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콘텐츠진흥원과 경남문화예술진흥원이 공동으로 주최·주관하는 경남이야기예술인탐방대에 함께한 이는 모두 다섯입니다. 문인으로는 하아무·박래녀 소설가와 손남숙 시인 등 셋이고요 미술 쪽에서 신희경·미란 화가가 동참했습니다.

 

'이야기'와 미술은 어쩌면 궁합도 맞지 않는 색다른 결합으로 여겨질 수도 있겠는데, 그 결과물을 보면 그리 잘못은 되지 않았지 싶습니다. 다음에는 성악이나 악기를 하는 음악인과도 함께해 볼까 싶은 생각이 듭니다.

 

이번에 두 화가가 내놓은 그림들은, 바라보면 한 마디로 집어내기는 어렵지만 마음을 울리는 무엇이 느껴지거든요. 음악인들도 '경남' '이야기' '탐방'을 하면 마찬가지 감흥이 일어 소리로 그것이 표현되지 않을까요? 그 소리를 듣는 이들은 그로 말미암아 다시 감흥이 솟고 말씀입니다.

 

남명 생가가 있는 합천 삼가 외토리 들머리 느티나무 아래에서 정해식 문화해설사 설명을 듣는 얘술인들.

 

이번 탐방에서 문인 셋은 탐방한 이야기를 모티브 삼아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임의롭게 오갔습니다. 화가들 그림은 그대로 올리고 문인들 글은 맛뵈기로 부분부분 싣습니다. 나중에 단행본으로 나오면 그에 걸맞은 방법으로 전문을 보실 수 있게 하겠습니다.

 

◇합천 남명 조식

 

"돌아가신 할아버지처럼 친근하게 다가오는 어른은 고향의 버팀목 같은 존재다. 지리산 아래 덕산(산청)은 창녕 조씨 집성촌이자 남명 선생의 산천재와 덕천서원, 세심정과 그 노후 이야기가 있는 곳이다.

 

어린 시절 덕천서원과 붙은 초등학교에 다녔다. 낮은 담장을 넘나들며 친구들과 술래잡기를 하고, 마음을 씻는 샘이라는 세심정 샘가에서 걸레를 빨고, 샘물을 떠다 마시며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커다란 포고나무의 굵은 뿌리 아래 아담했던 샘, 샘물은 늘 철철 넘쳐흘러 덕천강으로 스며들었다.

 

집에서는 할머니의 입담을 통해 남명 조식 선생의 기이한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다. 풍운조화를 부릴 줄 알았다고도 했고, 세발솥을 걸리며 다녔다고도 한다. 덕산 들입의 고갯길에는 남명 선생이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거꾸로 꽂아 자랐다는 소나무가 있고, 양당 마을 뒤에는 그 분의 묘가 있다.

 

합천 남명 관련 유적을 탐방한 뒤 신미란님이 그린 그림.

 

이번 이야기 탐방에 참가해 그 자취를 다시 밟게 되었다. 놀랍게도 그 분의 생가지나 외가가 모두 합천군 삼가면에 있었다. 삼가면 외토리 외가에서 태어난 선생은 젊은 시절 부모를 따라 서울로 김해로 떠나 살다 48세가 되던 해 어머니 시묘살이를 끝내고 삼가현 토동으로 돌아와 후학을 양성했다.

 

계부당과 뇌룡사를 지어 강학하고, 제자들이 거처할 장소로 삼았단다. 61세 되던 해 산천재를 지어 덕산으로 옮겨 살기 전까지 13년 후학을 양성하며 살았다니 등잔 밑이 어두워도 한참 어두웠다."(박래녀 소설가)

 

외토리 용암서원 앞 을묘사직소 새긴 빗돌.

"문득 남명 선생을 온 마음으로 흠모했던 한 사내가 떠올랐다. 젊은 나이임에도 예의가 깍듯했고 부조리하고 부정한 일에 분노했으며 책상물림에서 비롯되는 온갖 공허한 소리와 힘센 자의 이율배반적인 작태를 질타하곤 했다.

