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방 루트

 

모산재 영암사지→14.4km 괴정 쉼터(삼가면 두모리)→2.5km 삼가장터(기양루·삼가장터 3.1만세운동기념탑·삼가향교)→9km 걸어서 2시간 남명조식선비길(둑길)→바로 옆 조식생가터→18.6km 의령 충익사→19.7km 곽재우 생가→3.1km 안희제 생가→15.1km 보덕각·쌍절각→21.3km 망우정

 

영암사지 명물 석등을 지켜낸 동네 사람들

 

합천 영암사지(陜川 靈岩寺址:사적 제131호)는 황매산 남쪽 기슭에 있는 절터랍니다. 절터 앞에 서면 우선 모산재에서 뿜어내는 기상에 압도됩니다. 망한 절터에서 뿜어져나오는 을씨년스러운 기운 따위는 없습니다. 대신에 씩씩함이 느껴진답니다.

 

쌍사자석등(보물 제353호)과 삼층석탑(보물 제480호) 그리고 귀부(보물 제489호)는 절터에서 나온 건물 받침돌, 갖가지 기와조각들과 어우러져 서 있습니다.

 

 

쌍사자 석등에 얽힌 마을 사람들의 충정은 유명합니다. 1933년 전후 일본인이 가져가려는 것을 마을 사람들이 막아 가회면사무소에 보관해 놓았다가 1959년 절터에 암자를 세우고 원래 자리로 옮겨왔습니다.

 

 

석등 화사석 네 면에는 사천왕상(四天王像)이 새겨져 있는데요 아시는대로 사천왕은 불법을 지키는 신이지요. 그러니 이 석등을 지키려는 마을 사람들의 의로움이 예사로 여겨지지 않는답니다.

 

9세기에 만들어졌다고 여겨지는데, 쌍사자 엉덩이의 토실토실하고 부드러운 실감은 어떻게 정확하게 표현할 말을 찾기가 어려울 정도랍니다.

 

 

영암사가 언제 지어졌는지 일러주는 기록은 아직 전혀 없다고 합니다. 다만 서울대학교 도서관의 적연국사자광탑비(寂然國師慈光塔碑)에 고려 현종 5년(1014)에 적연이 여기서 83세에 입적했다고 나옴에 따라 그 이전에는 세워져 있었으리라 짐작이 됩니다.

 

건물터는 여느 다른 절간과 다른 특징이 많다고 합니다. 금당을 올려 앉힌 축대의 가운데가 튀어나와 있고요, 그 좌우에 가파른 돌계단이 있는 점, 금당터 연석에 얼굴이 새겨져 있고 앞면과 좌우 세 면에 동물상이 돋을새김으로 들어앉아 있는 점 등이 그렇답니다.

 

 

금당 축대 사자 조각.

 

또 최근 이어진 발굴에서는 회랑(回廊) 자리까지 나와 여기 절터가 예전에는 아주 대단했음을 알 수 있게 합니다.(회랑이 있으면 비나 눈이 와도 젖지 않고 다닐 수 있습니다. 왕립 절간인 경주 불국사에 바로 그런 회랑이 있습지요.)

 

영암사지 삼층석탑은 쌍사자 석등의 남다름에 밀려 조금은 소박해 보입니다. 통일신라의 석탑 양식을 잘 이어받았으나, 기둥 표현이 약하고 지붕돌 받침수가 줄어들어 있어 조금은 약해 보입니다.

 

영암사지 삼층석탑.

 

위쪽 따로 하나 더 있는 금당터를 중심으로 동쪽과 서쪽에 자리잡은 영암사지 귀부들은 아주 잘 생겼습니다. 전체 모습은 거북이지만 머리는 용입니다. 새겨진 것들이 정교하면서도 강한 생동감이 느껴지는데 두 거북을 비교하면서 보는 재미도 있습니다. 하나는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있어 씩씩해 보이고요, 다른 하나는 고개를 숙인 듯해서 다소곳해 보입니다.

