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이야기 탐방대 (7) 

최치원과 하동 사람들 


◇공식 기록은 가야산 해인사 산신 = 가야산 가을이면 나뭇잎은 물론 물까지 붉게 물드는 홍류동(紅流洞)에 농산정(籠山亭)이 있습니다. 앞에 빗돌 하나 고운최선생둔세지(孤雲崔先生遁世地)라 적혀 있습니다. 최치원(857~?)이 세상에서(世) 숨은(遁) 자리라는 뜻입니다. 


고운은 여기 바윗돌에 앉아 시를 읊었습니다. "첩첩 바위 사이 거세차게 흐르며 겹겹 쌓인 산을 울리니/ 지척인데도 사람 소리 가늠하기 어렵네/ 시비 가리는 소리 들릴까 두려워/ 흐르는 물소리가 산을 온통 뒤덮었네." 


그러고는 가야산에 들어가 신선이 됐습니다. 시비시비 시시비비 그 너머로 숨은 것입니다. 최치원은 가야산과 인연이 깊습니다. 


<삼국사기>를 보면 최치원은 이랬습니다. "모두 어지러운 세상을 만나 움직일 때마다 문득 허물을 얻게 되었다. 스스로 때를 만나지 못함을 슬퍼하며 다시 벼슬할 뜻을 품지 않았다." 그래서 산으로 스며들었을까요. 


당시 가야산 해인사에는 최치원의 동기(동복형)와 지기(知己)가 있었고 아마도 그런 인연으로 최치원은 식솔을 거느리고 거기 들어가 종로(終老)했습니다. 요즘으로 보면 신선이라는 존재가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노릇이지만, 그래도 굳이 신선이 됐다면 그 자리는 해인사가 있는 합천 가야산 홍류동임이 틀림없다 하겠습니다. 


쌍계사 진감선사대공탑비.


◇최치원이 지리산 신선이라는 하동 사람들 = 하동 사람들은 그와 무관하게 최치원은 지리산 산신이라 믿고 있습니다. 신흥사 들머리 세이암에서 속세 인연을 마지막으로 정리하고는 지리산에 들어가 신선이 됐다는 것입니다. 


이를 일러주는 그림이 부산박물관에 있습니다. 최치원이 좌우에 한 명씩 동자승을 거느린 그림이랍니다. '건륭(乾隆)58년(1793)' '하동 쌍계사'에서 만들어졌습니다. 220년 전에도 하동 사람들은 동자승을 거느리는 산신령으로 최치원을 인식하고 있었다는 얘기가 됩니다. 


2009년 최치원을 문인(=선비)으로 덧칠한 그림(하동군 양보면 운암영당에 있었던 고운 선생 영정)을 국립진주박물관에서 X선으로 투사해 확인한 밑그림으로 밝혀낸 사실입니다. 


세이암. 두류문화연구원 최헌섭 원장이 올라가 있습니다. 쬐그맣습니다.


최치원은 하동 어디에서 신선이 됐을까요? 화개면 범왕리에 있는 화개천 개울가가 최치원이 우화등선(羽化登仙)한 자리입니다. 아마도 900년대 초반이었겠지 싶습니다. 


최치원은 여기 개울가에서 귀를 씻었습니다. 세상에서 들은 갖은 잡다하고 번잡스러운 소리를 털어낸다는 뜻입니다. 더불어 속세 자취가 그대로 묻어 있는 신발과 갓을 벗어놓고는 신흥사(지금 화개초교 왕성분교 자리)를 거쳐 지리산으로 들어갔습니다. 최치원은 신흥사 앞에서 마지막 세속 물건인 지팡이까지 꽂아두고 떠났습니다. 


◇세이암·범왕리 푸조나무와 신흥사터 = 사람들은 최치원이 걸터앉아 귀를 씻은 바위를 세이암(洗耳岩)이라 이릅니다. 바위에는 깊이 파여 있는 세 글자 洗耳岩이 뚜렷합니다. 


마을 할매는 말했습니다. "그 어른이 도력이 세거덩. 손가락으로 이래이래 후비파 썼다 아이가!" 거기 세 글자가 고운 선생의 행적이라고 확신하는 할매 표정에서는 어째 자랑스러워하는 기색까지도 조금은 느껴졌더랬습니다. 


범왕리 푸조나무.


다른 얘기도 있습니다. 이야기탐방대가 2015년 11월 4일 하동으로 최치원을 찾아가는 걸음에 두류문화연구원 최헌섭 원장도 함께했습니다. 최 원장의 얘기는 이랬습니다. 

"최치원은 비문을 비롯해 자기 글씨를 많이 남겼습니다. 후대 선비들한테 모범이 될 만큼 잘 쓴 글씨였습니다. 그런데 학계에서는 여기 바위 洗耳岩은 고운이 썼다기에는 격이 크게 처진다고들 합니다." 