 

작은 쓰레기라도 보이면 허리를 굽혔고, 곤궁한 사람들에게는 아낌없는 도움과 친절을 베풀었다. 언제부턴가 권력을 받아쓰기하는 재주를 부리더니 낯두꺼운 일을 벌이며 제 욕심을 바락바락 채우기 시작했다.

 

급격한 변신을 두고 어떤 이는 본디 바탕이라 했고, 어떤 이는 불우한 시절에 겪은 모멸과 원망이 만들어낸 어리석은 결탁으로 보기도 했다. 그가 그토록 부르짖던 생활 속의 유교, 실천하는 유교는 간 데 없고 남명을 말하던 입술은 약삭빠른 처세의 창구로 전락한 듯해 지금도 씁쓸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삼가장터3.1만세운동기념탑.

 

……1919년 3·1만세 운동 당시 삼가장터에 무려 3만 명이나 몰려 나와 시위를 벌였다고 한다. 만세운동이나 의병운동의 뿌리를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만약 남명학파가 글로만 쌓는 학문을 했다면 결코 몸으로 행하는 운동으로까지 나아가지는 못했을 것이다.

 

삼가시장 입구 삼가장터 3·1만세운동기념탑에 이르면 남명 정신을 계승한 이들의 죽음을 무릅쓴 결단과 희생에 절로 머리를 숙이게 된다."(손남숙 시인)

 

"남명은 스물다섯에 그동안의 공부가 크게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6년 전 기묘사화로 칼바람이 불고 숙부가 파직되는 진통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새로운 시대를 열고자 했던 젊은 도학자들의 꿈이 물거품으로 돌아가고 보수 집권세력의 살벌한 독재는 그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음에 분명하다.

 

합천 남명 관련 유적을 탐방한 뒤 신희경님이 그린 작품. 인걸은 간 디 없고.

 

이듬해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합천으로 돌아와 삼년상을 치렀다. 이 시기에 남명은 그의 진로를 확정 짓는 일생일대의 결심을 했다. 현실정치권 진입을 포기하고 처사(處士)의 힘겹고 고달픈 길을 선택한 것이다. 삼년상을 치르는 동안 암울한 시대상과 불확실한 자신의 미래에 대해 끝없이 고민한 결과였을 것이다.

 

그것은 삼년상을 마친 뒤 다시 한양으로 올라가지 않고 주저앉은 데서도 잘 드러난다. … 그런 의미에서 합천은 남명의 생애 가운데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공간이다. 남명과 비슷한 시기에 생을 시작했을 외토리 남명로의 느티나무도 그런 남명의 고뇌와 결단을 지켜보지 않았을까."(하아무 소설가)

 

◇의령 의병장 곽재우

 

"기강나루는 낙동강과 남강의 합수지점으로 임진왜란 때 곽재우가 이끄는 의병군이 왜군에 맞서 최초의 승리를 거둔 곳이다. 건너편으로 함안군 대산면과 창녕의 남지철교가 보이는 것이 무시로 깔짝거리는 적군과 대치할 만한 장소인 듯했다.

 

…… 길가에는 곽재우 장군의 전공과 유덕을 기리는 보덕각(報德閣)과 손인갑 장군과 아들 손약해의 충절을 기리는 쌍절각(雙絶閣)이 있었는데 나라의 위급함에 신속히 응대한 그들의 이야기가 어쩌면 이토록 아련하게 들릴까, 씁쓸하게 곱씹어보기도 했다.

 

…… 유적지는 …… 그것을 이어보면 하나의 지도가 완성된다. 의병이 일어난 지역을 이으면 말 그대로 '곽재우 길'이 생길 것이다. 곽재우는 …… 내륙에서 승전을 이끈 장군이었고 시문에도 능했으며 벼슬과 명예를 좇지 않고 현실에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려고 했다.

