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호 

<중국인이야기3>


여러 모로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주는 책이었다.


민중의 명령을 청하며, 엉뚱한 짓을 일삼는 것들에게 불호령을 내리겠다<민호일보(民呼日報)>를 창간했다. 47


민호일보사가 문을 닫는 날 워유런은 조계(租界)를 떠나라는 판결을 받고 풀려났다. 감옥 문을 나선 워유런은 여전했다. 이번엔 <민우일보(民吁日報)>를 독자들에게 선보였다. 두 눈을 잃었다는 것을 상징하기 위해 호()의 점 두 개를 뺀 우()로 바꾼 것 외에는 바뀐 게 아무것도 없었다. 47


위안스카이(袁世凱)는 안 의사의 의거를 최초로 보도한 워유런의 언론관을 높이 평가했다. 1년 후 안 의사의 순국을 애도하는 시를 워유런에게 보낼 정도였다. 48


……기밀비를 타가라고 했지만 어디에 쓰라고 주는 돈인지를 몰라 한번도 받지 않았다. ……” 52


…… 수천 년 역사를 보면 너무 청렴한 사람들 때문에 세상이 시끄러워진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감찰원장은 적당히 부패하고 유능한 사람으로 선정해 주기 바란다.” …… 장제스는 듣지 않았다

나도 워유런에게 감찰을 맡기고 싶지 않다. …… 국민당은 썩었다. 혁명정신은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도 없다. 망해도 진작 망했어야 할 정당이다. 거미줄 같은 정당성이나마 유지하려면 이 방법밖에 없다.” 54~55


…… 젊은 시절 지키려고 마음먹은 것들을 이날 입때까지 유지했다. 무슨 일이건 중도에 방향을 잃고 갈팡질팡하는 것은 세상에 웃음거리가 될 뿐이라는 일기를 남기며 흐뭇해했다. 58


몇 차례 유서를 작성하려 한 적이 있었다. 붓을 들었다가 놓기를 반복했다. “나라를 두 동강 낸 주제에 무슨 놈의 유서’. 푸젠(福建)에서 개가 짖으면 타이완의 개들이 화답한다. 서로 험담이나 해대는 우리는 개만도 못한 것들이다. 후손들에게 못난 조상 소리 들을 생각하니 진땀이 난다.” 62


워유런 사망 후 유서를 찾기 위해 …… 워유런의 금고를 열었다. 만년필, 도장, 일기장 외에 대륙시절 조강지처 가오중린(高仲林)이 만들어준 헝겊 신발, 홍콩에 있던 손자의 미국유학을 위해 은행에서 빌린 차용증서 원본이 들어 있었다. 30여 년간 감찰원장을 역임한 고관의 금고치곤 너무 초라했다. 다들 처연함을 금치 못했다. 62

항소심은 천두슈에게 징역 8년 형을 선고했다. 당시 중국은 2심제였다. 평소 문명의 발원지는 연구실과 감옥이다. 두 곳을 오가며 만들어낸 문명이야말로 진정한 문명이라며 입방정을 떨더니 꼴좋다고 빈정대는 자들도 있었지만 극소수였다. 93


쑹메이링은 천두슈에게 느꼈던 인상을 장제스에게 상세히 설명했다. “천두슈를 만나고 나서야 중국이 큰 나라라는 것을 알았다. 표현할 방법이 없는 사람이다.” 95


천두슈를 찾아간 푸더츠는 언성을 높였다.

밖에서는 선생이 여자라면 상대가 누구든지 사리지 않는다고 말들이 많습니다. 대학에 계실 때도 사창가 출입을 무용담처럼 해대시더니 감옥에 와서도 그러시면 우리는 뭐가 됩니까!”

천두슈는 침착했다.

원래 큰 신문은 큰 유언비어를 만들어내고, 너절한 신문은 지저분한 소문을 퍼뜨리는 법이다. 사생활은 남들이 관여할 바가 못된다.”

푸더츠는 열이 올랐다.

선생께서는 한 정당의 영수입니다. 남녀문제가 분명해야 합니다. 매일 찾아오는 젊은 여자는 도대체 누굽니까?”

나는 동지의 부인을 엿본 적이 없다. 또 애인이 있는 여자를 탐낸 적도 없다. 그래서 사창가가 편했다. 판 여사는 나의 반려자다.”

…… 장제스도 정보기관을 통해 보고를 받았다.

그 젊은 여자는 천두슈를 만나는 바람에 신세 망쳤다. 천두슈를 봤으니 다른 남자가 사람으로 보이겠느냐. 모른 척해라.” 100~101


살다 보면 본의 아니게 원수 질 사람이 많이 생긴다. 먼저 찾아가서 사과하는 사람이 이긴다. 나는 그렇게 못해서 이 모양 이 꼴이다. 내 말을 명심해라.” 108


1927년 봄, 중국공산당의 상징이나 다름없던 리다자오가 교수형으로 삶을 마감했다. 유족들은 당장 먹고살 돈이 없었다. 생활비를 지원하자는 측과 리다자오는 정치범이다. 정부와 충돌할 필요가 없다. 동료 교수였지만 선을 그어야 한다는 의견이 충돌했다.

