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척 깁니다. 200자 원고지로 100장 넘는 분량입니다. 2013년 7월 31일 남해대학 평생교육원에서 아침 아홉시부터 정오까지, 세 시간 동안 했던 ‘경남 문화관광해설사 신규 양성 과정’ 강의 내용입니다.

 

어쩌다 보니 제게 맡겨진 강의였는데, 저는 이를 기회 삼아 그동안 ‘갱상도 문화공동체 해딴에’를 운영하면서 얻게 된 이런저런 경험과 생각을 한 번 정리해 봐야겠다고 마음먹었고, 그 결과로 이렇게 긴 글이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많은 이들에게 한 번 읽어보시라 권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요, 관심이 있으시거들랑 한 번 보시라 말씀밖에 드리지 못하겠습니다.

 

갱상도 문화공동체 해딴에는, 경남도민일보 자회사인데요 예비 사회적 기업이기도 합니다. 여행/체험, 스토리텔링 콘텐츠 개발 제작. 마을 만들기/도랑 살리기/볼런투어 같은 공익성 사회 이바지 활동, 탐방/체험 루트 개발 등을 합니다.

 

 

1. 생태계의 중심은 생명일까?

 

생태(계)를 상징하는 색은 초록입니다. 그런데 과연 초록이 생태계를 대표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다. ‘녹색 연합’이라는 생태환경 관련 운동단체도 있고 <녹색 평론>이라고 인간 중심 환경운동을 뛰어넘는 생태 보편의 값어치를 실현하자는 주장을 적극 펼치는 격월간지도 있습니다.

 

초록이 생태계의 상징색이라면 생태계의 모든 속성에서 초록을 찾아낼 수 있어야 할 텐데 과연 될까요? 초록으로 물든 풀이나 나무조차 얼마 안 가 시들어버립니다만, 그래도 풀이나 나무는 초록으로 인정하겠습니다.

 

아울러 풀이나 나무, 또는 그 열매를 먹고 사는 짐승(사람도 포함)도 초록 자체는 아니지만 초록의 연장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짐승을 먹고 사는 짐승도, 그 생명의 뿌리가 풀이나 나무에 있으니 초록의 2차 연장이 되겠습니다.

 

 

그렇지만 생태계 전체를 보면 전혀 아닙니다. 초록조차도 일시 현상일 뿐이고 그나마 일부에만 국한됩니다. 생태계가 인간이나 생명(=생물)으로만 구성되지는 않습니다. 생태계는 생물과 무생물, 생명과 비생명으로 이뤄지고 생물과 생명은 초록으로 수렴될 수 있지만 무생물 비생명은 아무래도 도저히 초록으로 수렴이 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생명이 으뜸 가치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생명체에게만 으뜸 가치일 뿐이지 비생명(=무생물)에게는 그렇게 적용할 수 없을 것입니다. 생명이 없다 해도 그것이 생명체를 위해 존재한다고 규정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누구나 무엇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그렇게 존재할 뿐이니까요. 햇빛 물 흙 공기 따위는 처음부터 비생명(무생물)이고 오히려 생명이 만들어지는 데 필수 바탕입니다. 비중이 생태계에서 절대 적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것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초록이라 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게다가 죽지 않는 생명(=생물)은 없습니다. 모든 생명(=생물)은 언젠가 때가 되면 죄다 무생물(=비생명)로 돌아갑니다. 비생명(=무생물)은 처음부터 비생명(=무생물)이고 생명(=생물)은 끊임없이 비생명(=무생물)의 영역으로 넘어갑니다.

 

 

그렇다면 생태계의 중심은 굳이 따지자면 비생명(=무생물)이 아니겠습니까? 생명과 생물은 유한하고 한 때뿐이지만, 무생물 비생명은 무한하고 영원합니다. 생물과 생명은 끊임없이 무생물(=비생명)이나 다른 생물(=생명)을 소비하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무생물(=비생명)은 그야말로 창조적이고 생산적이지 않습니까? 저 말없는 흙이 저기 흘러드는 물을 빨아들인 위에 따뜻한 햇볕이 내려쬐지 않으면 어떻게 생명과 생물이 태어나고 살 수 있겠습니까?

 

흙을 하나 보기로 들어보겠습니다. 흙이 없으면 물을 머금을 수 없어 나무나 풀이 자랄 수 없고 나무나 풀을 먹는 많은 동물들도 덩달아 살 수 없습니다. 바위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위가 없으면 흙이 있을 수 없습니다. 바위가 쪼개지고 닳아서 흙이 됩니다. 흙은 다시 압력을 받아 바위로 되기도 합니다.

 

농부 시인 서정홍이 펴낸 <농부시인의 행복론>에 나오는 글입니다. “흙 1cm가 쌓이는 데 넉넉잡아 400년이 걸리고, 콩알 반쪽밖에 안 되는 흙알갱이 속에도 눈에 안 보이는 미생물이 무려 2억 마리나 살고, 흙 한 줌 속에 살고 있는 생명이 지구에 사는 사람을 모두 합친 것보다 더 많답니다. 2천~3천년이 걸려야 바윗돌에서 겨우 10cm 만들어진다는 귀한 흙입니다. 자연이 만들어낸 최고 걸작이라 한다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환경(사람을 둘러싸고 있는 경계)을 버리고 생태(자연 그대로 있는 자연)를 맞이한 것처럼 초록과 생명 중심 관점을 버리고 비생명 무생물을 으뜸으로 여기는 인식의 전환을 이룩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생명과 생물이 의존적이고 지엽말단이라는 사실과, 반대로 무생물과 비생명이 독립적이고 근본적이라는 사실은 조금만 생각해 보면 바로 알 수 있습니다.

 

공기와 물과 햇볕과 흙은 사람 같은 생명체가 없어도 존재하는 존재입니다. 하지만 사람을 비롯한 갖은 생명은 공기와 물과 햇볕과 흙 같은 무생물이 없으면 존재하지 못하는 존재입니다. 사람 같은 생물들은 기대야만 존재할 수 있지만 무생물은 전혀 기대지 않아도 잘만 존재합니다.

 

무생물은 어머니 같은 존재입니다. 생물은 아기 같은 존재입니다. 어머니는 아기에게 기대지 않습니다. 아기는 어머니에게 기대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합니다. 하지만 무생물은 사실 어머니보다 더한 존재입니다. 어머니는 언젠가 세상을 떠나지만 공기와 물과 흙과 햇볕은 세상을 떠나지 않습니다.