 

곽재우가 의병을 모을 때 북을 내걸었다는 현고수 느티나무.

 

…… 난세에는 훌륭한 옛 선인이 그리워지는 법이다. 망우정 볕 바른 마루에 서서 낙동강 푸른 물길을 굽어보았을 장군의 눈빛을 상상하노라니 어디선가 되비추는 마음인 듯 짱짱한 햇빛이 강물을 뒤채어 흔들어대는 듯했다. … 강물은 속절없이 흐르고 있다."(손남숙 시인)

 

"낙동강과 남강이 만나는 두물머리를 바라보는 기강나루는 쓸쓸하다. 그 곁, 곽재우의 공로와 그의 덕을 기린 불망비(不忘碑)를 보호하기 위해 세운 보덕각에는 사람이 찾아온 흔적을 찾기가 어렵다. 강물은, 사람들이란 으레 그러하더라,는 듯 무심히 흐를 뿐이다.

 

망우정. 곽재우가 말년을 보내다 세상을 떠난.

 

망우정은 삶의 비의가 진하게 서린 듯하다. 병을 이유로 경상좌도병마절도사를 사직했는데, "고양이를 기르는 건 쥐를 잡기 때문인데, 이제 내 할 일은 다 끝났다"는 이유였다. 이에 사헌부 탄핵을 받아 영암으로 유배되었고, 그 후 현풍 비슬산에 들어갔다가 이곳 낙동강가에 기거하였다. 이곳에서 패랭이를 삼아 입에 풀칠하고, 나물과 솔잎을 먹고 살았다는 얘기가 전한다.

 

곽재우 장군 최대 승전지이면서 동시에 의령 삼대 부자 전설과도 관련돼 있는 정암(=솥바위).

 

신희경님 작품. 꿈이런가 하노라.

 

한 가지 이상한 것은, 이곳 사람들의 묘한 태도다. 의령 사람들은 충의의 고장이라 하고, 의병의 날을 정해 축제를 벌일 정도로 자랑스러워한다. 그런데 이야기를 하다 보면 어느새 호암 이병철이니, 3대 부자니, 삼성·엘지·효성 등 3대 그룹을 배출한 부자의 고장이니 하는 쪽으로 흘러간다. 그럴 때마다 쓸쓸한 기강나루와 망우정이 떠올랐다."(하아무 소설가) 

 

◇남해 집막걸리

 

"농촌에 시집오니 어머님은 놉겪이를 위해, 새참으로 늘 농주를 담가 놓고 먹었다. 밀농사 지어 누룩을 띄우고, 동이 두 개를 번갈아가며 농주를 담갔다. 철없는 새댁일 때는 찹쌀로 가마솥에서 쪄낸 고두밥이 맛있어 들며나며 집어 먹다가 '나~는 오데로 무시꼬. 하는 짓을 보모 철딱서니라고는 없으이'라며 어머님 눈총을 받기도 했다.

 

농주 맛에 길든 것은 두 아이 키울 때다. 두 아이에게 젖을 먹여 키웠는데 어머님은 농주를 마시면 젖이 많이 나온다고 했다. 어머님과 대작을 하다 보니 느는 것은 주량이요, 불어나는 것은 살집이었다.

 

남면집에 술상에 앉아 하모니카 부는 할배.

 

……남면집에서 잠깐 나는 주모가 되었다. 홍합 까다가 소주 마시러 왔다는 베레모 할아버지 덕이었다. 하모니카를 불었다. <여섯 시 내 고향>에도 몇 번이나 출연했단다. 옛 노래를 하모니카로 연주하는데 막힘없이 부드러웠다. 젊어 한때 한량이었나 보다. 할아버지라고 했다가 번번이 지적을 받았다. '오빠'라고 정정 보도를 했는데. 그 오빠란 말이 왜 그렇게 안 떨어지는지.

