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산 여양리 뼈무덤의 비밀

"비가 억수로 쏟아졌지. 그때가 아마 음력 6월 중순쯤 됐나 몰라. 그러고 나서 한달도 채 못돼 여기서도 전투가 벌어졌으니까."

마산시 진전면 여양리 옥방마을의 박모씨(68)는 이렇게 49년전의 기억을 더듬어 냈다. 

그의 기억에 따르면 진주가 인민군에게 함락되지 전이었으니까 적어도 음력 6월 17일(양력 7월 31일) 이전이다. 

어쨌든 1950년 7월 하순쯤이었던 건 분명한 것 같다. 오전 8시쯤이었다. 

진주시 반성면에서 국도를 따라 10여대의 군용트럭이 흙먼지를 자욱하게 일으키며 발산고개를 넘고 있었다. 

2004년 여양리에서 발굴된 피학살자의 유품. /박일호 기자

트럭 적재함에는 모시한복을 입은 민간인들이 가득 타고 있었고, 그들은 모두 손을 뒤로 한 채 묶여 있었다. 

발산고개를 지난 트럭의 행렬은 봉암리를 지나 양촌리 대정마을로 접어들었다. 

잠시 차를 멈춘 후 지휘관인 듯한 장교가 내렸다. 차림새로 보아 보통군인은 아닌 것 같았다. 

아침 등교길에 이 모습을 목격한 박씨는 그들을 헌병이라고 생각했다. 

그 장교는 지서를 찾았고, 곧이어 전투복 차림의 지서장과 순경들이 달려왔다. 그러는 동안 트럭에 실린 민간인들은 양 사방에서 총을 겨누고 있던 군인들의 명령에 따라 고개를 푹 숙인 채 죽은 듯이 서 있었다. 

"트럭은 적재함 난간을 올려 세운 상태였는데, 사람들이 모두 서 있었어. 트럭 한 대에 약 30여명이 탔으니까 그들이 모두 앉으려면 자리가 비좁았을 거야. 그래서 서 있었던거지." 

지서장과 뭔가 이야기를 나누던 장교는 결심을 한 듯 다시 차에 올랐다. 

"그때 아마 총살시킬 장소를 물색하고 있었던 것 같아. 마산형무소까지 데려가 봤자 죽이려면 다시 끌고 나와야 할테고, 어차피 죽여야 할 사람들이니까 번거러움을 피하자는 생각이었는지도 모르지."

2004년 경남대학교에서 열린 마산 진전 여양리 피학살 민간인 유해 발굴 작업 결과 보고회에서 이상길 교수가‘태인’이라는 이름이 새겨진 도장과 관련 유골·유물을 설명하고 있다./유은상 기자

주민들 시체수습 동원

트럭은 대정마을을 지나 대량·거락·샛담·들담·옥방을 지나 여항산 골짜기로 통하는 둔덕마을 아래 저수지앞에 정차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이곳은 행정구역상 함안군 여항면 여양리에 속했다. 

군인들은 총을 겨눈 채 트럭에 실린 민간인들을 끌어내렸다. 그들은 흰 광목천에 의해 굴비두름처럼 엮여 있었다. 

둔덕마을은 일제강점기 일본인이 경영하던 소화광산이 있던 곳이었다. 당시 이곳은 구리가 났었는데, 해방후에도 곳곳에 폐광이 남아있었다. 저수지 옆 작은 골짜기에는 금굴이라는 폐광이 있었다. 

군인들은 이곳 금굴 근처의 멧등거리(묘지)로 민간인들을 끌고 갔다. 

곧이어 산을 찢어발기는 듯한 총성이 둔덕 골짜기를 가득 메웠다. 

"서울쪽에서 전쟁이 났다고는 하지만 여긴 총소리가 귀할 때였어. 그때까지 이곳에선 전투가 없었거든."(문모씨·71·진전면 양촌리 대정마을) 

"그때 우리는 겁이 나서 집안에 처박혀 있었지. 총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렸지만 누가 나가볼 사람이 있겠어."(김모씨·여·91·진전면 여양리 옥방마을) 

총성에 놀랬는지, 갑자기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 엄청난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핏물이 개울물에 씻겨 내려오기 시작하더라구. 그때 비가 안왔다면 피비린내가 더 진동을 했을거야."

