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80년대는 이랬다. 남자는 벼슬이고 권력이었다. 1970년 우리 집은 어느 시골 읍내 장터에 있었다. 국민학교 1학년 때였다. 아침이면 장터에서 남자 어른들 호통 치는 소리가 종종 들려왔다. '어디 여자가 아침부터 남자 앞을 지나가느냐!'고 나무랐었다. 여자는 머리를 숙이고 어깨를 웅크린 채 종종걸음을 쳤다. 다방·술집·식당 같은 데서 일하는 여자들이었다. 어린 우리는 그게 당연한 일인 줄 알았다.

 

장터에는 거지들이 많이 있었다 그 가운데는 여자도 한 명 있었다. 여자 거지는 배가 불러 있을 때가 많았다. 터질 정도가 되면 사라졌다가 얼마 가지 않아 다시 나타났다. 아이는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1976년 이사 갈 때까지 이런 풍경은 내 눈 앞에서 되풀이되었다. 어린 우리는 여자 거지를 따라다니며 말로 놀리고 손발로 때렸다.

 

1979년 어느 대도시에서 고등학교에 들어갔다. 1년 선배 가운데 한 명은 이미 유명해져 있었다. 여학생이 공중전화 부스에서 전화를 하고 있으면 뛰어가서 유리창에 얼굴을 갖다붙이고는 입술을 문질러 댔다. 여학생이 얼굴을 돌리면 유리창을 옮겨 다니면서 그렇게 했다. 지나가는 여학생 치마를 갑자기 들추거나 와락 끌어안기는 예사였다. 우리는 옆에서 낄낄거렸다.


경남도민일보 사진.


19813학년이 되었다. 동급생 몇몇이 이웃 학교 여학생을 윤간했다. 그이들은 같은 서클 회원이었는데 무기정학 처분을 받고는 그만이었다. 우리는 이들이 퇴학조차 당하지 않은 데 대해 아무 생각이 없었다. 경찰·검찰 수사도 받지 않고 법원 재판으로 처벌도 받지 않았지만 이에 대하여도 우리는 별로 생각이 없었다.

 

이런 사회 분위기에서 10대와 20대를 보내면서 나는 먼저 공범자가 되었고 뒤이어 범죄자가 되었다. 나중에라도 이런 분위기를 깨는 데 앞장서지 못했다. 이번에 서지현 검사 성추행 피해 폭로에 이어지는 반응 가운데 하나가 '자기 반성은 않고 문제가 된 검사들 질타만 하는 남성들이 더 가증스럽다'였다고 한다. 부끄러웠다.


지난 40년 남짓한 세월 동안 나로 말미암아 불쾌하거나 불편했던 여자 동료 여자 후배 여자 선배가 없었을까? 아니다. 내 기억에만도 열 번 안팎은 된다. 가해자가 열 번 기억하면 피해자의 기억은 적어도 100번은 넘는다. 나는 반성한다. 다시는 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겠다.


경남도민일보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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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가 직장을 그만두고 수입이 없어지자 아내 태도가 싹 바뀐 경우를 나는 여럿 보았다. 대부분 자기가 갖고 있던 사회경제적 지위를 배경으로 안과 밖 모두에서 여자를 함부로 대했다

반면 여자를 소유물로 여기지 않고 대상화하지 않는 남자는 다른 존재도 나름 배려하고 존중할 줄 안다고 한다. 이런 경우는 말년이 외로워도 죽을 정도는 아니고 가난해도 찢어질 정도는 아니다.


여자에 대해 같은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결심은 고독사를 하고 싶지 않다는 바람이기도 하다. 남자 고독사가 여자보다 3배 이상 많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나는 고독사에서 자유롭다'고 장담해도 괜찮은 남자는 거의 없다.


김훤주 

※ 2월 6일자 경남도민일보 데스크칼럼에 썼던 글을 조금 고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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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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