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제대학교 이영식 교수가 2009년 3월 펴낸 <이야기로 떠나는 가야 역사 여행>을 보면 84쪽과 85쪽에 시루 이야기가 나옵니다. 먼저 말해두자면 이 책은 옛적 가야 사람들의 삶을 잘 그려놓고 있어서 저는 읽으면서 ‘아 그렇구나’, ‘아 그랬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인 적이 한두 차례가 아니었습니다.

 

스크루를 전기 따위 동력으로 움직여 배를 나아가게 하는 지금은 물이 깊고 밀물과 썰물 차이가 적은 데가 좋은 항구지만 그렇지 않았던 옛날에는 갯벌이 발달하고 밀물과 썰물 차이가 큰 데가 좋은 항구였다는 지적(41쪽)이라든지,

 

경북 고령 대가야의 건국신화에 나오는 대가야왕(형) 뇌질주일(腦窒朱日)과 금관국왕(동생) 뇌질청예(腦窒靑裔)를 제각각 ‘붉은 해’와 ‘새파란 후예’라고 단박에 정리해 버리는 장면(152쪽)에서는 더욱 그랬습니다.

 

국립김해박물관에서 볼 수 있는 가야시대 여러 토기들.

 

말하자면 가야 역사는 물론 옛날 사람들의 일상을 재구성해보는 데에 많은 영감을 주는 저작이었던 셈입니다. 이런 가운데에 앞서 말한 시루 이야기를 읽었으니 저로서는 그런 서술이 잘못됐으리라고는 그야말로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현재 김해시청의 자리와 그 주변은 가야의 부뚜막이 설치된 여러 채의 집자리가 발견된 부원동 유적입니다. …… 토기의 바닥에 원형(圓形)이나 장방형 구멍이 뚫린 시루도 있었습니다.

 

사루는 증기로 곡물을 찌는 질그릇입니다만, 출토된 토기에서 시루가 차지하는 비중이 그리 높지 않은 것으로 보아, 밥 같은 주식보다는 떡처럼 특별한 음식을 만드는 데 가끔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설이나 추석 때 부뚜막에 솥을 걸고 물을 끓여 시루에 떡을 찌던 가야인의 모습을 그려보면 좋을 것입니다.”

 

여기서 핵심은 “밥 같은 주식보다는 떡처럼 특별한 음식을 만드는 데 가끔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입니다.

 

그러다 2011년 황교익이라는 맛칼럼니스트가 쓴 <한국음식문화박물지>를 봤습니다. 마산 출신이지요. 여기서 황교익은 떡과 밥을 두고 이렇게 얘기합니다.

 

국립김해박물관에 있는 집 모양 토기.

 

“찹쌀은 시루에 쪄서 떡판에 올린 후 떡메로 쳐서 떡을 만든다. 쫄깃한 식감이 있어 찰떡이라 한다. 맵쌀은 물에 불려서 가루를 낸 후 찌는 것이 일반적이다. 쌀가루에 쪄낸 상태의 것을 시루떡이라 하고 이를 다시 치대어 길쭉하게 뽑은 것을 가래떡이라 한다.

 

우리 민족은 오랜 세월 동안 떡을 먹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가면 삼국시대 유물 중 유독 많은 것이 시루임을 확인할 수 있다. 곡물을 가루 내거나 그 알곡을 쪄서 먹은 것이 일반적이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유물이다.

 

삼국유사에 밥보다 떡에 관한 일화가 먼저 나온다. 서기 17년 남해왕이 죽자 노례와 탈해가 서로 왕위를 놓고 양보를 하는데, 탈해가 성지인(聖智人)은 치아가 많다고 하니 떡을 물어 시험하자고 제안한다.

 

우리 조상들이 쌀로 밥을 지어 일상식으로 먹기 시작한 것은 고려시대로 추정한다. 밥보다 떡이 더 오래 우리 민족과 함께해온 음식인 것이다.”

 

저는 생각했습니다. ‘내가 옛적과 이제를 구분하지 못하고 착각을 했구나, 그 때도 지금과 같은 방법으로 떡을 찌고 밥을 지었으리라 생각을 했구나!’

 

국립김해박물관 부뚜막과 시루. 앞에 놓인 사진은 가야 사람들이 썼던 옻칠 그릇.

