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기 창원에선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간단히 요약하면 이렇다.


우선 군(軍)이 행정·치안·사법 등 모든 권력을 장악하고, 시·군 행정기관과 경찰은 군의 하부기관이 되었다. 그리고 우익단체와 지방 유지를 중심으로 한 ‘비상대책위원회’가 결성돼 군의 보조기구 역할을 수행했다. 이 과정에서 평소 반정부 활동을 벌였거나 진보적 성향을 보여 정부의 특별 관리를 받아온 사람들은 예비검속[각주:1] 대상이 되어 학살되었다. 이미 정치범 또는 시국사범으로 수형 중이던 재소자들도 같은 운명을 맞았다.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발발한 후 당시 마산시와 창원군, 진해읍은 7월 8일 정부의 계엄령 선포에 따라 계엄사령부 통제 하에 들어갔다. 당일 이유성(중령) 마산지구위수사령관과 김성삼(대령) 진해군항사령관은 마산·고성·창원·통영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계엄령 직후 경남은 경상남북지구계엄사령부(사령관 이준식 준장)의 관할이었으나, 7월 22일 경상남도계엄사령부(사령관 채병덕 준장), 8월 14일 마산지구계엄사령부(사령관 이응준 소장), 8월 28일부터는 다시 경남지구계엄사령부(사령관 김종원 대령)의 관할이 되었다.[각주:2]


병참기지, 그리고 우익단체 위주로 구성된 비상대책위


전쟁 기간 동안 끝까지 적군에 점령되지 않았던 이 지역은 외지에서 들어온 수많은 군부대의 주둔지이자 병참기지가 되었다. 마산 제1부두에는 미군항만수송사령부가 들어앉았고, 중앙부두에는 미군 제533부대가 주둔했다.


월영초등학교에는 미 항만 수송부대인 제155부대가 주둔했고, 마산의 3개 역(신마산, 구마산, 북마산역)은 미국철도수송대가 수송업무로 사용했다. 마산중학교(현 마산고등학교)와 완월초등학교는 미 제25사단이 본부로 썼고, 마산상업학교(현 용마고등학교)애는 미 해병대 기갑부대가 주둔했다.


마산시는 청사를 제2육군병원 병동으로 내주고 문창교회로 옮겨갔다. 양덕동 들판에는 부산에 본부를 둔 미 제8보급기지창의 분창이 들어섰다.[각주:3]


질서 유지와 선무 활동을 내세운 비상(사태)대책위원회는 우익단체 간부 위주로 구성되었다. 그해 7월초 결성된 후 7월 20일 이후 재편·강화되었다는 마산시비상대책위원회 구성을 보면 이후(1956) 자유당 마산시당부 부위원장을 맡게 되는 장동은이 위원장을 맡고, 당시 국민회를 비롯한 우익단체 간부였던 손문기, 안장수, 강태호, 서기홍, 손성수, 김종신이 부위원장을 맡았다.[각주:4] 서기홍은 일제강점기 판사 출신이었고, 김종신 또한 일제가 임명한 마산부회의원 출신이었다.


7월 3일 진해읍사무소 회의실에서 결성된 비상사태대책위원회도 진해통제부 작전부장과 한청(대한청년단) 총본부 부단장을 비롯하여 지방기관 책임자급 유지 다수가 참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각주:5] 이들 비상대책위는 활동경비 마련을 위해 각 읍·면별로 금액을 할당했는데, 창원시비상대책위의 경우 할당액이 435만 6000원이었다고 한다.[각주:6]


우익단체 주최의 궐기대회도 열렸다. 7월 16일 오전 11시 진해중학교 교정에서 국민회 창원지부 주최로 수천 명이 참석한 비상사태 창원군민궐기대회가 열려 대통령과 UN 위원단, 육참총장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채택했다.[각주:7]


1960년 마산매일신문에 보도된 학살된 사람들 명단.