 

 

지구로 구성원이 되어 들어와서는, 인간이 갖은 해코지를 해도, 적어도 지금까지는 떠나지 않고 있습니다. 이런 무생물이 바로 생명을 만들어주고 유지시켜 줍니다. 그러므로 창조적생산적이며 영원불멸한 무생물(=비생명)을 깨끗하게 지구의 중심 또는 원천으로 인정하는 바탕 위에서 이 비생명(=무생물)에 어떻게 하면 잘 빌붙어서 살아갈 수 있을까를 궁리해야 합당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런 사고에서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중심에 있는 인간이나 생명에게 도움이 되니까 그대로 유지 보호돼야 하고, 중심에 있는 인간이나 생명에게 도움이 되지 않으니까 그대로 유지 보호되지 않아도 되고…….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도움이 되는 쪽으로 변형 파괴돼야 한다.’

 

2. 습지는 과연 생명의 자궁이기만 할까?

 

습지를 일러 사람들은 이런저런 규정을 해왔습니다. 물론 20년 전 30년 전 습지를 아무 짝에도 쓸모없이 버려진 땅이라고 여겼던 데에 견주면 엄청나게 좋은 변화입니다. 하지만 아직은 모자랍니다. 단편적이고 일면적입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대부분 많은 책에서 이렇게 얘기하고 학교에서 이와 크게 다르지 않게 가르칩니다. 생명의 땅이다. 생명이 움트는 자궁이다. 생태계의 보고다. 생물다양성이 살아 있는 터전이다. 홍수와 가뭄을 조절하는 자연저수지다. 오염물질을 정화하는 터전이다. 사람을 끌어들이는 생태관광지다. 습지는 우리 인간의 삶터다.” 옳으신 말씀들입니다.

 

 

하지만 반대 측면도 있습니다. 생물과 무생물이 맞물려 있기 때문입니다. 무생물 덕분에 알아오던 생물도 죽으면 바로 그 순간 무생물이 됩니다. 이런 ‘좀 전만 해도 생물이던 무생물’은 바로 생물들에게 살아가는 영양분이 됩니다. 식물과 동물의 주검 위에 풀과 나무가 싹을 틔우고 뿌리를 내립니다.

 

맞물려 있음은 바로 돌고 돎이 됩니다. 생물이 무생물이 되고 무생물에서 다시 생명이 태어나는 순환입니다. 그러므로 습지는 ‘생명의 자궁’이기도 하고 ‘생명의 무덤’이기도 합니다. 인간의 삶터이기도 하고 죽음터이기도 합니다. ‘맞물림’과 ‘돌고돎’이 가장 잘 일어나는 데가 습지입니다.

 

습지는 축축하게 젖은 땅입니다. 물기가 있으니까 식물이 잘 자랍니다. 식물이 잘 자라니 식물에 기대어 살아가는 곤충이나 물고기 따위가 많이 생깁니다. 곤충이나 물고기 따위를 먹고사는 새라든지 수달도 당연히 생기고, 노루나 고라니 같이 습지랑 무관해 뵈는 것들도 물을 마신다든지 해서 들락거립니다.

 

옛날에는 사람도 습지 둘레에 주로 살았습니다. 습지가 소중한 진짜 까닭은 이처럼 생명의 태어남과 생명의 죽음이 함께 일어나는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습지가 ‘생명의 자궁’이기만 하거나 반대로 ‘생명의 무덤’이기만 하면 하나도 소중할 것이 없습니다.

 

 

생물과 무생물의 연관, 생물과 무생물의 순환이 끊어지지 않고 활발한 땅이라서 소중하다는 말씀입니다. 습지에서 활발하게 일어나는 생물과 무생물 사이 연관과 순환이 끊어지면 어떻게 될까요? 당연히 메마르게 됩니다.

 

한 번 태어난 생명체가 무생물로 돌아가지 못하고 그냥 사라진다면, 모든 생명들이 딛고 있는 땅이 메마르게 됩니다. 영양분도 공급받지 못합니다. 영양분은 식물·동물이 죽고 분해되는 과정에서 생겨납니다. 식물·동물이 썩어문드러지지 않으면, 물이 흐르고 공기가 통하고 해가 쨍쨍 내리쬐도 아무것도 태어나지 못합니다.

 

3. 낙동강 발원지가 강원도 황지 말고는 없을까?

 

낙동강은 발원지가 강원도 태백 황지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렇게 말하는 것으로는 모자라는 구석이 아주 많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낙동강에 흐르는 그 많은 물이 황지에서 흘러내린 그 물만이 아닌 만큼, 낙동강에 물을 보태는 줄기의 발원지를 모두 낙동강의 발원지로 여기자는 말씀입니다. 발원지는 ‘물줄기가 처음 시작한 곳’입니다.

 

 

황지는 낙동강의 유일한 발원지가 아니라 여러 발원지 가운데 낙동강과 바다가 맞닿는 끄트머리에서 가장 멀리 있을 따름입니다. 경북 경주 산내면 대현리 동쪽 골짜기 밀양강 물줄기 시작점도 낙동강의 발원지입니다.

 

그 밀양강으로 흘러드는 단장천의 발원지라 할 밀양 재약산 산들늪도 낙동강의 발원지입니다. 거창 궁항리 황강의 발원지도 낙동강의 발원지이고 함양군 서상면 남덕유산 남강의 발원지도 낙동강의 발원지입니다. 경북 포항 죽장면 가사리 남쪽 계곡 금호강 발원지도 낙동강의 발원지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모습대로 낙동강이 있도록 하는 물줄기가 황지에서 발원한 물줄기 하나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저마다 다른 데서 시작한 밀양강과 단장천과 황강과 남강과 금호강도 자기 물줄기를 낙동강에다 풀어넣습니다.

 

 

낙동강 종점에서 볼 때 멀고 가까운 차이가 있을 뿐 낙동강을 이루는 물줄기가 발원하는 곳이라는 점에서는 모두 같습니다. 이렇게 보면 낙동강이 훨씬 더 풍성해집니다. 예전에는 ‘낙동강’ 하면 태백 황지에서 부산 하단을 잇는, 남진하다가 꺾어져 동진하다 다시 남진하는 낙동강 본류만 머리에 떠올라 앙상했습니다.

 

하지만 낙동강 발원지가 낙동강에 물을 보태는 물줄기마다 하나씩 있다고 보면 그 앙상함이 풍성함으로 바뀝니다. 부산·경남과 대구·경북에다 강원도 남부 지역까지가 온통 낙동강으로 여겨집니다. 눈길이 가는 영역이 확대되는 것입니다.

 

황지가 여러 발원지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유일한’ 발원지로 생각하게 되면 낙동강 본류로 스며드는 숱한 하천과 개울을 낙동강과 동떨어진 무엇으로 여기게 됩니다. 황강 상류에 세워진 합천댐, 남강 상류에 들어선 남강댐, 금호강 상류의 영천댐, 밀양강의 밀양댐 등은 낙동강과 무관해집니다.

