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창간 1주년 기념 심포지엄이 ‘독립언론 왜 필요한가’라는 주제로 9월 2일 10시 서울 한국프레스센터 12층 대강당에서 열린다고 합니다.

제가 깜냥은 안 되지만 토론자로 초청을 받아 그 말석(末席)이나마 끼이게 됐습니다. 저를 빼면 네 분이 토론을 합니다. 제 토론 주제로는 ‘지역 독립언론의 성과와 과제’가 주어졌습니다.

시사인 편집국장 문정우와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원장 이봉수 두 분이 발제를 하도록 돼 있군요. 25일까지 발제문을 보내 달라 했는데 26일 아침에야 토론문을 보냈습니다.

아주 머리를 싸매다가, “토론 전 서로 견해를 거칠게나마 공유하고자 하는 것이니 너무 큰 부담 갖지 마시라.”고 한 데 힘 입어 한 줄 써봤습니다.

한 번 봐 주시기 바랍니다. 잘못된 구석이 있으면 짚어 주시기 바랍니다. 또 잘못되지는 않았다 해도 고치면 낫겠다거나 없애면 더 좋겠다는 대목이 있어도 일러주시기 바랍니다.

돈에서 벗어나면 독립 언론은 가능하다

1. 독립언론은 성립이 안 되는 개념이다
독립 언론, 독립 지역 언론, 그리고 무엇무엇으로부터 독립 따위 주어져 있는 문제의식에 따르면 제가 제대로 뜻한 바를 쓰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초청하는 글에 나와 있는 ‘난장’이라는 말을 믿고, 그냥 저냥 풀어봅니다.(그런데, 제게 주어져 있는 ‘독립 지역 언론’은 과연 무엇입니까? 이런 식으로 칸막이를 친다면 <시사인>은 ‘독립 주간 언론’ 뭐 이런 따위로 일러야 맞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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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지부 집행부 첫 회의 장면입니다. 2007년 1월입니다. 마땅한 사진이 없어서리....

독립이 무엇인가, 혼자 선다는 말입니다. 대부분 사람들이 혼자 서기가 가능한 세상이면 미디어는 있을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제가 알기로는 세상 모든 일이 유기적으로 결합돼 돌아가기 때문에 미디어가 필요하게 됐습니다. 산골짜기나 바닷가에서 자급자족하며 사는 사람한테는 미디어가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여기 독립은 제자리에 서 있지 못한 낱말입니다. 어디에서 벗어나려면(독립하려면) 다른 어디에 기대어야(의지해야) 합니다. 이것이 세상사는 이치가 아닐까요? 무엇의 지배를 받지 않으려면 다른 무엇의 지배(규정이라 해도 크게는 달라지지 않습니다.)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2. 노동(자)에게 복종하자
이런 논리로 따져 들면, 누구의 지배를 받아들일까, 누구에게 자발로 복종할까, 이런 따위가 더 중요해집니다.(물론, 여기서 얘기하는 그 누구가 지배를 해 줄 의사가 있는지, 복종을 받아줄 의사가 있는지는 아직 확인이 되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지배를 하고 복종을 받는 짜릿한 꿀맛을 아직 몰라서 그런 것 같기도 합니다만.) 어쨌거나, 아무 지배도 받지 않고 아무 규정에도 매이지 않겠다는 생각은 공허한 몸부림으로 끝날 개연성이 너무너무 높습니다.

맘대로 쓰지는 않는다, 어떤 사람이 읽어줄 것인지 가늠해 가면서 쓴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를테면, 우리 기자가 기사를 쓸 때도 나름대로 이쁘게 읽어줄 대상을 특정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 마음이란 간사한 것이어서, 뚜렷하게 정해놓지 않으면 때때로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 신문의 사시(社是) ‘약한 자의 힘’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약한 자의 힘이라는 것도 사실은 지내놓고 보니 많이 흔들리더군요. 지면에서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조직력이 센 노조 앞에서는 사용자를 일러 약한 자라고 하는 기자들도 있었습니다. 약한 자의 강한 자에 대한 저항이 격렬할 때에는, 저것이 약한 자의 모습이냐 하는 비아냥을 정색으로 하는 사람들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3. ‘언론인’은 사기꾼이다
제가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언론, 언론인이라고요?’(
http://2kim.idomin.com/17)입니다. 언론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제 글의 요지는 언론이라는 말이 주는, 초월적 제3자라는 느낌, 거기서 말미암기 십상인 선민의식이라든지 특권의식을 버려야 한다는 데 있었습니다. 저는 언론인이라는 말에 두드러기를 느낍니다.
 