 

……주인 할머니의 인생 이야기를 들었다. 벌어먹겠다고 남의 일 다닐 때면 세 아이들이 어미 올 때까지 배를 곯고 기다리다 잠들어 있어 보면 눈물 났다고 진짜 눈물을 흘리셨다. 한 생을 산 사람치고 소설 같지 않은 인생이 있을까."(박래녀 소설가)

 

왼쪽 주인 할매랑 얘기 나누는 이가 소설가 박래녀.

 

"남해읍 시장통의 남면집 막걸리 …… 잔술로도 팔아서 읍내 볼일 보러 왔다, 지나가다 생각나 훌쩍 들어오는 단골이 꽤 되는 것 같았다. 한 사발 쭉 들이켜고 가는 술이란 막걸리 본래의 푸근함과도 같아서 누구나 밖을 내다보며 오라고 손짓할 수가 있는 것이다.

 

할머니 인심도 퍽 좋아 홍합을 다져넣은 부침개와 막걸리 한 사발이면 배가 벌떡 일어날 만했다. 어느 고장에나 있을 법한 흥 많고 말하기 좋아하는 노인이 술자리를 터주어 당신 지난 이야기도 듣고 하모니카로 구성진 옛날 가요도 들었다. 신나는 가락에 다들 손가락 장단을 맞추며 즐거워하였다.

 

요새는 막걸리를 담그는 집이 귀하고 특히나 장사하는 집에서 직접 담근 막걸리를 팔기는 어려운 일이다. 술 담그는 비법을 …… 알려 막걸리집도 전문으로 흥했으면 좋겠다. 볼그레하니 달아오르는 뺨, 희미하게 물러갔다 다시 다가오는 얼굴들 사이에서 막걸리는 이름까지 살갑다.

 

막 걸러내서 막걸리인가, 막 먹을 수 있어서 막걸린가, 막역하게 나누어 먹으라고 막걸린가, 이런 생각을 하노라니 그 옛날 젊디젊고 곱디고운 엄마가 달려드는 파리와 날름거리며 집어 먹는 내 손등을 쫓으려고 김이 무럭무럭 오르는 꼬두밥에 연신 부채질을 하던 것이 떠오른다.

 

신미란 작품.

 

그때 참 좋았지. 온 집안에 피어오르던 구수한 꼬두밥 냄새, 안방 문을 열면 발효되어 들쩍지근하게 맡아지던 술내, 술 좋아하시던 아버지 얼굴이 새삼 그립다."(손남숙 시인)

 

"남면집은 사람 냄새 제대로 맡을 수 있는 곳이었다. 오징어와 홍합 따위의 해물이 넉넉히 들어간 파전도 맛이 있었다. 그중에서 최고는 사람의 맛이었다는 이야기다. 주저앉아 한 잔 하노라면 아는 얼굴이 지나가고 그를 부른다. 앉아 주거니 받거니 하다 보면 아는 동생이 합석한다.

 

그러는 사이 지나가다 잔술 한 잔 꼴딱 마시고 가는 이도 있다. 술은 못 마셔도 옆에 앉아 말참례를 하다 가는 성님도 있다. 주인 할매는 외상이라고 해도 인상 한 번 쓰지 않고, 장부에 적어놓지도 않은 외상값을 주는 대로 받고 만다.

 

신희경 작품.

손님이라야 전부 '노땅'들인데, 어쩌다 우리 같은 새파란 것들이 그렇게 허름한 곳에 앉아 있는 게 신기하고 반가운 모양. 하모니카를 꺼내 앙코르까지 받으며 연주를 하고, 묻지도 않은 동네 이야기, 사람 이야기도 술술 풀어낸다.

 

이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 막걸리의 참맛인 것이다. 남해에 있는 남면집이라는, 앉아 있기에도 서 있기에도 어중간한 목롯집에 가면 박재삼, 변영로, 염상섭, 오상순, 김관식, 이어령도 있고 잘 살펴보면 구석에 이태백도 있다. 그이들이 공평하게 앉아 막걸리잔 기울이고 있다."(하아무 소설가)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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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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