 

 

하지만 낙동강이 가난해진 까닭이 낙동강 본류에 들어선 임하댐과 안동댐에만 있지는 않습니다. 낙동강 강물이 더럽다면 그것은 황지에서 샘솟아 흘러나오면서 거치는 구비에서만이 아니라 낙동강과 합류하는 모든 하천이나 실개천이 들판과 마을과 공장을 흘러나오면서 더러워졌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4. 습지는 특별한 존재일까?

 

습지와 관련한 가장 힘있는 국제협약인 람사르협약은 습지를 ‘물이 6m 이하 깊이인 땅’이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다른 것은 아무 필요도 없습니다. 사람이 부러 만들었든 저절로 생겨났든 물이 흘러다니든 고여 있든 민물이든 짠물이든 일시적이든 항상적이든 넓든 좁든 다른 아무 구분이 없습니다.

 

습지는 무슨 특별한 존재가 아닙니다. 또 크고 아름다운 습지만 습지인 것 또한 아닙니다. 순천만 사천만 비토섬 갯벌 창포갯벌 우포늪(소벌) 따위만 습지가 아니고 앞에 말씀드린 ‘물이 6m 이하 깊이인 땅’은 모두 습지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둘레에 널려 있는 곳곳이 바로 습지입니다. 습지를 두고 별난 무엇이라고 여기는 그 순간 인간은 습지에서 멀어지고 맙니다. 이것은 바로 근본에서 멀어지는 것이기도 합니다. 또 이런 인식은 습지를 좀더 쉽게 망가뜨리게 합니다.

 

우포늪이나 순천만 같이 크고 아름답고 훌륭한 습지는 마땅히 보호해야 하지만 집 앞을 흐르는 도랑과 그 둘레는 돌보지 않아도 크게 탈날 일이 없다고 여기는 단초인 것입니다.

 

이는 마치, 죽을병만 치료하면 되고 잔병은 그대로 둬도 된다는 얘기와 같습니다. 염통에 걸린 병만 고치고 발가락 사이에 난 무좀은 고치지 않아도 된다는 얘기와 같습니다.

 

고향 시골에 가면 마을이 어떻게 만들어져 있는지요? 이른바 대부분 배산임수(背山臨水)를 하고 있습니다. 뒤로 산이 있고 앞으로 물이 있는 자리입니다. 아니면 앞에 너른 들이 있는데, 이는 예전에 습지였다가 사람이 개간을 하는 바람에 정식 농경지가 됐기 십상입니다.

 

그리고, 산이 있어야 물이 생겨 나옵니다. 이렇게 보면 우리 국토가 온통 습지입니다. 정지용 ‘향수(鄕愁)가 보여주는 풍경이 바로 습지 모습입니다. 습지에 기대어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이토록 습지는 우리 가까이에 있습니다. 이토록 우리 가까이에 있는 것이 바로 습지입니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비인 밭에 밤바람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베개를 돋다 고이시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 빛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러

풀섶 이슬에 함초롬 휘적시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전설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거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는 성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거리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5. 논도 당연히 습지다

 

2005년 11월 아프리카 우간다 캄팔라에서 열린 ‘제9차 람사르 협약 당사국 총회’는 뜻 깊은 회의였습니다. 일본 미야기(宮城)현 다지리(田尻)정 가부쿠리(蕪粟) 늪과 일대 무논이 ‘국제적으로 중요한’ 람사르 습지로 등록됐기 때문입니다.

 

자연습지가 아니고 인간이 개발해 농사를 짓기까지 하는 땅이 습지 목록에 오른 첫 사례였습니다. 가부쿠리늪 일대에는 무논이 21ha(7만평) 정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여기에 겨울철에도 물을 채워 놓는 등 500가구 가량이 유기농업을 하고 있습니다.

 

가부쿠리늪 일대 무논은 농약과 화학비료를 쓰지 않아 자원이 절약되며 생물다양성과 자연성도 회복됐습니다. 가을걷이를 한 다음 볏짚과 쌀겨를 뿌리고 물을 채우는 겨울철 무논 농법은 한 번 시작한 사람이라면 쉽게 그만두지 못할 정도로 효과를 인정받고 있다고도 합니다.

 

 

이를테면 실지렁이가 살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 실지렁이가 흙 속 유기물을 분해하면서 질소성분이 들어 있는 배설물을 쏟아내게 한다는 것입니다. 논은 인간이 간섭한다는 점만 빼면, 다른 습지와 다르지 않습니다. 야생 동물과 식물의 터전이며 물 속 유기물질을 없애는 정화도 합니다.

 

물을 가둬두는 저수지 구실과, 빗물을 땅 밑으로 스며들게 하는 통로 구실도 톡톡하게 하고 있습니다. 농촌진흥청 농업기술연구소 김동수 소장과 엄기철 토양수분 연구실장 등 연구진 5명이 공동 집필한 책 <논, 왜 지켜야 하는가>(1994년)는 논의 습지로서 가치를 돈으로 환산했습니다.

 

우리나라 논 134만5000ha의 홍수 때 저장능력은 36억t에 이릅니다. 다목적댐 건설비 t당 4315원을 곱하면 15조5000억 원이 됩니다. 다목적댐 홍수조절비용 t당 439.55원을 적용하면 1조5824억 원입니다. 여름철 논이나 벼를 통해 대기로 증발돼 나가는 물은 하루에 ha당 60t, 전체 8070만t으로 온도를 떨어뜨리는 효과도 냅니다. 에어컨으로 낮춘다면 물 1t당 원유 0.57kl, 전체는 4600만kl입니다.

 

토양 유실 방지 효과는 한 해 2596만t이라는데, 객토로 채우는 비용으로 2061억 원이며, 논이 보존하는 토양 유실량에 맞먹는 사방(沙防)댐을 만들려면 666억7042만원이 든다고 합니다. 정화 능력은, 관개수(灌漑水)의 10%(19억4000만t)가 오염됐다고 잡을 때 정화시설을 만들고 가동하는 비용 t당 3073원을 곱하면 5조9600억 원이랍니다.

 

벼의 이산화탄소 제거 효과는 한 해 4178억 원, 산소 공급 기능은 한 해 5조2795억 원입니다. 쌀 소출 한 해 소득 6조 원과 견줄 수 없을만치 많으며, 지하수 함양(해마다 157억5000만t)까지 합하면 엄청나다는 것입니다.

 

 

경남 지역에서 논농사는 늦어도 무문토기시대 초기(3000년 전)에는 시작됐습니다. 밀양시 산외면 금천리(琴川里) 일대에 유적이 있습니다. 밀양강과 단장천 합류 지점 가까이에 있습니다. 물이 오랜 세월 동안 흙과 모래 따위를 갖다 쌓은 충적지입니다.