보도연맹원과 형무소 재소자 학살


이런 와중에 국민보도연맹 조직원과 형무소 재소자 학살 계획도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국민보도연맹은 해방 이후 좌익단체 가입 전력이나 혐의가 있거나 이승만 정권에 대한 정치적 반대자들을 상시적으로 감시하고 관리하기 위해 1949년 법무부와 내무부 주도로 만든 관변조직이었다. 그러나 지역별로 가입자 수를 할당하다보니 아무런 영문도 모르고 가입한 사람도 부지기수였고, 심지어 자신이 맹원으로 가입되어 있다는 사실도 모르는 경우도 있었다. 보도연맹 간부는 경찰서 사찰과장과 우익단체 간부들이 맡았고, 수시로 맹원들을 소집해 반공 교육을 시켰다.


7월 12일 송요찬 헌병사령관은 “필요에 따라 법원의 허가 없이 보도연맹원들을 예방 구금할 수 있다”고 발표했다.[각주:8] 이에 따라 마산지구 위수사령관 이유성은 7월 15일 마산·창원과 거제·통영 등지의 보도연맹원에 대한 일제 예비검속을 단행했다. 이에 대해 이유성은 18일 기자회견을 통해 “보도연맹원은 극악질자와 일시 남의 꾀임에 빠진 자가 있는 데 우리 수사기관에서 조사하여 잘 처리할 것”이라고 말했다.[각주:9]


그러나 이날 이후 보도연맹에 대한 보도는 모든 신문에서 사라졌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나 1960년 4·19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진 후 발족된 국회 양민학살조사특위 증언청취 속기록에 보도연맹이 다시 등장한다.


“50년도입니다. 그때 지서에서 나와 가지고 시민극장에 모아가지고 마산형무소에 일단 수감을 했습니다. 그런 케이스가 하나 있고 또 하나는 헌병들이 직접 과거 복역한 사람, 구속되어 있는 사람 중 과거 보련(보도연맹)에 관계있던 사람들 명단을 다 뽑아 갔습니다. 그때 이 사람들도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현재 없어진 것이 1681명입니다.”[각주:10]


1960년 마산유족회 결성식장.


그러나 이듬해인 1961년 5·16쿠데타와 함께 유족회 간부들은 구속되고 사건의 진실은 또 묻히고 말았다. 마산부두노조와 자유노련 위원장 출신의 노동운동가이자 마산유족회와 전국유족회 회장이었던 노현섭(1920~1991) 씨도 소급입법된 특수범죄처벌에관한특별법에 의해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1999년 다시 밝혀진 반 세기 전 학살의 진실


이 문제가 다시 불거진 것은 1999년 『경남도민일보』의 기획보도였다. 이 신문은 마산과 창원 일대에서 예비검속된 보도연맹원들과 마산형무소에 복역 중이던 정치범들이 육군CIC(특무대)의 분류작업을 거쳐 7월 15일부터 8월 23일까지 마산시 구산면 원전 앞바다(괭이바다)에서 집단 수장·학살되었다고 보도했다.


또 창원군 북면과 창원면 남산 등 여러 산골짜기에서도 민간인이 학살·암매장된 사실이 있으며, 마산시 진전면 곡안리 성주 이(李) 씨 재실에 피란 중이던 이 마을 주민 83명이 미군에 의해 학살되었다는 사실도 밝혀냈다.


독립운동가 안용봉 선생.독립운동가 이교영 선생.


또 이 과정에서 1919년 진전면 고현시장 장날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했던 독립운동가 이교영 선생도 곡안리에서 학살되었으며, 창원 상남면 출신으로 1930년대 경성에서 독립운동을 벌였던 안용봉 선생도 창원 삼정자동 골짜기에서 군경에 의해 학살되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를 계기로 이교영·안용봉 선생은 2006년 국가보훈처에 의해 뒤늦게 독립유공자로 공식 인정받았다. 이와 함께 용공 누명을 쓰고 복역했던 노현섭 씨도 2010년 법원의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노현섭 전국피학살자유족회장.


