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에서 석빙고를 본 적은 있지만, 그저 그런 게 있구나 했지 별 관심은 없었다. 심지어 여름에도 얼음이 어는 얼음골 같은 건가? 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석빙고는 그게 아니라 겨울에 언 얼음 덩어리를 떼어다가 여름까지 보관한 곳이라는 걸 이번에야 알았다.

지난 7월 17~18일 갱상도문화공동체 '해딴에'가 주최한 창녕 팸투어에서 창녕 석빙고를 봤다. 창녕에도 석빙고가 있다는 것 역시 이번에 처음 알았다. 알고보니 창녕에는 읍내에 있는 석빙고 말고도 영산에 좀 작은 규모의 석빙고가 하나 더 있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남아 있는 석빙고는 주로 영남지역에 집중돼 있다. 경주 석빙고, 안동 석빙고, 청도 석빙고, 현풍 석빙고 등이 그것이다. 여섯 개 중 두 개가 창녕에 있으니, 창녕 지역이 나름 고대 양반 계급의 중심지역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창녕 석빙고. 뒤에서 보면 능처럼 보인다.


다음 백과사전에서 '창녕 석빙고'를 찾아보니 다음과 같은 설명이 나왔다.

"보물 제310호. 길이 1,100cm, 폭 360cm, 높이 370cm. 이 석빙고는 화왕산(火旺山) 아래 골짜기에 있는데 계곡의 맑은 물이 얼었을 때 떠다가 보관했던 곳이다. 밖에서 보면 고분처럼 보이며, 빙실의 입구는 남쪽에 있다. 내부의 벽은 잡석으로 쌓고, 4개의 홍예를 틀고 그 사이에 장대석을 쌓아 올려 천장을 만들었으며 천장 사이에 환기구가 있다. 이 석빙고 앞에 축조를 기념한 비석이 있어 1742년(영조 18)에 현감 신후서(申侯曙)가 강세복(姜世復)·김정일(金鼎一) 등과 함께 축조했음을 알 수 있다. 규모만 약간 작을 뿐 구조는 경주 석빙고 안동석빙고와 동일하다." (다음 백과사전)


창녕 석빙고.


더 놀라운 것은 '해딴에' 김훤주 단장이 소개해준 석빙고에 대한 시(詩)였다. 조선시대 김창협이라는 사람이 쓴 시였는데, 그의 생몰연대가 1651(효종 2) ~ 1708년(숙종 34)이었으니, 창녕 석빙고가 축조되기도 전에 쓴 글이라는 게 놀랍다.


게다가 그 시절에 석빙고에 보관할 얼음을 강에서 찍어 떠내고, 이를 져나르고 하는 과정을 이토록 생생하게, 그리고 민중에 대한 애정을 담아 표현할 수 있었다니 더욱 놀라웠다.


창녕 석빙고.


김훤주 단장 덕분에 참으로 좋은 시, 좋은 선인을 알게 되었고, 석빙고에 대한 새로운 각성을 하게 되었으니 이번 여행은 이것만으로도 보람차다. 다시 김창협의 '얼음 뜨기'를 찬찬히 읽어본다. 원 제목은 '鑿氷行(착빙행)'이다.

 

얼음 뜨기

김창협  金昌協


늦겨울 한강에 얼음이 꽁꽁 어니

천 사람 만사람이 강가로 나왔네.

꽝꽝 도끼로 얼음을 찍어 내니

울리는 소리가 용궁까지 들리겠네.

찍어낸 얼음이 설산처럼 쌓이니

차갑고 서늘한 기운이 파고 드네.

아침이면 아침마다 석빙고로 져나르고

밤이면 밤마다 강에서 얼음을 파내네.

해 짧은 겨울에 밤늦도록 일을 하니

일하는 노래소리 모래톱에 이어지네.

짧은 옷 맨발은 얼음에 달라붙고

매서운 강바람에 손가락이 얼어 떨어지네.

고대광실 오뉴월 푹푹 찌는 무더위에

예쁜 여인 하얀 손이 맑은 얼음을 건네주네.

멋진 칼로 얼음을 깨어 자리에 두루 돌리니

멀건 대낮에 하얀 안개가 피어나네.

더위를 알지 못하고 한가득 기쁘게 즐기니

얼음 뜨는 그 고생을 어느 누가 알아주리.

그대는 알지 못하는가?

길가에 더위 먹고 죽어 뒹구는 백성들이

지난 겨울 강에서 얼음 뜨던 이들임을.


길가에 더위 먹고 죽어 뒹구는 백성들이 지난 겨울 강에서 얼음 뜨던 이들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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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김주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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