 

보(洑)와 봇도랑, 무논(水畓) 같은 농경유적과, 돌로 둘러싸고 불을 땐 터와 마을 집터 같은 생활 자취들이 함께 타나났습니다. 마을 집터와 생활유적은 자연제방 높은 자리에, 바로 밑에 밭터가, 이어서 논터가, 배후습지는 논터보다 더 뒤에 있었습니다. 보와 봇도랑은 배후습지와 논을 이어서 필요한 물을 대거나 빼는 데 쓰였습니다.

 

이런 배치는 2005년 5월 성과가 나온 마산시 진동면 청동기유적에서도 되풀이 볼 수 있었습니다. 남강댐 수몰지구 진주 대평리와 울산 무거동·야음동 등에서도 신석기시대 논농사 유적이 발견됐는데, 모두 개석곡(開析谷) 아랫도리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개석곡은 준평원·선상지·삼각주 따위로 일정하게 솟아오른 지형을, 다시 물줄기가 흘러가면서 깎아내려 평평해진 땅을 이르는데, 논이 만들어지기 전에는 자연습지였습니다. 보와 봇도랑은 산비탈 끄트머리 부분을 따라서 길게 들어서 있답니다.

 

 

옛날 사람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먹고 살기 위해, 자연을 입맛에 맞게 ‘개발’해 왔음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3000년 전 즈음에 이미 논농사가 있었으며, 그것도 초보적이거나 원시적이지 않고 지금과 마찬가지로, 논으로서 기능을 죄 갖춘 완성된 형태였습니다.

 

람사르협약에 따르면 물에 잠겨 있는 6미터 이하 땅도 죄다 습지고요, 한 해 한 번이라도 물에 잠기는 땅까지도 모조리 습지로 봅니다. 그러니까, 논은 우리가 그렇게 인식하기 전부터 습지였는데, 사람들이 늘 곁에 가까이 두고 보는 대상이다 보니까 그에 걸맞은 관심이나 보호노력을 오히려 받지 못했다고 보는 편이 더 맞을 것 같습니다.

 

생명 다양성이라는 면에서도 논은 습지와 똑같습니다. 보통 논에는 벼만 사는 줄 아는데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농약이 못 살게 만들었을 뿐입니다. 개구리밥 같은 물풀은 물론이고 논고둥 미꾸라지 뱀 개구리 지렁이 따위가 아주 많고요 이들을 먹이로 삼는 갖가지 새들도 논과 둘레를 어슬렁거립니다. 

 

6. 인간은 습지와 교섭하지 않으면 살 수 없다

 

옛적 사람으로 보자면 습지는 먹을거리가 풍부하고 물길을 통해 옮겨 다니기 좋으니까 교통도 편리하고 사나운 짐승들이 사는 산보다 안전한 터전이었습니다. 갖은 퇴적물로 땅이 기름지기까지 하니 나중에 농사를 짓게 되면서는 더욱 습지랑 친하고 가까워졌습니다.

 

 

습지와 인간이 교섭, 그러니까 사귀고(交) 겪고(涉) 했습니다. 원래 자연은 보호 대상이 아니고 교섭 대상입니다. 자연을 보호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교섭하지 않아서 문제가 일어납니다. 습지란 그 자체로 고립돼 존재하지 않고 사람에게 아주 소중한 보금자리이며 사람살이의 자취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입니다.

 

이런 사실을 우리는 8000년 전 창녕 비봉리 신석기 시대 저습지 유적에서도 확인할 수 있고 3000년 전 밀양 금천리 신석기 시대 논 유적에서도 확인할 수 있고 2000년 전 창원 주남저수지 저습지인 다호리 철기 유적에서도 확인할 수 있고 지금 말밤 따고 논고둥 잡고 거룻배 타고 그물 거두는 창녕 소벌(우포늪)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습지랑 인간의 교섭 역사를 보려면, 경남에서는 낙동강을 중심으로 상하좌우를 묶어야 합니다. 주남저수지는 낙동강 서쪽에 있는데, 동쪽 맞은편은 신석기 시대 유적이 발견된 창녕 비봉리입니다. 주남은 그 자체가 다호리 철기시대 유적지이기도 하고요, 주남 남쪽 아래 김해에는 요즘 새롭게 알려지는 화포습지가 있습니다.

 

 

주남에서 남동쪽으로 낙동강을 가로지르면 또 오래된 인공 저수지인 수산제가 있습니다. 수산제 일대는 아주 옛날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줄곧 개간이 행해졌다 해도 무방합니다. 낙동강이 이렇게 일대를 하나로 묶었고 그래서 낙동강 공동체라 할만한 역사와 문화가 곳곳에 박혀 있습니다.

 

결국 사람까지 포함해 자연 만물이 하나로 이어져 있다는 말씀입니다. 원래 이어져 있던 것들이 뚝 떨어져 나오게 되면 바로 문제가 생깁니다. 단절 또는 차단이 모든 문제의 근원입니다. 습지와 함께 하던 인간이 언젠가부터 경계를 만들어 물과 뭍의 교섭을 막고 물을 빼낸 땅에 물을 채우는 대신 다른 것들을 들이세우면서 습지가 사라졌습니다.

 

습지와 교섭하기를 멈춘 습지의 인간들은 당연히 자연과 대립하게 됐습니다. 습지를 찾지 못하는 물은 인간이 사는 자리를 덮치기 십상이었고 이를 막기 위해 인간은 더욱 높게 제방을 쌓습니다. 그러면 자연은 다시 갖은 모레와 자갈 따위를 퇴적시키고 강바닥을 높여 제방을 넘거나 터뜨립니다. 자연과 교섭하기를 멈추면 이처럼 피곤해집니다.

 

7. 습지에는 인간의 역사와 문화가 있다

 

낙동강은 단순한 물줄기가 아닙니다. ‘단순한 물줄기’로 여기는 본보기로 ‘낙동강은 식수원’이라는 관점을 들 수 있습니다. ‘1000만 영남권 주민의 젖줄’이라고도 합니다. ‘식수’를 만들려면 낙동강 ‘원수(原水)’를 퍼내 찌꺼기를 거르고 미생물을 비롯한 생명체까지 제거합니다.

 

 

낙동강을 물로만 여기는 것입니다. 우리 인식 속 낙동강입니다. 지금 저기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낙동강은 당연히 물줄기 이상입니다. 갖은 생명이 태어나 살고 죽어가는 공간이며 사람들이 노동을 바치면서 먹을거리 등등 먹고 살 바탕을 마련하는 터전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에게 아름다움과 평안함을 느끼게 하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낙동강과 낙동강으로 스며드는 많은 물줄기들은 경남 일대 곳곳에 습지를 남겼습니다. 물은 늘지도 줄지도 않으면서 끊임없이 순환하면서 중요한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그 순환 과정에서 습지가 중요한 ‘고리’ 구실을 합니다. 여기에 우리 인간이 터 잡고 살아왔습니다.