 

 

삼가장터를 빛나게 하는 의로움의 실천

 

삼가장터는 여느 장터와 마찬가지로 규모가 예전만 못하답니다. 삼가는 한우가 유명한데 장날이 아니어도 한우 요리를 맛볼 수 있는 식당들이 들어서 있습니다. 삼가장터 한 모퉁이에 삼가장터3.1만세운동기념탑이 있습니다.

 

꼭대기에는 선열들 만세 시위를 형상화한 모습이 양쪽으로 새겨졌는데, 하늘을 나는 모습과 기상이 매우 힘차면서도 정갈합니다. 앞면에 새긴 그림은 아름답고 뒷면에 쓰인 글씨는 씩씩합니다. 한 쪽 구석에는 100년 전 의병 활동을 벌인 이들을 기리는 빗돌도 놓여 있습니다.

 

 

 

1919년 삼가 장날인 음력 2월 17일(3월 18일)과 2월 22일(3월 23일) 두 차례 일어난 이 거사에는 삼가·쌍백·가회면 주민 등 무려 3만에 이르는 사람들이 가담했습니다. 삼가처럼 작은 지역에서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여 만세를 불렀다는 사실이 쉽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대단한 규모랍니다.

 

일제의 진압은 잔인했습니다. 40명 남짓이 목숨을 잃었고 150명 정도가 크고작게 다쳤으며 50명 가량이 감옥으로 끌려갔다고 합니다. 게다가 그에 앞서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의병전쟁이 벌어졌을 때도 여기 지역민들은 떨쳐 일어났다고 합니다.

 

이런 기개의 배경에는 바로 같은 삼가 출신인 남명 조식(1501~1572) 있다고 지역 사람들은 봅니다. 350년 가량 세월이 흘렀어도 그이의 정신적 영향력은 사라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지금도 길가다 여기 어르신 붙잡고 여쭈면 남명 선생 얘기는 술술 나옵니다.

 

삼가장터 둘레에는 삼가장터3.1만세운동기념탑 말고 삼가 기양루(三嘉 岐陽樓: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93호)와 삼가향교(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29호)도 있습니다.

 

기양루.

 

기양루는 옛날 고을 수령들의 연회장으로 쓰였던 건물이라 합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동쪽에 남아 있는 동헌터와 관련지어 볼 때는 삼가현 관아의 문루로도 짐작이 되는데요 어쨌거나 합천에서는 가장 오래된 누각이라 합니다.

 

삼가를 휘감으며 흐르는 양천 건너에는 우람한 삼가향교가 언덕배기 높은 데 있습니다. 향교가 있다 해서 마을 이름도 교동(校洞)이 됐습니다. 풍속을 교화한다는 유교 특유 계몽주의가 담긴 현판 풍화루(風化樓)가 걸린 대문은 올려다보면 주눅이 들 정도로 대단합니다.

 

삼가향교 정문격인 풍화루.

 

안에 있는 명륜당 건물 축대는 보통과 달리 화강암이 아니고 지역에서 많이 나는 검고 푸른 퇴적암을 얇게 겹쳐 쌓아 눈길을 끈답니다.

 

경(敬)·의(義)를 후대까지 전한 남명 조식

 

남명 조식 생가로 이어지는 선비길과 이순신 장군의 백의종군로가 겹쳐지는 두모 마을에는 커다란 나무가 하나 있고 그 아래 정자가 하나 자리잡고 있습니다. 괴정(槐亭) 쉼터라 하는데 백의(白衣)를 입은 이순신이 권율이 있는 합천 초계 율곡 도원수부로 가던 길에 하룻밤을 묵은 자리랍니다.

 

양천 둑길 따라 이어지는 남명 조식 선비길.

 

괴정 쉼터.

