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를 업어 피란시킨 장만리

공자의 일대(一代)를 그린 그림들이 함양 화림동 계곡 동호정에 가니까 붙어 있었다. 동호정은 기록을 보면 장만리(章萬里)라는 인물의 후손이 장만리를 기리기 위하여 1890년대 지었다. 동호정(東湖亭)에서 동호는 장만리의 호()라고 한다

장만리는 임진왜란 때 임금 선조가 의주까지 몽진(蒙塵)할 때 십수리를 업어간 공적이 있다고 한다장만리는 그 덕분에 전쟁이 끝나고 호성원종공신으로 책봉되었다정작 본인은 이를 못 누리고 1593년 마흔 나이로 피란 도중에 죽기는 했지만

임금의 피란을 뜻하는 몽진은 먼지()를 덮어쓴다()는 말이다. 몽진은 임금이 겪어서는 안 되는 특별한 위기 상황이다봉건시대 임금은 어떤 일이 있어도 먼지나 티끌조차 뒤집어써서는 안 되는 존재였다. 이렇게 보면 선조가 피란길에 오를 때 신하들이 울었다는 얘기가 크게 이상하지는 않다

호성공신과 호성원종공신의 차이

임진왜란이 끝난 뒤 선조는 전투로 이바지한 사람은 선무(宣武)공신으로 삼고 자기 피란에 이바지한 사람은 호성(扈聖)공신으로 삼았다. 거룩한 존재를 뜻하는 성()은 아무래도 임금 스스로를 일컫는 표현이고 호()는 임금을 따라다니며 수발했다는 얘기겠다

공신 호칭에서 원종(原從)은 정()이 아닌 부(), 또는 주()가 아닌 종()이라는 뜻이다. 그냥 호성공신이 더 높고 원종이 가운데 끼여 있는 호성원종공신은 그 아래가 되겠다

그래서 그냥 호성공신은 12231386명 모두 합해 118명이지만 호성원종공신은 1·2·3등이 모두 2475명으로 20배 넘게 많았다

선무공신은 이보다 더하다. 그냥 선무공신은 1325310명 모두 합해 18명이지만 원종이 가운데 끼인 선무원종공신은 그보다 163배나 많은 9060명에 이른다

공자가 태어나는 장면을 그린 그림. 그 때 누가 잉어 같은 물고기를 갖다바쳤나 보다.

호성(원종)공신에 대한 마뜩찮은 눈길

장만리는 그냥 호성공신보다 낮은 호성원종공신이지만 그 가운데서는 가장 높은 1등이라 한다. 호성공신이 선무공신보다 많은 것을 국민이 주인인 지금 대한민국의 눈으로 보면 이해하기 어렵다

하지만 오로지 임금을 주인으로 모시는 왕국이었던 옛날 조선의 눈으로 보면 나름 이해가 된다. 나라를 이루는 핵심이 임금인 만큼 전투에서 이겨 외적을 물리치는 것보다 임금을 다치거나 죽지 않게 잘 모시는 것이 더 중요했다는 얘기다

같은 이유로 호성원종공신이 요즘 눈으로 보면 마땅할 까닭이 없다. 특히 선조는 그 무능과 비겁함이 극심했고 때문에 숱한 백성들이 죽고 다치는 괴로움을 겪었기에 선조를 모신호성공신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래서 나 또한 "임금이 뭐라고", "백성들이 무더기로 죽어나자빠졌는데~" 하는 생각을 깔고 있었다. 백성은 돌보지 않고 임금이나 따라 다니며 뒷바라지한 양반 나부랭이라 생각했다. 백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물리치고 지역을 지키는 것이 훨씬 낫다고 여겼다.  

공자 그림. 주유천하 당시 사실을 다루지 않았을까 짐작되는.