 

그 조각들을 땅이름에서 한 번 찾아봤습니다. 창녕 부곡 학포의 토종 이름은 ‘새개’인데 들머리 청도천과 낙동강이 마주치는 어귀에 황새 등 새가 많이 날아와서 붙은 이름입니다. 부곡에는 수다(水多)리도 있는데 말 그대로 물이 많은 동네라고 합니다.

 

이어지는 밀양시 무안면 인교리도 다리 교(橋)를 쓰는 데서 짐작되듯 이전에는 돛단배가 드나들 정도로 습지와 관련이 깊고 인교에서 고개 하나 넘으면 나오는 범평리는 이름에 아예 돛(帆)이 들어가 있습니다.

 

무안면도 찬찬히 따져보면 재미가 있을 것 같습니다. 원래는 수안(水安)이라 했는데, 여기서 ‘수’는 뜻을 땄고 ‘안’은 소리를 땄다는, 호수처럼 물이 괴어 있는 안쪽이란 뜻이 됩니다. ‘물안’이라 하다가 ‘ㄹ’이 탈락됐다는 것인데, 사명대사가 힘을 써서 안전한 피난처가 되었다고 해서 무안(務安)이라 한다는 설과 맞서고 있습니다.

 

 

우포(牛浦)늪 소벌의 스토리텔링이 있습니다. 소벌은 나무갯벌과 쪽지벌 사이에서 불쑥 물 쪽으로 들어온 땅 모양이 소대가리 같다 해서 붙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저도 그렇게만 알고 있었습니다. 소목(牛項)도 있는데 소 목덜미에 해당됩니다. 대가리를 박고 물 마시는 소 모양인 셈입니다.

 

사람들은 뜻도 모른 채 한자 소리대로 ‘우포’라 할 뿐이니 딱합니다. 어떤 시인은 여기 와서 시를 썼는데 이 우항을 우황이라 적는 남우세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대동여지도>와 <대동지지>에는 우포가 누포(漏浦)라 적혀 있습니다. 우포의 옛 이름인 셈입니다. 샐 루 개 포를 쓰니 동쪽을 가리키는 우리말 ‘살’ ‘사라’를 품은 이름입니다. 샐개, 곧 낙동강 동쪽에 있는 벌이라는 얘기입니다.

 

우포 또한 누포와 다를 바 없습니다. 동풍을 샛바람이라 일컫는 것처럼, 동쪽을 가리키는 ‘쇠’ ‘소’ ‘새’를 한자로 표기한 것입니다. 그러다가 세월이 흘러 우포의 ‘우(牛)’가 동쪽으로부터 멀어지면서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은 스토리텔링이 진행돼 ‘소 대가리 모양’ 운운이 나왔습니다.

 

 

소벌 가까운 창녕 대지면에 소맥산(小麥山)이라는 야트막한 야산이 하나 있는데 이를 우리말로 읽으면 소보리산=소벌산이 됩니다.

 

창녕 부곡 노리 북쪽 임해진(臨海津)도 눈길을 끕니다. 바닷물이 예까지 올라왔다는 이름으로 50년대에는 5일장이 설 정도로 번창했고 노리로 이어지는 열두 굽이 절벽은 더없이 아름다운 절경이었다 합니다. 임해진 북쪽 남지서는 지금도 바닷물고기 웅어가 잡히니 틀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소벌이 있는 유어면은 옛날 유장면과 어촌면 둘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늘 논다 유장(遊長)도 별나지만, 육지 한가운데 고기잡이마을 어촌(漁村)이 있다니 흥미롭습니다. 일제 때인 1914년 둘이 합쳐지면서 놀면서(遊) 고기잡는(漁) 유어면이 됐습니다.

 

또 낙동강 따라 널려 있는 세진 송진 반포 본포 등에서 진(津)과 포(浦)가 나옵니다. 진은 여객운송업만 주로 이뤄진 작은 나루고 포는 여객운송업에 더해 화물운송업까지 행해진 커다란 나루였다는 식으로 구분하면 다 맞답니다.

 

 

이렇게 인간이 습지랑 교섭하는 바람에 창녕에서 대지국민학교를 다녔던 성기각 시인이 ‘토평천’이라는 시를 지을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토평천(土坪川)이지만 옛적에는 물슬천(勿瑟川)이었습니다. 낙동강 동쪽에 있어서 붙은 이름으로 보입니다. 물(勿)은 통일신라시대 이두로 물을 적을 때 그리 썼고, 슬(瑟)은 동쪽을 나타내는 한자 소리입니다.

 

 

화왕산 정기 받아 넓은 들 안고

굽이쳐 흘러가는 맑은 토평천

토끼풀 가는 모가지에 꽃을 맺는 냇가에 서면

대지초등학교 나갈 종소리 낭랑하게 퍼져오고

여름 내내 우리는

선생님 몰래 멱을 감았다

돌틈 사이로 메기 잡는

병우가 냇물 깊은 곳으로 자맥질하면

꼭순이는

검정고무신 넘치도록 피라미를 잡았다

말매미 울어쌌는 버드나무

마파람은 여지없이 거미줄에 걸리고

오후 수업 시작종은 사분의 삼박자로 이어졌다

종소리에 놀라 우리는 제각기

물에 젖은 깜장빤쓰를 입고

발목 붙잡는 고들빼기 농로를 지나

물새궁둥이를 흔들며 교실로 달려갔다.

 

 

8. 습지에는 역사와 문화의 자취가 남아 있다

 

창녕 부곡 비봉리 44번지 신석기시대 습지 유적은 100평 정도뿐이지만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 됐고 역사적 의미도 가장 크다고 합니다. 이 습지 유적을 통해 인간이 습지와 어떻게 관계하고 교섭하면서 살아왔는지 원형을 한 번 더듬어볼 수 있습니다.

 

 

이 유적 옆에 2층 건물이 있는데 양·배수 펌프장입니다. 2003년 태풍 ‘매미’ 때 일대가 물에 잠기는 바람에 펌프 용량을 키우는 확장 공사를 하게 됐습니다. 이 때 유수지(遊水池)를 파다가 조개층 따위가 드러나면서 발굴이 시작됐습니다.

 

발굴은 2004년 11월부터 이듬해 8월까지 김해국립박물관이 진행했습니다. 8000년 전 통나무 속을 파서 만든 소나무 쪽배(원래 길이 3m 남짓), 사람 것으로 보이는 똥 화석(糞石), 짠 망태기, 멧돼지가 그려진 토기, 조개더미가 발견됐습니다. 모두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 된 것들이었습니다.

