사회 문화상을 잘 그리고 있는 것 같고요. 그 대사들 중에는 가슴이 찡한 것들도 있더라고요. 부러진 화살...., 소재와 내용도 귀하지만 만듦도 탄탄해 보였습니다.

  3. 공감 2012.02.07 01:3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훤주님 글 자주 읽는데 훤주님 생각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진중권씨도 제가 좋아하지만 이번엔 진중권씨가 좀 경솔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 Favicon of http://2kim.idomin.com 김훤주 2012.02.07 10:4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라도 언제나 실수는 할 수 있는 노릇이겠지요. 그 실수를, 나중에 알고도 고치지 않는다면(또는 못한다면) 아무래도 군자는 못되고 소인배라 일컬어지겠지만 말씀입니다.

  4. cool 2012.02.08 11:1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피해자의 몸에 상처가 없을 개연성이 있다구요??
    하하.. 어처구니 없네요.
    피해자의 몸에 상처가 없을 개연성이 잇다고 치고, 법정에서 받아들이기는 힘들것같습니다.

    모든 폭행, 상해 사건에 필수적인 증거는.. [ 진단서 ]입니다.
    모든 살인사건의 필수적인 증거는 [사체]죠

    흉기는 없어도 유죄나지만.. 진단서나 사체없으며 아애 기소도 힘들어요.

    피해자의 상처에 대한 사진자료가 없다는걸 지적하시는데...
    [진단서]는.. 그 진단서를 출력한 의사에게 법적 책임이 있습니다.

    즉, [진단서]를 근거로 폭행시비를하고, 그걸 근거로 병역면제를 받기도하죠.
    특히 3주 이상의 진단서는 가해자가 법적 문제가 되는 시점이기때문에.. 2주 진단서까지는 잘 끊어줘도 3주 진단서는 함부로 못끊어줍니다.

    허리삐긋해도 2주 나오지만.. 3주는 쉽지 않다는거죠.
    검찰이 제시한 증거에..... 그 당시 병원으로 가서 [진단서]를 발급받은 그 진단서가 있을겁니다.


    이 상황에서 .... 법원이 상처 없을 가능성은 진단서로 끝난거죠.

    그 진단서가 조작되엇을 정황를 변호인 측에서 게지했다면 모르겟는데.... 변호인측에서도 그 지단서에 이의가 없었던것같은데.....


    법원에서 상처가 없을 가능성은 제외해야하지 않나요..


    • Favicon of http://2kim.idomin.com 김훤주 2012.02.08 11:3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당연히 개연성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석궁에 제대로 맞으면 바로 치명상을 입기 때문입니다.
      말씀하신 진단서는 이를테면 2차 증거입니다. 상처 그 자체를 보여주면 간단한데, 그렇게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진단서와 다른 정황이 3월 10일 공판에서 나왔는데, 법원은 이를 제대로 따지지도 않고 심리를 종결했습니다. 이런 잘못으로 재판은 '합리적 의심'을 전혀 풀지 못했습니다.

  5. cool 2012.02.08 11:2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법원 판단말고.. 우리가 쉽게 정황적으로도따져보죠.

    교수가 피해자의 집앞에서 기다리다가 덥치고..위에서 타고 피해자를 폭행하고 있는 현장을 경비와 몇명이 목격했죠.
    그리고, 피해자의 피가 묻어있는걸 그 당시 경비들이 목격했죠.

    그리고, 교수가 집에서 옷갈아입고, 119타고 가서 병원에서 [진단서]를 받앗죠.
    즉, 피해자는... 습격받을것을 미리 알지 못했어요.
    즉, 미리 계획을 세울수가 없었죠.
    피는 성인남자의 피로 밝혀졌죠.


    님 말대로.. [다른 사람의 피] [ 피해자 몸에는 상처없음]이 성립하려면
    그짮은 10분도 안돼는 상황에서 어디서 다른 [성인남자 피]를 구해와야한다는겁니다.


    피해자는 교수와 격투할때 이미 옷에서 피가 있었다고 증언이 되고있습니다.
    그 증언을 다 무시하고, 격투할때는 피가 없었고..
    나중에는 피가 있었다는 식의 엉터리 추론을 해보죠.

    그래도 마찬가지죠.. 피해자는 격투이후.. 자기 아파트동으로 올라가서 옷 갈아입고 나오는 10분여의 시간동안..

    어떻게 .. 다른 사람 남자의 피를 어디서 구햇을까요.
    이웃집에 벨 누르고 들어가서... 피좀 주세요.. 햇을까요???


    교수가... [ 피해자가 자해한거다]라고 주장한 이유도..사실 성인 남자의 피를 어디서 구해오기 힘들다는걸 알기때문이죠.


    최소한 피에 의문점을 가지긴 힘들어요..





    • Favicon of http://2kim.idomin.com 김훤주 2012.02.08 11:3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피 묻은 옷을 경찰이 거둬간 시점이 언제인지 생각해 보시지요. 바로 거둬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옷을 거둬간 경찰관이 누구인지조차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10분 안에 다른 남자의 피를 구했어야 한다는 얘기는 착각일 따름입니다.
      문제는, '합리적 의심'을 풀 수 있는 증거 신청과 감정 신청을 재판부가 죄다 기각했다는 데 있고, 이 때문에 피고인 김명호의 재판받을 권리가 침해됐다는 데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