장멍린이 회의를 소집했다. 리다자오를 측은해하던 교수들은 풀이 죽었다. 평소 장멍린은 공산당이라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리다자오와 사적인 왕래도 거의 없었다. 이날 회의에서 장멍린의 이중성이 빛을 발했다.

대학은 정치판이 아니다. 다양한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리다자오는 자신의 사상을 견지하다 교수대에 섰다. 매달 유족에게 위로금을 지급해야 한다.” 이렇게 말하며 표결을 제의했다. 결과는 보나마나였다. 110~111


장멍린은 학비를 납부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대표적인 좌파 학생 아홉 명을 퇴학시켰다. 퇴학당한 학생들에게 익명의 편지가 배달됐다. 동정 어린 내용과 300대양(大洋 : 당시 중국 화폐 단위)짜리 수표가 들어 있었다. 훗날 경제학자로 대성한 첸자쥐도 퇴학생 중 한 명이었다.

나는 아직도 그 돈을 누가 보냈는지 모른다. 적은 액수가 아니었다. 퇴학생들끼리 모여서 분석을 했다. 처음에는 공산당에서 보내준 줄 알았다. 공산당의 재정형편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사회 저명인사들이 모금한 돈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했다. 그들이 우리 이름과 정확한 주소를 알 턱이 없었다. 누군가 장멍린 총장이 아니면 이럴 사람이 없다고 하자 다들 동의했다. 퇴학시킨 사람도 장멍린이고 위험에 빠질까봐 빨리 떠나라고 돈을 보내준 사람도 장멍린이었다. 아홉 명 모두 그 돈을 독일과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지금도 그 때 생각을 하면 눈물이 난다. 선생의 양면성이 그립다.” 114


……고전을 열심히 읽어라. 말 같지 않은 소리도 있지만 배울 게 많다.” 132


모국에 돌아온 우롄더는 부인을 저 세상으로 보낸 다음 날, 페스트 환자들을 살리기 위해 동북으로 떠났다. 그 후 30여 년간 수백만 명의 생명을 구했다. 마스크도 처음 전파시켰다. 총통에 취임한 위안스카이의 고위직 제의를 거절했고, 장제스도 위생부장을 시키려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전염병이 발생한 곳이면 어디든지 달려갔다

중국을 점령한 일본군부가 손을 내밀자 모국을 뒤로 했다. 말레이시아의 시골 의사로 돌아가 쓸쓸한 여생을 마친 우롄더를 생각하면 뭐 이런 놈의 나라가 다 있고, 뭐 저런 사람이 다 있었는지, 생각하면 할수록 복장이 터진다

자신의 명예를 소중히 여겼지만 명예욕은 없는 사람이었다. <슈바이처 평전>도 읽어봤다. 어렸을 때부터 사람을 비교하면 안 된다고 배웠지만, 우롄더와 비교하기엔 좀 그렇다는 생각이 들었다.” 136~137


충칭담판은 국·공 간의 모순을 해결하지 못한 실패한 회담이었다. 그러나 중국인들에게는 미래의 지도자로 누가 적합한가를 저울질해볼 수 있는 기회였다. 두 사람 중 한 명을 선택해야 할 때 가장 결정적인 것은 누가 더 매력이 있느냐다. 담판 기간 동안 대다수의 중국인들은 마오쩌둥에게서 그 매력을 발견했다. 154


3년 후, ·공합작을 파기한 장제스가 공산당원을 숙청했다. 예젠잉(葉劍英)사람을 많이 죽인 정당은 성공할 수 없다며 국민당을 떠났다

저우언라이(周恩來)를 찾아가 입당을 자청했다. “피에는 공짜가 없다. 피 많이 흘린 정당이 집권한다.” 이제 공산당이 틀렸다며, 열성 당원들조차 당을 떠날 때였다. 둘은 50년 가까이 온갖 환난을 겪으며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상부상조했다. 168~169


우리는 수십 년간 바다를 사이에 두고 원수처럼 지냈다. 원수진 집안이 아니면 머리를 맞대고 의논할 일도 없다. 원래 싸우다 지치면 친구가 되는 법이다.”