말글로 따지기는 하지만 저는 어쨌든 월급을 받는 노동자입니다. 동시에 옛날 조선 시대에 사헌부 사간원 대사헌 같은 언론3사가 누렸던 또는 누리려고 했던 지고지순한 판단 기관의 기관원도 아닙니다.

이를테면 누구의 편을 들어야 옳으냐가 문제이지, 누구에게나 인정되고 그 무엇으로부터 독립해서 올바른 판단을 내리느냐는 문제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물론 그렇게 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그렇게 하(려)는 시늉만 할 수 있을 뿐입니다. 물론 왜 그렇게 편을 드느냐 하는 논리도 중요하기는 합니다.

4. 노동에게 사용되는 노동자가 되고 싶다
그래서 저는 언론을 버립니다. 저는 ‘언론인’이 아닙니다. ‘언론’노동자도 아닙니다. 누구 위에 서서 옳고 그름을 재는 잣대를 쥐고 재단하는 사람이 아닙니다.(‘언론인’들은 여전히 그러고 싶어 하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실은 그런 꼴을 보면 역겨워합니다.) 있는 그대로 얘기하자면 저는 ‘(보도)매체’(media) 종사자입니다. 매체 종사자로서 궁극을 말하자면 누구를 주인으로 모시는 편이 나을까, 내가 가진 세계관과 가치관과 인생관과 일치하는 사용자는 누구일까를 저는 끊임없이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저는 무엇에 대한 독립도 다른 무엇에 대한 종속 또는 복종을 전제로 하고 있다고 말한 셈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독립은 아무런 가치로운 개념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제가 가진 세계관 가치관 인생관으로 말하자면 자본으로부터 독립은 바람직하지만, 노동으로부터 독립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누구나 철부지라고 할 것입니다. 현실에서는 이렇습니다. ‘전경련으로부터도 독립해야 하고 민주노총으로부터도 독립해야 한다.’ 문제는, 이런 정도는, 조중동도 충분히 할 수 있고 또 하고 있다는 데에 있습니다. 겉치레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갖고 있는 정신이 어디를 지향하느냐가 핵심입니다. 근본 어디에 복종하느냐가 사실은 핵심입니다.

5. 신화(神話)의 존재 양식은 관행․관성․무의식이다
저는 대학 4학년 때 신화학(神話學)을 배운 적이 있습니다. 프랑스말로 mythologie라 했던가요? 롤랑 바르뜨를 배웠던 것 같습니다. 신화는 원인과 결과가 없습니다. 원인과 결과가 구분되지 않습니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더라, 입니다. 당연하지, 입니다. 저는 이것을 깨고 싶습니다. 이를테면 <춘향전>의 스토리는 신화적입니다. 또 이를테면 <몰개월의 새>는 신화적이지 않습니다. 왜? 라고 물으면 신화는 깨집니다.

자본주의에서 신화는 무엇일까요? 자본을 중심으로 삼는다는 자본주의 질서를 따르는 모든 것입니다. 자본에 대항하지 않는 모든 것입니다. 자본의 무한한 자기증식을 충족하는 모든 것입니다. 자본주의에 맞서지 않으면 자본주의 세상의 모든 세상살이는 ‘당연한’ 무엇입니다.

이건희는 왜 잘 살아? 원래 그런 거야 인마. 우리 아버지는 왜 못 살아? 가난하니까 가난하지 얀마. 그런 거 따질 시간에 나사나 하나 더 깎아. 나는 왜 좆 빠지게 일해도 만날 허덕거리지? 야 너, 정말, 그러다가 고도일이처럼 불타 죽는 수가 있어. 술이나 마셔라.