 

게다가 옛날에는 지금처럼 알곡 껍질을 까는 기술이 발전해 있지 못했습니다. 박물관에 가면 볼 수 있는 갈돌이라든지가 이를 입증합니다. 그리고 어쩌면 그 때는 껍질을 벗겨내는 것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을 수도 있겠습니다.

 

밥과 떡이 옛날에는 뚜렷하게 구분돼 있지도 않았고 밥이든 떡이든 겨가 섞여 있기는 다반사였습니다. 생각해 보면 이렇습니다. 처음에는 쌀이든 보리든 알곡을 물과 함께 토기에 넣고 끓여 먹었습니다. 지금으로 치자면 죽이었을 것 같습니다.

 

그러다 아래에 구멍을 뚫은 시루로 쪄서 먹기 시작했습니다. 어쩌면 찐밥이라 할 수도 있고 또는 지금 같으면 떡메로 내려쳐서 으깨기 전에 떡과 같은 상태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아마도, 쌀이든 보리든 곱게 갈아서 가루를 내어 찌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런 시기를 지난 다음 금속으로 솥을 만들게 되면서 지금과 같은 밥을 지을 수 있게 됐습니다. 밥은 떡보다 나중인 것입니다.

 

그러다 요즘 들어 창원대학교 경남학연구센터에서 펴낸 <가야인의 삶, 그리고 흔적>(2011년 12월 초판 발행)을 읽었습니다. 아주 성실하게 썼다고는 절대 얘기할 수 없는 책이기는 하지만 나름 그간 역사 연구가 이룩한 성과는 담고 있다고 봐야겠습니다.

 

12쪽에 나오는 얘기입니다. “15세기 조선시대에도 농경지에서 논이 차지하는 비율은 20%”라고요. 옛날에는 떡을 쌀이 아닌 다른 잡곡으로도 만들었는지는 모르지만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떡을 만들어 먹기는 어려운 상황이었음을 일러주는 구절입니다.

 

139쪽에서는, “쇠솥의 등장과 함께 비로소 짓는 밥의 형태로 바뀐 것”이며 “쇠솥은 …… 남한에서는 5세기 이후에야 비로소 출현한다. ……일반인들에게도 솥이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다고는 볼 수 없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밥이 됐든 떡이 됐든 시루로 쪄서 먹는 일이 오랫동안 이어졌음을 뜻하는 대목입니다. 그리고 그 재료가 쌀이었을 개연성은 그다지 높지가 않습니다.

 

국립김해박물관의 갖은 가야시대 토기들.

 

어떠신가요? 혼란스럽지 않으신가요? 저는 떡과 밥과 죽이 혼란스럽고 쌀과 보리와 다른 곡물이 혼란스럽습니다. 그 까닭은 예전과 이제를 나눠 생각지 못한 데에 있습니다.

 

예전에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살았으리라는 여김, 지금과 마찬가지로 떡을 해 먹고 밥을 해 먹고 죽을 해 먹고 살았으리라는 여김, 그 때 시루도 지금 시루와 마찬가지 구실을 했으리라는 여김, 그 때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솥이 따로 있고 시루가 따로 있었으리라는 여김을 제가 하고 있었던 때문입니다.

 

그런 관성에서 제 생각이 벗어나지 못했던 때문입니다. 역사 또는 역사를 통해 예와 이제의 삶을 돌아볼 수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이렇게 이제를 통해 옛날을 보지 않고 옛날을 재구성해 바로 그 옛날을 볼 수 있게 해 주는 그 무엇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렇게 됨으로써 지금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는 무엇이 남을까요? 우리가 살아내는 ‘지금 여기’도 한낱 스쳐 지나가는 순간일 따름이고, 바로 내일만 돼도 오늘을 살았던 대부분이 달라지고 말 것이라는 사실이겠지요. 물론 이렇게 달라지는 가운데서도 달라지지 않는 그 무엇은 그대로 남겠지만 말씀입니다.

 

여기에 더해 오늘의 눈으로 어제를 봐서는 안 된다는 것, 더 나아가 오늘의 눈으로 내일을 본다면 정말 큰 일 난다는 것까지 깨칠 수 있다면 더욱 큰 다행이겠지요.

 

김훤주

 

※ 올해 7월 발행된 <경남작가> 25집에 실은 글을 아주 조금 고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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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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