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한국의 진보가 실패해온 가장 큰 이유는 '뻔하고도 단순한 이야기를 너무나 어렵고 길게 설명하고 가르치려 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최근 두 권의 책을 읽으면서 그런 내 생각에 확신을 갖게 됐다. '미국의 진보 세력은 왜 선거에서 패배하는가'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조지 레이코프 지음, 유나영 옮김, 도서출판 삼인)라는 책과 '폭압적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대한 실천적 제안서'라는 부제가 붙은 [수전조지의 Another world](수전 조지 지음, 정성훈 옮김, 산지니)라는 책이다.

진보의 실패와는 반대로, 5~6월 촛불시위가 그토록 뜨겁게 타오를 수 있었던 이유는 '복잡하고 어려운 이야기를 너무나 쉬운 단어로 명쾌하게 정리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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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집회는 촛불소녀와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구호와 아이디어가 만발했던 창의력 경연장이었다.

'미친소 너나 먹어'라는 구호로 복잡한 미국산 쇠고기 문제를 한마디로 정리해버렸고, '미친 교육, 미친 소, 미친 정부'라는 말로 교육문제와 건강문제, 현정부의 문제가 본질적으로 같은 것임을 알려냈다. '밥 좀 먹자, 잠 좀 자자'는 구호는 이명박식 교육정책이 인간의 기본권을 얼마나 심각하게 위협하는 지를 절묘하게 담아냈고, '물대포가 안전하면 니네집 비데로 쓰라'는 경찰의 폭력성을 여지없이 까발렸다. 경찰이 세종로에 설치한 콘테이너박스를 '명박산성'이라 명명한 것은 소통을 거부하는 정권의 이마에 찍힌 주홍글씨가 됐다.

놀라운 것은 이 모든 명카피와 구호들이 학식높은 진보지식인의 머리에서 나온 게 아니라, 10대 촛불소녀와 평범한 시민들에게서 나왔다는 것이다.

진보지식인들이 이런 간명한 말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조지 레이코프는 "리버럴과 진보주의자들이 어떤 신화를 믿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 신화는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합리적인 존재이므로, 우리가 사람들에게 진실을 알려주기만 하면 그들은 옳은 결론에 도달할 것이다"는 가정으로 시작한다는 것이다.

레이코프는 진보주의자들이 대단히 심각한 '저(低)인지' 현상에 시달리고 있다고 진단한다. 저인지 현상이란 한두 단어로 불러일으킬 수 있는 비교적 단순하고 고정된 프레임이 결여된 상태를 의미한다.

예를 들어 TV에 출연한 보수주의자가 '세금 구제' 같이 두 단어로 된 말을 하면, 진보주의자는 자기 생각을 설명하고자 장황한 논설을 풀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보수주의자는 세금을 내는 것이 고통이라는 이미 확립된 프레임을 호소하는 데 '세금 구제'라는 짧은 한 마디면 충분하지만, 그런 프레임을 갖지 못한 진보주의자는 그게 아니라는 걸 설명하는 데 너무나 긴 말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나라에서는 한나라당이 미국 보수주의자들의 '세금 구제'를 응용한 '세금 폭탄'이란 프레임이 담긴 단어를 무수히 퍼뜨렸다.

따라서 레이코프는 진보주의자들에게 이렇게 충고한다.

진실만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 진실을 우리의 관점에 맞추어 효과적으로 프레임을 구성해야 합니다. (...) 우리의 가치를 명확히 하고 그 가치에 속한 언어를 사용하십시오. 전문가인 척하는 관료주의적 언어를 버리십시오.

수전 조지도 '짧고 쉽게 말해야 한다'는 점에선 레이코프와 같은 생각을 갖고 있는 듯하다. 그 또한 진보지식인들에게 '제발 좀 쉽고 짧게 말하라'고 충고한다.

우리는 자세한 지식을 필요로 한다. 이는 틀림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는 또한 이를 간단하게 정리하여 제시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사람들을 지루하게 만들고 싶다면 모든 것을 다 이야기해주라'고 볼테르는 말한 바 있다.