공자 그림은 중국 사대주의일까

사정이 이렇다 보니 공자 일대 그림이 처음 눈에 들어왔을 때 이게 뭐야~~’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던 것 같다. ‘임금에게 충성하는 근왕(勤王)의식에 사로잡힌 양반 선비가 장만리다. 장만리 또한 당대 선비들과 마찬가지로 당연히 사대주의를 품었다

사대주의를 나타낸 그림이 바로 눈앞에 보이는 이것들이다. 동호정이 1890년대 세워졌다니 그렇다면 이 그림은 19세기 후반까지도 양반 선비들이 중국 중심 사고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증거다.’ 그러면서 "참 구제불능이구나, 썩어빠진 선비의 나라였구나~" 이런 생각이 두서없이 떠올랐다

공자가 세상을 뜨는 장면.

세상을 떠난 공자를 장사지내는 장면.

예수 수난 그림은 사대주의가 아닐까

그런데 퍼뜩 다른 생각이 들었다. 천주교 성당에서 흔히 보는 예수 수난 그림이었다. 그런 그림을 그려 놓은 천주교나 개신교 믿는 기독교도도 사대주의자인가? 그냥 종교일 뿐이지 않은가? 서양 종교이니 서양식 사고와 양식이 묻어 있을 수밖에 없기는 하지만

여태 성당 천주교 예수 수난 그림을 사대주의로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렇다면 당연히 유교 공자 일대 그림도 사대주의로 보지 않아야 맞겠다 싶었다. 그래서 그렇게 보지 않기로 했다. 단지 유교 신봉자들이 공자를 대단한 위인으로 섬기는 그림일 뿐이라고 여기기로 했다

"기독교 믿는 사람이 예수를 섬기듯, 불교 믿는 사람이 부처를 섬기듯, 유교 믿는 사람이 공자를 섬기는 것은 당연한 처사다." "공자를 섬기는 것과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는 따로 보아야 한다. 예수를 섬기는 것과 서양(또는 미국)에 대한 사대주의를 분리 구분하여 보아야 하는 것처럼."

그제야 눈에 들어온 조각과 글씨체 

용이 물고기를 물고 있는 조각.

용이 여의주를 입에 문 모습

그러고 나서 둘러보니 다른 글자와 조각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공자 일대 그림에 생각이 얽매여 있을 때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었다

가운데 들보에 새겨져 있는 용머리 조각이 먼저 보였다. 다른 데 정자에서 용은 여의주를 입에 담고 있거나 아니면 그냥 혓바닥만 빼어 물고 있기 일쑤인데 여기 용머리는 둘 가운데 하나가 물고기를 입에 물고 있었다

용도 먹어야 산다는 뜻인지 아니면 용과 물고기 사이 어떤 관련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색달라 보였다. 나는 현실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에 따라 용도 먹어야 산다는 뜻으로 기꺼이 받아들였다.

다음으로는 거기 걸려 있는 한시 목판들 가운데 하나였다. 한자가 원래 형상을 나타내는 상형문자임을 잘 보여주는 글씨체였다. ‘영차일암(咏遮日岩)’이라는 한시였다. 차일암은 동호정 앞 너럭바위를 이른다. 금적암(琴笛岩) 또는 영가대(詠歌臺)라고도 한다.

차일암은 놀기 위하여 햇볕을 가리는 그늘막을 치는 바위다. 금적암은 거문고와 피리 따위 악기를 연주하는 바위다. 영가대는 노래를 읊조리는 바위다. 

첫 줄은 대충 해석하면(물론 맞지 않을 수도 있다.) “홀로 와서 바위 위에 오르니 산이 고요히 나타나고인 것 같다. 둘째 줄도 무리해서 풀어보자면 겹겹이 짙은 흰 구름이 물 위에 가득 어리네정도이지 싶었다

한문 실력이 딸려서 다 알아볼 수는 없었지만 글씨체가 산()은 산처럼 생겼고 상()과 하() 또한 위와 아래가 뚜렷하게 강조되어 있었다. 그 덕분에 한시를 보는 것만으로도 실제 산과 바위를 마주하는 것처럼 느낌이 좀은 전해져 오는 듯했다

그렇게 쳐다보면서 짧으나마 재미있게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손쉽게 볼 수 없는 조각과 한시가 걸려 있는 동호정이었다. 공자 일대를 그린 그림에 옹졸하게 마음을 계속 쓰고 있었다면 그날 보지 못했을 것이 틀림없는 용머리 조각과 글씨체였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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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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