 

도토리와 가래(가래나무 열매), 솔방울, 조 같은 먹을거리도 나왔습니다. 목탄(木炭)과 나무칼, 돌화살촉, 그물추도 있었으며 재첩과 굴과 고막의 껍데기는 물론 잉어 이빨과 사슴·멧돼지·개의 뼈, 상어 척추와 가오리 꼬리뼈도 함께 띄었습니다. 도토리 저장 구덩이들도 확인이 됐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맷돌 구실을 하는 갈돌과 갈판도 함께 나왔습니다.

 

뒤쪽으로는 해발 401m 짜리 월봉산이 가파르게 자리잡고 있습니다. 가래가 열리는 가래나무와 솔방울이 맺히는 소나무, 도토리가 열리는 참나무 따위가 무성하게 자랐고 사슴이나 멧돼지 같은 짐승도 살았을 것입니다.

 

왼쪽에는 북에서 남으로 흘러 낙동강 본류와 직각에 가깝게 만나는 청도천이, 유적 근방에서 갑자기 넓어집니다. 편평한 저습지였을 것입니다.

 

도토리 저장 구덩이 행렬은 당시 해안선이었습니다. 떫은 맛(타닌 성분)을 우려내는 데는 민물보다 짠물이 낫습니다. 이런 사실을 신석기 사람들이 알고 바닷물 드나드는 데다 구덩이를 파고 도토리를 담았습니다.

 

 

비봉리 일대는 동해안 석호(潟湖) 같은 모양이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낙동강과 청도천이 만나는 지점에 서에서 동으로 모래톱 따위가 만들어져 있었고 안쪽은 호수 같은 상태였을 것입니다. 종합하면 전형적인 습지대였습니다.

 

바다가 강을 만나는 하구, 사람을 비롯한 갖은 생명이 어우러지는 터전이었던 셈입니다. 전형적인 습지대였음은 재첩이나 고막, 잉어 같은 유물로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잉어는 바닥이 진흙이고 흐름이 느린 데 주로 사는 민물고기입니다. 재첩과 고막은 짠물과 민물이 섞이는 ‘기수역’에 많습니다.

 

조개더미는 비봉리 사람들이 눌러 살았다(定着)는 증거입니다. 떠돌이라면 먹고 버린 조개껍데기가 쌓일 리가 없습니다. 배를 타고 석호 안쪽을 돌아다니거나 때로는 고기잡이를 위해 바다에도 나갔습니다. 이는 상어나 가오리 뼈가 입증합니다. 상어나 가오리가 석호 안에는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신석기시대에 비봉리 일대에만 사람이 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조건이 비슷한 여러 곳에 살았습니다. 도토리 저장 구덩이는 8000년 전 이곳까지 바닷물이 들어왔음을 입증합니다. 비봉리 상류는 민물이고 하류는 바닷물입니다. 유적이 발굴된 지대 높이가 해발(海拔) 0m 안팎입니다.

 

낙동강은 기울기가 완만해 창녕 남지의 수면이 지금도 해발 1∼2m밖에 안 됩니다. 흐름이 완만하다 보니 일대에는 비봉리 말고도 곳곳에 바다를 낀 습지가 있었습니다. 비봉리가 있는 청도천 일대와 맞은편 창원시 동읍 주남저수지, 야산 너머 동쪽에 있는 밀양시 하남읍 수산들판과 동남쪽의 김해 한림면 화포천이 흐르는 한림·시산 들판이 모두 그랬다는 것입니다.

 

 

이는 지금 지도에서 인공제방을 지우면 그대로 확인이 되는 사실입니다. 창원 동읍과 대산면 주남저수지 일대는 비봉리와 같은 배후습지였고 주남의 주천강은 비봉리의 청도천과 마찬가지로 배후습지와 바다 사이에 물이 드나들게 하는 구실을 했습니다.

 

강물은 서로를 잇는 통로이고 습지는 먹을거리 등을 제공하는 영역이었습니다. 강줄기가 영역을 가르는 경계선 구실을 하는 시기는 훨씬 이후입니다. 당시는 바다·강과 습지를 중심에 놓고 여러 군데 흩어져 사는 동일 문화권으로 봐야 합니다.

 

비봉리와 성격이 비슷한 유적이 낙동강을 한가운데 두고 빙 둘러서 있는 것입니다. 비봉리에서 동쪽으로 산 하나 넘으면 나오는 밀양 하남 들판 한가운데는 백산(栢山)이라는 야트막한 야산이 있습니다. 주민들은 ‘흰산’이라 하는데 조개더미가 하얗게 쌓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창원 동읍에도 합산패총이 있습니다. 비봉리 사람들과 비슷하게 산 사람들의 자취입니다. 주남저수지 들머리 다호리 고분군과 거기서 출토된 철기·청동기도 습지 유적입니다. 높은 생산성과 편리한 교통을 갖춘 습지가 아니면 사람들이 살지 않았을 것입니다.

 

 

주남저수지 가까운 창원 동읍 다호리 고분군은 1988년 국립중앙박물관이 발굴했습니다. 기원 전후 무덤과 널과 청동기·철기·목기, 그리고 붓과 지우개칼과 노끈 같은 생활용품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오수전(五銖錢)과 판상 철부(板狀 鐵斧·납작 도끼), 그리고 붓이 눈길을 끕니다.

 

오수전은 중국 한나라 때 동전으로 전한(前漢)과 후한 사이 잠깐 있었던 신나라 왕망도 만들었습니다. 만든 시기가 뚜렷하기 때문에 청동기·철기 유적에서 연대 측정에 쓸모가 있습니다. 오수전의 발견으로 다호리 사람들이 중국까지 교역했음이 확인됐습니다.

 

판상 철부는 실제 도끼 구실도 했지만 철정(鐵錠·덩이쇠)처럼 철기 제작을 위한 중간 가공 소재 겸 화폐 노릇도 했다고 합니다. 낙동강 일대에서 가장 일찍 철기문화를 이룩한 집단이 이 습지 유적의 주인입니다.

 

습지의 높은 생산성과 편리한 교통이 이들로 하여금 앞서가는 문화를 이루게 했습니다. 앞서가는 문화였음은 붓과 지우개칼에서도 짐작이 됩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앞선 시기에 발견된, 문자 관련 유적이기 때문입니다. 문자 생활을 가장 먼저 누렸던 집단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천은 경남에서 갯벌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고장입니다. 사천만에는 옛적 조창(漕倉)이 여럿 있었습니다. 동쪽인 용현면 선진리와 사남면 유천리 조동마을에 통양창과 유천창이 있었고 서쪽 축동면 구호리에는 장암창, 같은 면 가산리에는 가산창이 있었습니다.

 

고려·조선 시대에 조세로 거둔 곡식을 모아 두고 옮겨가기 위해 강가나 바닷가에다 조정에서 지어놓은 곳집인 조창이 이렇게 많았지만 지금은 사천이 항구 기능을 못하고 있습니다. 남강댐에서 가화천을 타고 내려온 방류수 탓입니다. 