수전 조지는 여기에 덧붙여 진보세력에게 '제발 공부 좀 해라'는 충고도 하고 있다.

예전에는 정치가 좀 더 단순한 모습을 띠고 있었다. '미국은 베트남에서 철수하라', '인종차별정책을 중단하라', '핵무기 반대' 등의 구호를 외치면 동의하지는 않더라도 이런 구호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쉽게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IMF, WTO, GATS, GMO, OECD 등과 같은 온갖 약자, 그리고 스톡옵션, 토빈세 등의 낯선 단어로 가득 찬 세상에 살고 있다.

이런 표현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금세 하품을 하거나 자리를 피하게 되는 게 당연하다. 만약 여러분이 이런 단어를 다른 사람에게 설명할 수 없다면 우리의 운동에 더 이상의 성장은 없을 것임이 분명하다.

심지어 그는 마르크스주의 사상가였던 안토니오 그람시의 가르침을 충실히 실천하고 있는 사람들은 놀랍게도 진보진영이 아니라 신자유주의자들이라고 꼬집는다.

그림시는 여러 해를 감옥에서 보내며 '문화적 헤게모니' 또는 '문화적 권력'이란 개념을 만들어냈는데, (...) 이는 대중을 자신이 원하는 방식대로 생각하게 만들어 어항 속 물고기가 스스로는 물속에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과 같은 상태로 만드는 힘이다. (...)

지난 50년간 신자유주의자들은 그람시의 가르침을 훌륭히 실천에 옮겨왔지만 진보진영에서는 이같은 교훈이 잘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 같다. 우익진영은 일찍이 '사상의 영향력'을 파악하여 학자와 작가들에게 자금을 후원하며, 대학 교수진과 연구소에 기금을 지원하고, 각종 세미나와 회의, 주요 저널과 대학신문 등에 돈을 대기 시작하였으며, 기업의 이윤과 금융시장에 호의적이고 현재 지배계층의 이익을 증진시킬 수 있는 모든 인물과 조직을 대상으로 후원을 제공해왔다. (...)

이들 '우익 그람시주의자'는 진보주의자나 마르크스주의자와는 달리 사상의 영향력과 '문화적 헤게모니'란 개념을 몸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이제 우리는 그들이 했던 그러한 활동의 결과물 속에서 살아가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지난 5월부터 한국사회를 뜨겁게 달궜던 촛불시위가 정작 뜨거운 8월을 앞두고 소강국면으로 접어드는듯한 느낌이다. 그러나 나는 이 국면이 더 체계적이고 더 광범위하며, 더 폭발적인 저항을 준비하는 기간이라고 생각한다.
 
진보주의자라면 촛불소녀와 아고라 전사, 평범한 시민들이 간명한 언어로 만들어냈던 프레임과 구호의 2.0 버전을 고민해야 할 때다.

수전 조지의 Another World - 10점
수전 조지 지음, 정성훈 옮김/산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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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김주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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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커서 2008.07.29 19:5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세금폭탄에 대해선 '재산세현실화' 뭐 이런 뜻의 쌈박한 말을 하나 개발했어야 했는데 말입니다.

  2. Silhouette 2008.07.29 20:5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일리있는 글입니다. 많은 생각을 해보게 되는군요. 일단 진보는 이상에 갇혀있는 이상 그 보수에 밀릴 수 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이상을 풀어내려고 하다보니 말이 많아지는 것이겠죠. 서로 말이 안맞는 것일테구요. 결국 해법은 이상보단 현실에 주목하여 연대하는 것일진데 현실에서의 시각을 맞추기 어려우니 이렇게 갈팡질팡하는게 아닐까요. 하지만 가능성은 있을 겁니다. 서구사회에서 현실 안으로 들어온 진보세력들을 보면 우리도 커 나갈 수 있으리라 봅니다. 꼭 우리가 미국처럼 커나갈 필요는 없으니까요. 잘 보고 갑니다. 안녕히계세요.