 

이순신이 종들에게 마을 사람들 쌀로 밥을 짓지 말라고 일렀는데도 종들이 지키지 않자 매질하고 쌀을 갚아 주는 일이 있었던 곳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바로 그 이순신이라면, 당연히 그렇게 하고도 남음이 있지 않았겠느냐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남명조식선생생가지(南冥曺植先生生家址:경상남도 기념물 제148호)는 합천군 삼가면 외토리에 있습니다. 남명은 30대 후반에 이미 ‘(경상)좌도에 퇴계 이황이 있다면 우도에는 남명이 있다’는 찬탄을 받았다고 합니다. 남명은 경(敬)과 의(義)를 으뜸으로 쳤습니다. 모든 사람과 세상 만물을 공손하게 대하고 세상살이에서 의로움을 실천하자는 정신이었습니다.

 

남명 생가터.

 

퇴계와 남명은 둘 다 벼슬살이를 하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퇴계는 임금의 부름을 뿌리치지 못해 벼슬을 했고요 남명은 한 번도 그 부름을 받아들이지 않아 처사(處士)로 남았습니다.

 

복원되고 있는 남명 조식 생가.

 

대신 그이는 한편으로는 학문을 닦고 다른 한편으로는 제자를 길렀습니다. 그이가 이렇게 제자를 길러내 않았다면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는 정말 큰 일 날 뻔했지요.

 

임진왜란 육전과 해전을 통틀어 첫 번째 승리를 기록한 의병장 곽재우가 바로 남명의 문하생이었고 합천을 지켰던 의병장 정인홍도 남명의 제자였습니다.

 

곧게 살다 간 남명의 이런 영향은 시대를 뛰어넘어 근대로까지 이어졌습니다. 앞서 살펴봤듯 그이가 태어난 삼가에서는 을미의병도 많이 나왔고 일제강점기 3.1만세운동에서도 다른 데와는 크게 달랐답니다.

 

이어지는 뇌룡정(雷龍亭: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29호)은 1549년 남명이 지은 정자입니다. <장자>에 나오는 ‘연묵이뢰성 시거이용현(淵默而雷聲 尸居而龍見: 연못 같이 묵묵히 있다가도 때가 되면 우뢰 소리를 내고, 주검처럼 가만히 있다가도 때가 되면 용처럼 나타난다’에서 따왔다고 합니다.(지금은 용암서원 앞으로 옮겨져 있습니다.)

 

 

 

안으로 들어가면 같은 글귀가 양쪽에 나란히 붙어 있습니다.  시도 때도 없이 종알거리지도 말고 언제나처럼 입을 닫고 있지도 말라, 시도 때도 없이 촐랑대지도 말고 언제나처럼 가만 있지도 말라, 이런 뜻이지 싶습니다. 과연 제대로 된 선비라면 그래야 마땅하겠지요.

 

 

 

 

뇌룡정 바로 옆 용암서원은 남명의 학문과 사상을 따르고 기리기 위해 제사를 지내는 곳입니다. 앞에는 남명 흉상과 을묘사직소를 새긴 커다란 돌덩이가 나란히 놓여 있습니다. 단성소라고도 하는 이 상소문은 명종 임금이 1555년 내린 단성현감 자리를 받지 않고 오히려 임금을 호되게 나무란, 경과 의에 입각한 꼿꼿함이 그대로 표현된 명문으로 이름이 높습니다.

 

 

생가는 1970년대 새마을 사업으로 사라졌다는데 한동안 내팽개쳐져 있다가 발굴을 거쳐 2012년 11월 현재 복원 공사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의로움을 몸소 실천한 의병장 곽재우

 

의령 충익사는 임진왜란 당시 처음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지킨 망우당 곽재우(1552~1617) 홍의장군과 17장령을 비롯해 무명 의병들의 위패를 모신 사당입니다. 곽재우 유물 일괄(郭再祐 遺物 一括:보물 제671호) 여섯이 여기 있는데요 잘 보존된 장검을 비롯해 말갖춤(마구), 포도 모양 벼루, 사자철인, 화초문백자팔각대접 등이 그것이랍니다.