 

가화천은 남강댐과 이어져 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정부가 진주시 내동면 유수리 일대 낙남정맥을 가르고 물길을 내어 가화천을 남강댐으로 이어 버렸습니다. 사천만 바깥 지점으로 흘러나가는 가화천을 타고 방류수가 들어오면서 사천만 바닷물은 흐름이 크게 느려졌습니다.

 

사천만 안쪽 사천강과 길호강 등을 통해 북에서 내려오는 물이 이 방류수 때문에 갇히고 말았습니다. 결국 물살에 실려온 퇴적물은 바깥바다로 빠져나가지 못하고 사천만 바닥으로 가라앉아 버립니다. 당연히 바닥이 높아지면서 항구 기능을 잃게 돼 버린 것입니다.

 

 

사천에는 갯벌 관련 문화유적이 많습니다. 사천만은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의 거북선이 처음 투입된 승전지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선진리성 어귀 ‘조명군총’은 정유재란 때인 1598년 10월 이곳에서 조명연합군이 패전했음을 일러주는 자리입니다.

 

가산리 돌장승과 가산오광대 놀이도 있고 대방진 굴항도 있습니다. 퇴계 이황이 스승 어득강과 노닌 작도의 정사도 있고 남명 조식이 놀던 쾌재정도 있고 민중들이 미륵 염원을 모아 묻은 자취인 매향비도 있습니다.

 

이들 자리를 이렇듯 훑어보면 옛날 갯벌이 지금보다 훨씬 넓었음도 절로 알 수 있습니다. 사천 갯벌 관련 유적에서 으뜸은 마땅히 ‘매향비’입니다. 고려 우왕 13(1387)년에 민중들이 미륵부처 오시기를 기원하며 향을 묻고 세운 빗돌입니다.

 

사천만에서 묵곡천을 따라 4km 가량 들어가 농지 가장자리에 있습니다. 지금은 논이지만 당시는 갯벌이었습니다. 620년 전 이들은 갈대 우거진 갯가에 모여 태평세상을 꿈꿨습니다. 빗돌에는 임금의 만수무강과 국태민안을 빌었다고도 돼 있지만, 사실 그것은 겉으로 내세운 핑계일 뿐이고 매향 행사는 사실 지배층에 대한 일반 민중들의 위력시위 성격이 더욱 컸으리라 저는 짐작합니다.

 

귀족과 토호와 왜구에게 겹겹이 시달리던 민중은 미륵의 하생(下生)을 바랐습니다. 첫머리는 “많은 사람이 계를 모으고 미륵불 오시기를 바라며 향을 묻는다(千人結契埋香願王)”고 적었습니다. 끝에는 “모두 4100”(計四千一百)이라 적혀 있습니다.

 

 

<세종실록> 지리지를 보면, 1442년 사천 인구가 1817명이었고 남해군과 사천시 곤양·곤명면을 아우르는 곤남군은 1419년에 1300명이었습니다. 매향에 참여한 사람이 이 두 군현 인구보다 많았습니다. 아마 당시 토호들은 이 규모에 기겁을 했지 싶습니다.

 

다음으로는 작도정사(鵲島精舍)가 있습니다. 서포면 외구리입니다. 옛적에는 섬이었고 이름은 작도입니다. 우리말로는 까치섬입니다. 작도정사를 둘러싸고 있는 뭍은 그러니까 일제 말기인 1938년에 일본 사람 야마다(山田)가 매립해 만들었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작도정사는 퇴계 이황(1501∼70)이 곤양군수로 있던 스승 관포 어득강(1470∼1550)을 1533년에 찾아와 함께 ‘잔질’한 자리입니다.

 

“곤양에서 어 관포를 모시고 까치섬에 노닐며 조석(潮汐)을 논했다. 까치섬은 곤양군의 남쪽 십리 즈음에 있다. 섬 양쪽에 산이 문처럼 마주서 있고 밀물이 여기를 들어와 섬을 감싸고 8~9리를 돌면 바다가 되고 밀물이 빠져나가면 뭍이 된다. 때가 되기를 기다려 고기잡이들이 그물로 막는다.

 

(어득강) 선생은 사인(舍人) 정세호와 생원(生員) 이령과 생원 강공저 그리고 황(滉)과 더불어 배를 타고 상류·중류에서 그물을 치고 있는 여기에 이르렀다. 배에서 내려 고기잡이가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는 모습과 큰 물고기가 뛰어오르는 장면을 보고 아주 즐거워했다.

 

밀물이 빠질 때가 돼서 다들 배를 버리고 까치섬에 올랐다. 오후가 지나 배가 떠 있던 데를 돌아보니 평지가 되어 까마득하고 그물에 가리어 은은하다. 밀물 썰물의 이치를 논하면서 회를 치고 술을 잔질하다 드디어 날이 저물고서야 마쳤다.

 

까치섬은 마치 손바닥처럼 평평하고 멀리 마주보이는 금오산은 높다. 아침이 다하도록 깊이는 헤아리지 못하고 예로부터 근본을 따지기는 어렵다. 숨 쉬는 땅은 입이 되고 오고가는 산은 문을 지었다.” 

 

거기 빗돌 글귀입니다. 그림 같은 풍경과 당대 사람들의 안목이 함께 들어옵니다.

 

 

9. 남명 조식의 두류산 유람도 습지에서 시작했다

 

퇴계와 더불어 이름을 떨친 선비 남명 조식(1501∼72)은 이 사천 갯가 쾌재정에서 쌍계사가 있는 하동 화개까지 배를 타고 올랐습니다. 지리산 유람의 첫발을 습지에서 내디딘 셈입니다.

 

남명은 1558년 음력 4월 지리산을 둘러보고 ‘유두류록(遊頭流錄)’을 남겼습니다. 도서출판 돌베개에서 펴낸 <선인들의 지리산 유람록>에 우리말 번역이 들어 있습니다.

 

남명은 음력 4월 11일 합천 삼가에 있던 집 계부당(鷄伏堂)을 떠나 진주 자형 집에서 묵었습니다. 사흘 동안 잘 놀고 난 다음 남명은 15일 일행과 함께 쾌재정을 찾아왔습니다. 진주목사 김홍과 자형 이인숙과 고령현감을 지낸 이희안과 청주목사를 지낸 이정이 일행이었습니다.

 

 

“잠시 후 사천군수 노극수가 고을의 수령 자격으로 찾아와 조촐한 술자리를 베풀어주었다. 모두 큰 배에 오르자 사천군수 노군은 술과 안주와 음식을 실어준 뒤 배에서 내려 돌아갔다.” “기생 열 명이 피리·생황·북·나발 등의 악기를 모두 벌여놓았”다는 구절도 나옵니다.

