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은 잊히지만 기록은 역사가 됩니다


정찬우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조선의용군 출신으로 김일성종합대학을 나온 북한의 엘리트였던 그는 6.25 전쟁 발발 직후 조선노동당 부위원장 허가이의 부름을 받고 당 고위직인 영남지방 교육위원 임명장과 김일성 수상의 신임장을 전달받습니다. 그가 받은 임무는 "인민군대를 지휘해 경상남북도의 교육체계를 사회주의식으로 바꿔놓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평양을 출발, 서울을 거쳐 진주를 향해 남하하는 과정에서 전쟁의 온갖 참상을 목격하게 되면서 이 전쟁에 대해 회의를 품게 됩니다. 하지만 그는 인민군 대열에서 이탈하지 못하고 낙동강 방어선에서 치열한 전투,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고립된 인민군 패잔병들의 비참한 도피생활, 어쩔 수 없었던 지리산 빨치산 합류, 이후 토벌군에 붙잡힌 후 긴 포로수용소 생활 등을 겪게 됩니다. 온갖 극한상황도 많았죠. 또한 그런 과정에서 인민군 시절엔 가장 강경한 공산주의자였으나 막상 포로가 된 후에는 반공주의자로 표변하여 동료들을 괴롭히는 악마 같은 인간군상들도 보게 됩니다.


그는 온갖 음해와 모략 속에서도 인간애와 양심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만, 끝내 군사재판에서 10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게 됩니다. 감방 안에서도 역시 수많은 모략으로 죽을 고비를 여러 차례 넘기죠. 그의 이런 이야기는 1960년 4.19혁명 이후 특사로 풀려나면서 끝나게 됩니다.



이렇게 요약한 그의 32년 삶은 안재성의 소설 <아무도 기억하지 않았다>(창비, 2018)에 생생하게 담겨 있습니다. 이 소설을 통해 역사를 전공한 엘리트이자 인민군 고위간부의 눈으로 본 한국전쟁과 패잔병, 빨치산, 그리고 전쟁포로와 수형자의 기구하고 파란만장한 역사를 접할 수 있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이것이 그냥 작가가 지어낸 게 아니라, 실존인물 정찬우(鄭燦宇, 1929~1970)가 남긴 원고지 1000매 분량의 실제기록(수기)을 소설로 옮긴 이야기라는 겁니다.


정찬우는 고문후유증 등으로 마흔을 갓 넘긴 나이에 병명도 모르는 채 숨지는데, 유일한 아이가 생후 5개월밖에 되지 않을 때였다고 합니다. 바로 그 아이가 성장한 후 장롱 깊은 곳에 숨겨져 있던 아버지의 수기를 작가에게 내어 준 것입니다. 마치 <안네의 일기>가 2차대전 당시 독일군의 잔학성과 전쟁의 참상을 고발하는 세계적인 기록물이 된 것을 떠올리게 합니다. 작가가 넘겨받은 원고는 "누렇게 바래고 건조해져 손만 대면 귀퉁이가 떨어져나갔다"고 합니다.


이렇듯 역사는 개인의 기록들이 모여 만들어집니다. 우리는 그동안 역사책에서 한국전쟁을 발발 원인과 전개 과정으로만 봐왔지 이렇게 세밀하게 들여다볼 수는 없었습니다. 정찬우 씨의 기록 덕분에 우리는 어떠한 명분으로도 전쟁은 안 된다는 진리를 다시 한번 깨달을 수 있습니다.


안재성 작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전쟁은 개개인의 이기적인 생존 본능을 극대화시켜 평범하던 보통 사람들을 무서운 괴물로 만든다. 자유평화나 민족해방 같은 그 어떤 위대한 명분을 내세우든 상관없이, 오랜 교육과 훈련을 쌓아온 사회적, 개인적 교양과 양심과 인간애를 근원에서 해체시켜버린다."


부디 이번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적어도 한반도에서 다시는 전쟁이 없도록 영구평화체제가 정착되길 빌어봅니다.


※월간 피플파워 5월호에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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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김주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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