 

충익사. 콘크리트 건물입니다.

 

앞에 있는 의령 중동리 충의각(宜寧 中東里 忠義閣: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522호)은 어느 한 곳도 쇠못을 치지 않은 우리나라 전통 목조 건물이라 합니다. 옆에는 곽재우장군 유적 정화 기념비도 있습니다.

 

많이 무거워 보입니다.

 

충익사라는 딱딱한 이름 그리고 20세기 말기를 대표하는 콘크리트 건물과는 달리 여기 정원은 아주 아름답게 잘 가꿔져 있습니다. 키가 8.5m에 가슴높이 둘레가 3m에 이르는 모과나무(경상남도 기념물 제83호)도 있습니다.

 

 

지금은 여기 서 있지만 원래는 수성이라는 마을을 지키던 당산나무였답니다. 줄기가 근육처럼 울퉁불퉁하게 골이 패여 있는데요, 오래된 모과나무에서 볼 수 있는 긴 세월을 견디어낸 연륜이겠지요.

 

유곡면 세간리 곽재우 생가터 앞은 늦은 가을이면 온통 노란 물감을 풀어놓은 듯합니다. 어린 시절 장군이 놀면서 호연지기를 기르고 학문을 연마했다는 600년 된 은행나무(천연기념물 302)가 한 눈 가득 들어옵니다.

 

곽재우 생가.

 

곽재우 생가 안채.

 

마을을 지켜주는 당산나무로, 해마다 음력 정월초열흘에 여기다가 금줄을 치고 ‘목신제(木神祭)’를 지내면서 풍년과 안녕을 빌었는데 제사 비용은 여기 은행 열매를 팔아 마련했다니 나무가 얼마나 큰지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짐작이 되고도 남습니다.

 

곽재우 생가에서 바라본 세간리 은행나무.

 

나무 바로 옆에 곽재우 장군 생가가 있습니다. 여기서 곽재우는 난리가 터졌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재산을 털어 의병을 일으킵니다. 마을 입구 현고수(懸鼓樹: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97호)는 북을 매단 나무라는 뜻으로 곽재우 장군이 의병을 모으고 훈련을 할 때 그렇게 했습니다.

 

세간리 은행나무와 곽재우 생가.

 

왼쪽 앞에 놓인 평상이 그럴 듯합니다.

 

세간리 은행나무 금줄.

 

그러니 현고수 앞은 임진왜란 당시 우리나라 최초 의병이 떨쳐일어났던 역사적인 장소랍니다. 의령군이 해마다 열고 있는 의병제전 성화는 여기에서 불씨를 받아 나간답니다.

 

 

 

세간리 마을 정자에 있는 북.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곽재우는 9일 뒤인 4월 22일 의병을 일으켜 펼쳐 불패 신화를 이룩한 바다의 이순신에 버금가는 승리를 그 해 5월과 6월 의령에 있는 강줄기에서 유격전과 심리전으로 일궈냈습니다. 관군이 아닌 의병이라 활과 창·칼, 농기구가 전부였을 텐데도 왜군에 맞서 승전함으로써 조선 민·관·군의 사기를 크게 높였습니다.

 

백산 안희제(1885∼1943) 선생은 일제강점기 국권회복을 위해 정신적·경제적 자강(自强)과 교육과 민족기업 발전에 힘쓴 독립운동가랍니다. 일제 자본에 맞서고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부산에서 백산상회를 운영했습니다.

 

안희제 생가. 사랑채는 초가 지붕이고 안채는 기와지붕입니다.

 

발해에 건너가 농장을 경영하고 학교를 운영하는 등 독립운동에 힘쓰다 몸을 다쳐 귀국한 1942년 일제에 붙잡힙니다. 혹독한 고문을 받은 끝에 보석으로 풀려나왔지만 그로 말미암아 이듬해 숨지고 말았습니다.