 

이런 대접을 받으며 남명 일행은 이틀 동안 배를 타고 곤양·하동·악양을 거쳐 화개에 이른 다음 아전들이 모시는 가운데 쌍계사로 들어갔습니다. 쌍계사에서 남명 일행은 17일 아침 “호남 유생 김득리·허계·조수기·최연 등이 먼저 이 절에 와 있어서 이들을 법당으로 청하여 술을 한 차례 돌리고 풍악을 울렸”습니다.

 

19일 드디어 지리산 오르기를 시작했습니다. “아침을 재촉하여 먹고 청학동으로 들어가려 하였는데, 이인숙과 이강이는 병을 핑계로 동행하지 않았다. …… 김경이 병 때문에 우리와 동행하는 것을 사양하고 기생 귀천을 데리고 급히 떠났다. …… 호남에서 온 (유생) 네 사람과 백유량·이씨 두 유생이 동행하였다. 북쪽으로 오암을 오르는데, 나무를 잡고 잔도를 타면서 나아갔다”고 합니다.

 

 

그리고 “원우석은 허리에 찬 북을 치고, 천수는 긴 피리를 불고, 두 기생이 그 뒤를 따르면서 선두 대열을 이루었다. 나머지 여러 사람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물고기를 꼬챙이에 꿴 것처럼 줄지어 앞으로 전진하면서 중간 대열을 이루었다. 강국년(음식과 놀이를 맡은 진주 아전)과 요리사와 음식을 운반하는 종 등 수십 인이 후미 대열을 이루었다. 승려 신욱이 앞에서 길을 안내하며 갔다.” 어떠신지요?

 

10. 놀이는 진리에 이르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6월 13일과 14일 이틀 동안 창녕 부곡 온천 로얄관광호텔에서 ‘제2차 논습지 생물다양성 증진을 위한 한·일 자치단체 네트워크-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생명의 숨결을 찾아서’라는 행사가 열렸습니다.

 

이튿날 여기 참여해 소중한 경험을 했는데요, 경상남도람사르환경재단에 마련한 이 행사에서 ‘논 교육’에 대해 발표한 슈사쿠 미나토라는 일본 선생님이 매우 재미있었습니다.

 

미나토 선생.

 

일본을 대표하는 논 교육자라고 할 수 있는데요, 1981년부터 어린이들에게 30년 넘게 논과 환경보전을 교육해 왔고, 2011년부터는 간사이대학교에서 환경교육을 하고 있다는 분이었습니다.

 

논을 두고 미나토 선생은 자연환경과 문화환경과 사회환경과 경제의 총합이라 했습니다. 이 네 가지가 모두 논에 들어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달리 말하자면 논을 제대로 공부하면 한 나라의 자연과 문화와 사회와 경제를 모두 알 수 있다는 얘기였습니다.

 

하지만 결국은 제대로 놀아야 한다는 얘기였습니다. 논에서 마주할 수 있는 갖가지 것들을 갖고 그렇게 놀아야 논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체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논이 얼마나 줄어들었고 그 때문에 황새나 따오기 같은 것들이 살기 어려워졌고 그런 얘기는 곁가지였습니다.

 

풀잎으로 배 만들어 띄우기 놀이를 한 뒤.

 

미나토 선생은 놀이 속에서 논의 값어치가 얼마나 되는지를 깨달을 수 있으면 된다는 생각이었겠습니다. 그이에게 논은 사람을 기르는 장소이면서 다른 생명도 함께 키우는 공간이었습니다. 벼 문화를 키워온 장소이면서 우리 모든 생명에게 소중한 물을 머금어 주는 습지이기도 했습니다. 자연과 농업과 경제와 인간 생존이 지속 가능해지도록 하는 공간이 됩니다.

 

이어서 가까이 있는 논으로 옮겨가서 현장 활동도 했는데요,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이 논과 논 주위 생명체가 무려 5668가지나 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미나토 선생이 30년 동안 조사 연구한 결과였습니다.

 

그러므로 논 체험은 바로 그렇게 무수히 많은 생명에 대한 체험이 되겠습니다. 그렇게 많은 생명들이 만들어놓은 갖은 현상을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느끼는 것이니까요. 그리고 가장 중심은 놀라움과 기쁨이었습니다.

 

논에서 나는 소리에 귀기울이고 있는 미나토 선생.

 

미나토 선생은 일단 논에 가서 밭두렁에 앉아 3분만 들여다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 많은 생물들이 요렇게 조그만 데서 꼼지락거릴 수 있는지 감탄이 절로 난다고 했습니다. 거울을 갖고 우리가 눈으로 보는 그 뒷면을 보는 것도 해 보라고 했습니다.

 

이파리 냄새를 맡고 그 주인 되는 풀을 찾아오는 놀이도 했습니다. 그밖에 풀잎으로 배를 만들어 봇도랑에 띄우거나 표적을 만들어 세워놓고 풀을 뽑아 던져 맞히는 등등 다른 많은 놀이도 소개해 줬습니다. 고무줄로 먹이사슬 나타내기, 풀잎을 따서 투명 비닐에 넣어 비춰보며 차이점 공통점 찾기, 논가에서 사물들 그려보고 그 소감 말하기 따위입니다.

 

말하자면, 논에서 나는 모든 것을 갖고 그냥 즐겁게 놀자는 것이었습니다. 진리는 숫자나 문장에 있지 않다는 얘기였습니다. 진리는 오로지 자기 몸에 새겨져야 진짜 진리가 되는데, 그렇게 하는 가장 훌륭한 수단이 놀이라는 얘기였습니다.

 

이렇게 놀이를 하는 과정에서, 미나토 선생은 오감으로 느끼고 표현하는 감성만 풍부해지는 것이 아니라, 현상에 대한 지식이나 자연에 대한 인식 그러니까 사람들이 보통 과학이라고 하는 영역도 풍부해진다고 했습니다. 오히려 그렇게 함으로써 그런 지식이 책 속 활자가 아니라 생활 속 경험으로 이어지다 보니까 더욱 구체적으로 남는다고도 했습니다.

 

 

이런 놀이를 생태 관광 해설에서도 받아들이면 좋겠습니다. 그 까닭은 이 날 미나토 선생과 함께 놀이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제공해 줬습니다.

 

그이들은 대부분 논이나 습지에 대해 공부를 많이 한 이른바 ‘전문가’ 또는 ‘활동가’였는데요, 논이나 습지로 조사를 나가서 기록하고 관찰하고 분석하고 했지만 이렇게 생생하게 머리와 가슴에 결과와 과정이 남은 적은 한 차례도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이들 스스로도 놀라워하면서 말입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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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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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songbohyun.tistory.com 송보현 2014.01.29 14:3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