200명은 족히 넘는 민간인들을 이렇게 학살한 군인들은 다시 지서장을 찾았다. 

그에게 죽은 사람의 숫자를 말해주고 "혹시 목숨이 붙어있는 사람이 있을 지 모르니까 철저히 확인사살하라"는 지시를 내린 후 마산쪽으로 사라졌다. 

2004년 여양리에서 발굴된 유골./박일호 기자

명령을 받은 지서장은 그동안 집안에서 숨을 죽이고 있는 마을 사람들에게 동원령을 내렸다. 시체를 치우러 나오라는 것이었다. 

둔덕과 옥방마을의 20세 이상의 남자는 모두 이 일에 동원됐다. 

과연 군인의 예상대로 온몸에 총을 맞고도 그때까지 살아있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그때 시체를 묻어주고 온 시숙이 벌벌 떨면서 ‘목숨이 붙어있던 사람들이 살려달라고 애원을 하더라’면서 엉엉 울더라구. 그런데 경찰이 옆에서 지켜보고 있으니 살려줄 수가 있나. 어휴, 지금도 소름이 끼치네."(김모씨·여·77·진전면 여양리 둔덕마을) 

마을 사람들은 시체끼리 엮어 놓은 광목을 낫으로 자른 후 인근 폐광(금굴)으로 옮겼다. 그러나 시체가 워낙 많아 이내 금굴이 가득 찼다. 굴 입구를 돌멩이로 막은 후 다른 곳에 구덩이를 팠다. 거기에 또 수십구의 시체를 묻고 흙과 돌을 덮었다. 

삼대독자 경찰서 또 총살 

"여름이라 시체썩는 냄새가 워낙 독해 사람들이 코피를 흘릴 정도였다. 시체를 묻은 곳에서는 며칠동안 허연 김이 피어올랐다. 그래서 참다못한 마을 사람들이 며칠 뒤 다시 흙을 퍼 나르기도 했다." 

당시 2차로 지게에 흙을 져 나르는 작업에 참여했다는 박모씨(65·진전면 여양리 옥방마을)는 “요즘도 그들이 묻힌 곳을 지나가려면 꺼림칙한 기분이 든다”고 말했다. 

경남도민일보가 1999년 여양리 학살 사건을 보도한 지 3년이 지난 2002년 태풍 루사로 인한 산사태가 나자 이렇게 유골이 떠내려 왔다. @김주완

주민들의 증언을 종합하면 이곳에서 총살당한 사람들은 진주형무소에 수감돼 있던 보도연맹원들이라고 한다. 

이후 생존자 한명이 사흘간 숲속에 숨어있다가 배가 고파 마을에 내려왔으나 마을사람들은 후환이 두려워 그를 지서에 신고했다. 그는 다시 경찰에 의해 총살됐으나 이과정에서 그는 ‘하동출신의 삼대독자’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이밖에도 당시 군인들이 일러주고 간 숫자가 시체의 숫자와 7~8명 정도 차이가 났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그만큼의 사람들이 살아서 도망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이처럼 둔덕 골짜기의 대학살극은 주민들의 증언에 의해서만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을 뿐 어떤 기록도 남아있지 않다. 당시의 상황을 기억하고 있는 주민들도 모두 60대 중반 이상의 고령이어서 얼마 지나지 않아 영원히 잊혀져버릴 가능성도 없지 않다. 

취재과정에서 만난 70대 할머니 한 분은 기자가 당시 학살사건을 묻자 "그때 비도 참 억수로 왔지…." 하면서 얘기를 꺼내려다가 옆에 앉아 있던 다른 할머니가 옆구리를 툭 치니 갑자기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때부턴 아무리 설득을 해도 "우리는 모른다"며 시치미를 뗐다. 

포기하고 돌아서는데,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런 말이 들려왔다. 

"조심해 이 할망구야. 잡아가면 어쩔려구 그래."

<1999년 10월 26일자 경남도민일보 보도>

김주완 기자 wan@domi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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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김주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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