후대 사람들이 꾸며낸 얘기라는 말입니다. 하지만 그에 대한 알리바이가 없을 수 없지요. 

"할매도 말했듯이 정식으로 쓰지 않았거든. 붓 대신 손가락으로 쓴 글씨라서 그렇다는 얘기거든. 하하." 


일행은 최치원이 꽂아둔 지팡이도 찾아갔습니다. 최치원은 등선하기 전에 말했습니다. "지팡이가 싹을 틔우고 자라서 살아 있으면 나도 살아 있고 그렇지 않으면 나도 죽은 줄 알아라." 


경상남도기념물 123호로 보호받는 범왕리 푸조나무입니다. 우리나라 푸조나무 가운데 가장 크고 나이도 많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1100살은 아니고 500살 정도로 짐작된다고 합니다. 원래 나무에서 씨앗을 받아 자란 후계목일까요? 


범왕리 푸조나무 둥치에 놓여 있는 동전들. 누군가 찾아와 빌었다는 표지인 셈입니다.


범왕리 푸조나무는 화개초교 왕성분교 들어가는 비탈길 옆에 서 있습니다. 옛날 이 분교 자리에 있었던 신흥사로 들어가 최치원은 신선이 됐습니다. 학교 건물 뒤 대밭에는 옛날 부도탑이 하나 남아 있기도 하답니다. 


나무 둘레를 둘러보니 사람들 치성을 드린 자취가 뚜렷합니다. 다시 동네 할매한테 물어봤습니다. "나무한테 제사를 지냅니꺼?" "춘삼월 보름날 제사를 지냈거덩, 요즘은 안 지내고." "그러면 촛불 자국은 뭐라예?" "다른 사람들이 와서 지낸다 아이가? 초하룻날에 오는갑데." 


푸조나무 제단.


◇고운 최치원의 쌍계사 진감선사대공탑비 = 쌍계사 뜨락 진감선사대공탑비는 최치원의 실물입니다. 쌍계사에서 주로 활동한 진감선사(774~850)가 세상을 뜨자 35년 뒤 임금이던 헌강왕이 세우게 했습니다(건립 연대는 진성왕 때인 887년). 팔영루와 대웅전 사이에 비스듬히 놓여 있습니다. 


쌍계사는 최치원이 거닐던 장소입니다. <삼국사기>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마음 내키는 대로 돌아다니며 산림 아래와 강가·바닷가에 누정을 짓고 솔과 대를 심었으며 책 속에 파묻혀 풍월을 읊었다." 최치원이 손수 문장을 짓고 글씨와 빗돌 머리글도 썼습니다. 


불교음악인 범패를 들여와 대중화하고 전통차를 널리 퍼뜨린 일 등 선사의 한살이를 적었습니다. 진감선사는 850년 정월 9일 새벽 세상을 뜨면서 "탑도 세우지 말고 자취도 기록해 남기지 말라"고 유언했습니다. 


하지만 헌강왕은 탑비문 작성을 하기로 하고 최치원에게 맡겼습니다. "신에게 명을 내리시기를 '선사는 수행으로 이름이 드러났고 그대는 문장으로 이름을 떨쳤으니 마땅히 명(銘)을 지어라' 하시어 치원이 두 손을 마주대고 절하면서 '예! 예!' 대답하였다." 


쌍계사 진감선사대공탑비를 살펴보는 일행.


20~30대 팔팔한 젊은 시절에는 이름을 가리고 숨을 생각을 하는 사람이 예나 이제나 드물다 하겠습니다. 최치원도 마찬가지였겠습니다. 게다가 나이 열두 살에 스스로 당나라로 유학갔고 거기서 6년 만인 열여덟에 '한 번 시험으로 과거 급제'한 천재였습니다. 


그러고 10년이 흐른 885년 당나라 황제 희종의 조서를 갖고 돌아왔습니다. 이런 금의환향에 이어 곧바로 탑비에 새길 문장을 쓰는 왕명을 받았습니다. 〈삼국사기〉 표현을 따르면 "당나라에서 배워 아는 것이 많았으므로 본국에 와서는 자기 뜻을 행하려 했"던 시기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이 말세였습니다. "의심하고 꺼리는 사람이 많아 용납되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은 최치원을 신선으로 만들었습니다. 유교·불교·도교를 아우르는 사상을 갖고 있었다거나 사람들이 우러렀기 때문만은 아닐 것 같습니다. 


자기네와 처지가 같은 존재로 여겼기에 신선으로 삼았겠지 싶은 것입니다. 무엇이 당시 백성들로 하여금 동류의식을 갖게 만들었을까요? 최치원의 뜻을 꺾은 귀족들이 최치원뿐만 아니라 백성들 삶까지 고통스럽게 만들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요? 


김훤주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글쓴이 : 김훤주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