  3. 실비단안개 2008.07.29 21:2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읽었습니다.
    디게 고민되네요 - ;;

  4. 리카르도 2008.07.29 22:1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말 공감합니다. 한나라당이 저런걸 잘하죠
    매우 구어적이라고 해야할까요

    민주당은 반면 매우 문어적이죠. 난해하고 어려워요
    선동질이라 생각하지 마시고, 소통의 방법중에 하나라고 생각해야합니다.
    잘난 엘리트주의는 버리고 시장으로 뛰어들어요 제발좀!!!!

    • 두부한모 2008.08.01 10:1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님의 댓글도 정말 일리있네요.... 흠.... 전 다만 우리 국민수준이 낮기 때문에 한나라당이나 조중동 따위가 먹히는 거다..라고 생각했었는데... 제 이런 생각이 수정될 필요가 있겠어요.

  5. freesopher 2008.07.29 23:2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뼛속 깊이 공감하는 바입니다. 책, 읽어봐야겠습니다.

  6. 불닭 2008.07.30 00:2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꼭 여건이 되면 읽어볼게요. 좋은 책인거같습니다.

    보수보다 진보가 발전하는데 더 도움이 되는건 사실이지요. ㅎ 저도 그래서 진보구요^^ 좋은글 잘 읽고갑니다.

  7. antiwa 2008.07.30 08:4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촛불 소녀들에게 진보와 보수가 의미가 있을까?란 근본적인 생각을 해봅니다.

    진보가 혹은 보수가 어떠한 구호를 만들어 내더라도 그 영역 밖에있는 촛불소녀들은 공감하지 않지 않을까요?

    이제 진보와 보수. 기성 정치의 밖에 있는 평범한 사람들이 자신들을 대변하는 구호를 들고 나오면 우리는 그 구호에 집중하고 관심을 기울여야 할 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한명의 리더가 혹은 지식인이 민중을 계몽하고 이끈다는 식의 사고에서 부터 과거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의 모습을 보는 것 같습니다.

  8. 아니카 2008.07.30 09:1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몸으로 하는 실천이 중요함을 느낍니다.
    좋은 책 소개 감솨~

  9. 점프컷 2008.07.30 10:2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10. 한방블르스 2008.07.30 12:1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발 공부 좀 해라'는 일침 옳은 말이라 생각됩니다. 그람시의 '헤게모니'도 '오른쪽'에게 도용당하니 당연히 '왼쪽'에게 '제발 좀 쉽고 짧게 말해'라고 해야지요.
    잘 보았습니다. 덕분에 읽을 목록 두권이 더 생겼습니다.

  11. 하아암 2008.07.30 15:4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코끼리는 생각하지마'와 '프레임 전쟁'은 이미 읽어본 책들인데, Another world는 조만간 읽어봐야겠네요. '코끼리는 생각하지마'를 읽고 '고민'은 참많이 해봤었는데. 바쁜 일상에 묻혀버리니 책을 읽었을 때의 고민은 샤-악 가셔버렸네요-;; 다시금 붙잡고 읽어볼 마음을 먹어야겠습니다!

  12. 저련 2008.07.31 09:3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문화적 권력에 대한 사유를 그람시에게서 처음 찾을 수 있다는 것은 무리가 있는 주장입니다. 서양사에서 생각해 본다면 교회를 건설한 사도 바울이 새로운 예언자의 모델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무장한 예언자가 센가, 말하는 예언자가 센가는 마키아벨리의 문제제기 이래로 꽤나 논쟁적인 주제입니다. 좌우 이전의, 아주 고전적인 문제라 하겠습니다.

  13. 김동우 2008.08.01 15:5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위 주장에 반대합니다. 선동가라면, 정치가라면 그렇게 해도 되겠지만..얼마나 사람을 우습게 만드는 쌈박한 정치적 구호들입니까. 이런 구호들이 상대 진영의 옳은 목소리들을 듣지 않게 만들기도 합니다. 서로 자극적인 구호를 생산해내는 소비적인 행태에 집중하지 맙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