……

세상에 어려운 일은 없다. 등산하듯이 한 발 한 발 기어오르면 된다.” 188


연금 중이던 덩샤오핑은 방 안에 마오의 사진을 걸어놓고 작은 제단(祭壇)을 차렸다. ‘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심장이 멎었다며 온종일 식음을 전폐했다. 199


정치와 범죄는 그게 그거다. 성공하려면 주도면밀하고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 상대를 혼란에 빠뜨리기 위해서라면 몰라도, 괴팍하고 변덕이 심하면 판단력이 흐려지기 때문이다. 이번 싸움은 먼저 거는 쪽이 진다.” 206~207


권력과 금력처럼 허망한 것도 없다. 아무리 망할 것 같지 않아도, 인심을 잃으면 망하는 건 하루아침이다. 4인방도 그랬다. 226


……지도자의 성격에 의해 좌우되는 정당은 국민들에게 버림받는다.” 243


……최고 권력자의 경호책임자나 비서실장들은 화류계 종사자와 비슷하다. 자신이 모시는 사람 앞에서 쩔쩔매는 고위층들을 아래로 보는 경향이 있다. 말로가 비참할 수밖에 없다. 246


인민은 실패를 반복한다. 새로운 통치자가 등장하면 우리가 바라던 지도자라며 열광하다가 이내 팔뚝질을 해댄다. 박수갈채 보낼 때 가려운 곳을 긁어주지 않으면 별것도 아닌 일로 등을 돌린다. 밥 먹으면서 똥 눌 걱정하는 실무형 지도자가 필요하다.” 246~247


그간 우리의 지도자들은 중국의 지도자들에게 뒤통수 맞는 일이 허다했다. ‘겉과 속이 달라야 세련된 사람이라는 중국인들의 꿍꿍이속을 모르다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273


주유가 제갈량과 같은 시대에 태어난 것을 원망하고, 장제스가 마오쩌둥이라는 적수를 만난 것을 한탄했던 것처럼, 김일성은 만주시절 적대관계였던 냉철한 현실주의자 박정희에게 완전히 판정패했다는 생각이 들었음 직도 하다. 286


……어제 아버지에게 살아 있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보여드렸다. 구할 방법이 없다는 말을 하기에 멀쩡한 기왓장이 되느니 부서진 옥이 되겠다며 작별 인사를 나눴다. …… 대장부에게 실패와 성공은 다반사다. 나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악한 짓은 한 적이 없다. 너와 함께했던 삶을 자축할 뿐, 유감이 있을 리 없다.” 334


루쉰이 교육부를 사직하고 외로운 전사(戰士)로 나설 때 차이위안페이(蔡元培)가 계속해 300은원을 지급하려 했지만 거절했다. 루쉰은 자유로운 사고와 독립된 인격 형성에 장애요소가 무엇인지 가장 잘 아는 사람이었다. 무슨 일을 할 때 남에게 손을 벌리거나 후원금을 요구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루쉰이다. 366


역사의 주인공들은 특징이 있다. 꼼꼼함이라는 기본기 외에 바르고(), 사악하고(), 밝고(), 어두운() 면을 자유자재로 구사했다. 머리구조가 복잡하고, 몇 마디로 정의 내리기가 불가능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위안스카이도 그랬다. 생전과 사후를 막론하고 음모가, 나라를 도둑질한 도둑놈, 위대한 개혁가, 한 시대를 끝내고 새로운 시대를 연 사람, 공화주의자, 황제를 꿈꾼 몽상가등 열거하기 힘들 정도의 저주와 찬양을 동시에 들었다. 403


개혁, 말은 좋지만 성공한 사례가 극히 드물다. 불멸의 업적을 남겼다며 온갖 칭송을 받던 개혁가들 거의가 사람들 머리만 복잡하게 만들어놓고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혁명가들도 마찬가지다. 한결같이 희극이 가미된 비극을 연출하며 삶을 마감했다. 415


정치의 핵심은 이익의 분배다. 섭정왕 짜이펑은 황족의 이익과 황실의 보존에만 안간힘을 썼다. 422

청나라 정부와 개혁을 논하는 것은 어리석다. 호랑이와 호피 값을 흥정하는 것과 같다.” 422


부산에 있던 저우서우천(周壽臣)은 일본인 찻집에서 일하던 조선여인과 초량 일대를 자주 산책했다. 아들이 태어나자 홍콩의 동생들에게 근황을 전했다.

내키지 않는 일일수록 기를 쓰고 해야 한다는 것을 조선에 와서 깨달았다. 우연과 필연을 따지지 마라. 두 개가 뒤엉킨 것이 인생이다. 나는 이제야 조선의 아름다운 산천과 여인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버지에게는 비밀로 해라.” 441


위안스카이가 집권하자 저우서우천은 오래 살고 싶다며 은퇴했다. 위안스카이는 조선에서 알게 된 유미유동 출신들을 국무총리와 부장에 중용했다. 반백(半百)의 저우서우천은 홍콩으로 낙향하겠다며 모든 관직을 사양했다. …… 

저우서우천은 생전에 거북이처럼 장수하고 싶었다는 농담 외에는 낙향 이유를 분명히 밝힌 적이 없다. 대신 혁명은 명분을 내세운 폭력이며 공포를 수반한다. 인간의 삶에는 규칙이 있을 수 없다. 권력과 폭력은 피하는 게 상책이다라는 말을 자주 했다. 442


저우서우천은 ……  195998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정치는 여자들에게 맡기고 남자들은 전쟁과 돈벌이에만 몰두하는 사회가 왔으면 좋겠다는 말을 자주했다. 445~446쪽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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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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