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1960년 경상남도 마산을 중심으로 활동한 ‘한국영세중립화통일추진위원회’의 통일운동과 이듬해 5·16쿠데타로 간부들이 구속되고 단체가 와해된 과정.


[경과]

1960년 마산에는 기존의 통일 방식과는 사뭇 다른 ‘영세중립화 통일’을 주장하는 단체가 등장했다. 4·19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붕괴한 이후 발족된 ‘한국영세중립화통일추진위원회(중립위원회·위원장 김문갑)’가 그것이다.


중립위원회는 마산 무학초교에서 모두 3차례에 걸쳐 집회를 열었다. 5·16쿠데타 직후 ‘혁명검찰’의 공소장에 의하면 1960년 11월 6일 발기대회에 500여명의 청중이 모였고, 12월 28일 같은 장소에서 열린 위원회 등록보고대회에는 1000여명이 참석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영세중립화통일추진위원회 발족.


중립위원회는 또한 1961년 장면정권이 반공법과 데모규제법 등 2대 특별법을 제정하려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3월 21일 중립위원회 사무실에서 마산실업자생존동맹을 비롯한 10개 사회단체와 함께 ‘2대 악법 반대 마산시공동투쟁위원회(위원장 김성립)’를 조직하고 25일에는 역시 무학초교에서 2대 악법반대 시민궐기대회를 개최했다. 공소장은 이날 대회에 약 4000여명이 참석했다고 밝히고 있다.


당시 이 같은 통일운동과 악법반대투쟁을 주도했던 김문갑 씨는 1909년 함경남도 정평군 신상에서 태어났다. 부친으로부터 한학을 배운 그는 16살 나던 해에 일본의 정치조직과 사회조직을 알기 위해서는 그들의 소굴에 들어가야 한다고 판단, 일본 오사카와 도쿄 등을 유랑한 것으로 회상하고 있다. 앞서 인용한 검찰의 공소장에는 일본 와세다대학 교외생과정을 수료하고 30살 때 약제사 시험에 합격해 마산에서 약종상을 경영했던 것으로 기록돼 있다.


지난 2000년 기자와 만났을 당시 김문갑 선생. 허성관 전 행정자치부 장관이 그의 막내사위다.


해방 전인 1944년에는 여운형 선생과 함께 조선건국동맹을 조직, 서울 이남의 조직책으로 활동했으며 해방 후에는 조선인민당 중앙위원과 근로인민당 중앙위원으로 활동했다. 또한 그는 마산에서 마산약학대학 설립 기성회 조직위원장으로서 오늘날의 부산대학교 약학대학 설립을 주도하기도 했다.


1955년에는 이동화·김일재 등의 계략으로 근로인민당 재건기도 혐의로 검거돼 오제도·조인구 검사와 대법원에서 싸워 무죄 석방되었으며, 1959년에도 진보당 사건에 관련됐다는 이유로 김성숙·문희중 등과 함께 옥고를 치렀다.


1960년 3·15의거 이후에는 사회대중당 마산시당 준비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했으며, 최초로 영세중립화통일추진위원회를 결성해 통일운동에 전념하던 중 박정희 군사정권에 의해 구속됐다. 당시 중립위원회에서 함께 활동한 김성립(부위원장)·김형대(부위원장)·김진정(국제부장 겸 선전부장)·전인봉(재정부장) 등도 그와 함께 구속됐음은 물론이다.


이들에 대해서도 당시 공소장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피고인 김성립(45·마산시 동성동 35번지)은 22세시 서울 중동중학교를 졸업하고 농업에 종사하다가 해방후 대동청년단 마산지구 단장, 민주국민당 마산시당 부위원장 등을 역임하고 6·5사변 이후 언론기관에 관여하여 조선일보 마산지국장 마산언론인협회장 등에 종사하다가 단기 4293년(서기 60년-기자 주) 7·29총선거에 한국사회당 마산시당 위원장으로서 동당 공천으로 주거지에서 민의원에 입후보했으나 낙선되고 동년 11월 초순경에 전시 중립위원회를 조직하고...”


“피고인 김형대(47·마산시 중성동 8번지)는 25세시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특과를 졸업하고 의사검정시험에 합격한 후 주거지에서 산부인과 의업을 개업중인 한편 단기 4293년 11월 초순경 전시 중립위원회…”


“피고인 김진정(30·마산시 오동동 135번지)은 24세시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마산고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다가 단기 4293년 5월경 사회당 마산시당 준비위원회를 조직하여 부위원장으로 취임하고…”


“피고인 전인봉(53·마산시 오동동 114번지)은 22세시 중국북경보인대학 부설 정치과 1년을 중퇴하고 상업에 종사하다가 해방후 귀국하여 새한민보 마산지국장, 동래주둔 유엔군 제31포로수용소 중국어 통역관, 마산중국어강습학원 원장 등을 역임하다가 단기 4293년 5월경 사대당 마산시당 준비위원회에 가담하여 통제위원장직에 취임하고 동년 11월 초순경 전시 중립위원회…”


영세중립화통일추진위원회 중앙위원 일동. 1961년 4월 29일 사진.


이들은 당시 특수범죄처벌법이라는 소급법에 의해 ‘용공중립’이라는 희한한 죄명으로 모두 기소됐다. 김문갑 씨는 사형구형까지 받았으나 약학대학 설립 등 정상이 참작돼 10년 선고를 받고 복역했으며, 쿠데타세력이 민정으로 전환한 이후 다시 감형돼 8년의 형기를 마치고 석방됐다. 그는 이후에도 2000년대까지 동지 30여명과 함께 부산에서 ‘코리아영세중립화통일추진위원회’를 이끌다 2004년 작고했다.


[결과]

2009년 10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 위원장 안병욱)는 ‘한국영세중립화통일추진위원회’를 포함한 '5·16쿠데타 직후의 인권침해사건'에 대한 진실규명 결정을 내리고, 법원의 재심과 피해자의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법 제정을 권고했다. 이를 근거로 고 김문갑·김성립 씨의 아들은 2012년 아버지의 명예회복을 위해 법원에 재심청구를 했고 2013년 법원으로부터 무죄판결을 받았다.


재심을 맡은 재판부는 두 사람의 통일운동에 대해 “북한이 영세중립화 통일론과 동일 또는 유사한 방안을 주장한 사실이 없었고, 그 내용도 북한의 연방통일안과 동일하거나 유사한 것으로 보이지 않으며, 북한의 사회주의·공산주의를 제창한 것이 아니다"고 밝혔다. 또 ”2대법 제정을 반대한 행위가 비록 당시 정부 입장에 어긋나는 것이었더라도 이는 헌법상 보장된 표현의 자유에 의해 보호되는 영역에 속하고, 정부와 다른 견해를 밝히는 것만으로 북한의 활동을 고무·동조했다고 볼 수 없다“고 덧붙였다.


[참고 문헌]

김문갑, <코리아의 영세중립과 민족통일>(도서출판 경남, 1997)

김주완, <토호세력의 뿌리>(도서출판 불휘, 2006)


※디지털창원문화재단에 보낸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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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김주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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