 

의령 부림면 입산 마을에 있는 백산 안희제 생가(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93호)는 권위와 꾸밈이 없어 소박합니다. 안채와 사랑채 둘로 돼 있는데 사랑채는 초가지붕을 이었습니다.

 

보덕각·망우정에서 한 번 더 확인하는 의로움의 길

 

쌍절각(雙節閣)은 임진왜란 때 경남 합천 초계 마진 전투에서 왜군과 싸우다 숨진 손인갑 장군과 아들 손약해를 기리기 위해 1609년 의령군 봉수면 신현리에 세운 것인데 1943년 여기로 옮겼습니다.

 

 

보덕각(報德閣)은 곽재우 장군의 전공을 기리기 위해 임진왜란 의병의 첫 전투지이자 승전지인 여기에 1739년 세웠는데요, 당시 영의정 채재공이 몸소 비문을 썼다고 합니다.

 

보덕각.

 

보덕각에 있는 보덕불망비. 대명조선홍의장군충익공곽선생보덕불망비라고 적혀 있습니다.

 

합천에서 의령으로 이어지는 여정에서는 앎에서 끝내지 말고 몸소 실천해야 함을 힘주어 말했던 남명의 정신이 그의 제자 곽재우로 실현된 자취들을 곳곳에서 만날 수가 있답니다.

 

보덕비각이 있는 기강(岐江:거름강)나루는 낙동강과 남강이 만나는 자리입니다. 곽재우는 1592년 5월 4일과 6일 갈대밭에 군사를 숨겨두고 강물 아래에 나무 말뚝을 박아둔 다음 왜군 배가 꼼짝 못하게 해놓고 화살을 쏘아 무찔렀습니다.

 

그리고 6월 의령 정암진에서 이뤄진 두 번째 승전은 강을 걸어서 잘 건널 수 있도록 왜군이 꽂아놓았던 표지를 뻘밭 쪽으로 옮겨놓음으로써 승전의 기초를 닦았습니다.

 

뒷면. '박정희 대통령 각하 분부로 의령군수 아무개가 했답니다 글쎄.' 보덕각과 쌍절각을 알리는 빗돌 앞면.

 

마지막 걸음은 창녕군 도천면 우강리 망우정입니다. 망우정은 곽재우가 말년을 보낸 곳이랍니다. 그이는 전라도 영암으로 귀양갔다가 돌아온 다음 1602년부터 망우정에 머물렀다고 합니다. 선조와 광해군의 요구로 잠깐잠깐 벼슬살이를 한 때는 빼고 하나같이 여기 머물렀습니다.

 

 

망우정 뒤편에서 바라보는 낙동강.

 

왜 그랬을까요? 아마 제대로 죽기 위해서라고 짐작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전공이 높은 사람인데도 모함을 받아 죽임을 당하는 등 세상이 어지러우니 벼슬을 하면 오히려 명줄만 줄인다고 봤을 것입니다.

 

곽재우는 또 의병을 일으키느라 재산을 써버리고 패랭이를 만들어 팔아 입에 풀칠을 했다고도 합니다. 말년에는 곡기를 끊고 신선처럼 살기도 했다는데, 어쩌면 그이의 이런 선택이 최선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남명 문하에서 동문수학하고 의병도 마찬가지로 일으켰던 바로 옆 합천의 정인홍은 광해군 조정에도 남아 영의정까지 지냈지만 결국 제 명에 죽지는 못했습니다.

 

 

망우정은 강가 언덕배기에 숨은 듯 앉아 있습니다. 망우정에 서면 활처럼 휘어진 강폭을 따라 굽이치는 낙동강이 한 눈에 들어옵니다. 뒤에는 1789년 세운 충익공망우선생유허비(忠翼公忘憂郭先生遺墟碑: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3호)와 1991년에 세운 또다른 유허비가 나란히 서 있습니다.

 

김훤주

 

※ 2012년 출판된 문화재청 비매품 단행본 <이야기가 있는 문화유산 여행길 경상권>에 실은 글을 조금 다듬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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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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