또 노무현 정부에서 출범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부산·경남지역 형무소 재소자 희생사건’과 ‘마산·창원·진해 국민보도연맹 사건’에 대한 진실규명 결정문을 통해 희생자는 최소 717명을 훨씬 상회하며, 이 중 400여 명의 보도연맹원이 학살되었다고 밝혔다. 이 중 신원이 확인된 사람은 재소자 310명, 보도연맹 117명이었다.[각주:11]


학살의 공포와 우익인사의 입지 강화


이러한 전쟁 초기의 민간인학살은 마산·창원지역 우익단체 간부들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1948년 5월 10일 치러진 제헌의회 선거에서 대표적 우익단체인 국민회 마산지부장이었던 손문기는 외지인인 권태욱(무소속) 후보에게 밀려 큰 표 차로 낙선했다. 이어 전쟁 직전인 1950년 5월 30일 치러진 2대 국회의원 선거에도 국민회 후보로 김순정이 출마하지만 형편없는 표차로 권태욱 후보에게 패했다. 김순정은 국민회 부지부장으로 보도연맹 마산지부 결성준비위 간사를 지냈고 보도부장을 맡아 여러 시민을 적극적으로 보도연맹에 가입시키는데 앞장선 인물이다.


그러나 학살 이후인 1952년 4월 25일 치러진 지방선거에서 자유당으로 출마한 김종신과 대한청년단으로 출마한 유석형이 시의원으로 당선되고, 열흘 후에는 김종신이 마산시장으로 당선된다. 김종신은 국민회 간부이자 민보단 고문이었으며 보도연맹 사업부장을 역임한 대표적인 우익인사였고, 유석형은 우익청년운동의 선봉장으로 불리던 인물이다. 뿐만 아니라 김종신은 휴전 후 1954년 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권태욱(2439표·무소속)은 물론 허윤수(1만514표·무소속)를 제치고 1만7372표를 얻어 당선된다.


이는 학살의 공포와 억압이 김종신과 유석형을 비롯한 우익세력의 기반을 강화시켜줬다는 점을 입증해 주는 대목이다.[각주:12]


그러나 마산시민들은 1958년 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당 김종신 후보를 낙선시키고 민주당 허윤수 후보를 선택함으로써 학살 주도세력에 대한 반감을 표출한다. 이는 1960년 3·15의거로 이어진다.



※최근 출간된 <창원의 역사와 문화>(경남대 인문과학연구소 편, 비매품)에 실린 김주완의 글입니다. 원고는 24매, 원고료는 20만 원을 받았습니다. 책에는 '한국전쟁과 창원의 민간인학살'이란 제목으로 실렸습니다.

  1. 범죄 혐의가 의심되거나 우려된다는 이유로 미리 잡아 가두는 일 [본문으로]
  2.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부산·경남지역 재소자 희생사건」, 『2009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505쪽. [본문으로]
  3. 마산시사편찬위원회, 『마산시사』 1권, 2011. 342쪽 ; 이학렬, 『개항 90년의 우리고장 마산』, 마산향토사연구회, 1988. 61쪽. [본문으로]
  4. 『남조선민보』, 1950년 7월 25일자 [본문으로]
  5. 『남조선민보』, 1950년 7월 5일자 [본문으로]
  6. 『남조선민보』, 1950년 7월 25일자 [본문으로]
  7. 창원시사편찬위원회, 『창원시사』 상권, 1997, 318쪽. [본문으로]
  8. 『민주신보』, 1950년 8월 2일자. [본문으로]
  9. 『남조선민보』. 1950년 7월 19일자 [본문으로]
  10. 1960년 6월 5일 경남도지사실에서 열린 국회 양민학살특위(위원장 최천 의원)에서 마산 피학살자유족회 간부였던 김용국 씨의 증언. [본문으로]
  11.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부산·경남지역 재소자 희생사건」, 『2009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3권, 441쪽 ;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마산·창원·진해 국민보도연맹 사건」, 『2009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6권, 384쪽. [본문으로]
  12. 김주완, 「보도연맹원 학살과 지역사회의 지배구조」, 『토호세력의 뿌리』, 불휘, 2005. 392~393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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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김주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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