자본의 신화가 개개인의 삶과 세계를 관통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저는 바로 관행이라고 생각합니다. 관성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정확한 용어는 아니겠지만 무의식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예전에 양반 지주가 지배할 적에는 양반 지주의 신화도 바로 이런 방법으로 당대를 관통했으리라 저는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관행을 다시 생각하고 관성을 한 번 더 따져보고 무의식을 의식의 수준으로 만들어 보려고 합니다. 관행은 이미 있는 질서를 따릅니다. 관성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있기 이전에 이미 만들어져 우리에게 내장돼 있는 무의식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6. 의식의 해방, 독립된 글쓰기
여기에 맞서는 것이 참된 의미에서 독립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여기에 맞서 보려고 움직이는 것이 참된 의미에서 독립운동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것을 할 수 있어야 독립이라 할 수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것을 할 수 있어야 언론이라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살인 사건을 하나 다루더라도, 아니 더 조그만 절도 사건을 하나 다루더라도 바로 그래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따져보기, 뒤집어보기, 곱씹어보기, 돌이켜보기, 다를 수 있다(아닐 수 있다)고 생각해 보기…….

저는 저에게 주사(注射)돼 있는 자본의 모든 것을 관성 또는 관행 또는 무의식이라 규정하고 싶습니다. 그것이 제대로 안 됩니다. 못 됩니다. 관성인 줄 모르고 관성을 따르는 때가 많고 관행인 줄 모르고 관행을 따르는 때가 많고 무의식인 줄 모르고 무의식을 따르는 때가 많습니다. 관성이 관성인 줄 알고 관행이 관행인 줄 알고 무의식이 무의식인 줄 알면 세상이 달라질 것입니다. 이것을 가능하게 해 주는 자본이 있다면 저는 그것에 복종하겠습니다. 이것을 가능하게 해 주는 노동이 있다면 저는 그것에 복종하겠습니다. 물론, 자본이든 노동이든 아니면 제3자이든 이것을 가능하게 해 주는 무엇이 없다면 저도 그것을 스스로 한 번 만들어 보이는 대열에 함께 서고자 합니다.

7. 마지막으로, 지역 미디어……
지역의 실체는 무엇인가, 사실대로 말씀드리자면 저는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수도권을 떠나 지역에서 산 지가 20년이 넘었는데도 이렇습니다. 미안합니다. 따져보자면, ‘지역에는 실체가 없다.’가 바로 실체인 것 같기도 합니다.

핵심은 두 가지인 것 같습니다. 지역에 실체는 없습니다. 지배하는 실체 없음에 지배당하는 실체 없음이 있습니다. 황당하지요. 지배하는 실체 없음의 실체는 서울입니다. 지배당하는 실체 없음의 실체도 서울입니다. 아고라 경남도 말해주는 바입니다. 나쁜 뜻으로 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이들에게는 이명박만이 관심의 대상입니다. 지역의 여러 ‘양반 지주들’에 대해서는 아무 생각이 없습니다. 지역의 ‘양반 지주들’이 누구인지도 모릅니다.

당연히 자본주의 세상이니까, 지역에서도 지배하는 실체는 자본입니다. 역시 자본주의 세상이니까, 지역에서도 지배당하는 실체는 노동입니다. 저는 지배당하는 실체의 실체를 찾아보고 싶습니다. 지역에서 지배당하는 이들은 자신들을 지배하는 실체가 누군지를 잘 모릅니다. 저는 이렇게 하는 데에 지역을 지배하는 실체들의 작용이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지역 매체들의 작용도 있다고 봅니다.


지역이라는 세상을, 노동(=계급)의 관점에서 해체․분석하고 재구성하는 노릇을 하고 싶습니다. 일면적이 아니라 전면적으로, 부분적이 아니라 총체적으로 하고 싶습니다. 이렇게 하는 데에는 걸림돌이 있습니다. 잘 먹고 잘 살자는 욕심입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가난해지기’를 남 먼저 앞서 실천해야 합니다. 먹고 살 정도조차 되지 않는다 해도, 기꺼이 기자 노릇을 하겠다는 각오가 있어야 합니다.(여기서는 ‘기꺼이’가 아주 중요합니다. ‘기꺼이’는, 기쁘게 그리고 즐겁게, 라는 뜻입니다. ‘마지못해’가 절대 아닙니다.)


김훤주(전국언론노동조합 경남도민일보지부 지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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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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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주완 2008.08.26 12:3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좀 구체적이지 못하고 막연한 느낌입니다. 제가 이해력이 달려서 그런진 모르겠지만...

    • 김훤주 2008.08.26 14:2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딱 맞는 지적이십니다. 다만 문제를 초점에 맞춰 갈무리하기보다는 널리 퍼뜨려 볼 필요가 있겠다 싶어서, 산만하게 한 번 써 봤습니다요. 요약은 다음에 하겠습니당...

  2. 2008.08.26 19:0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 김훤주 2008.08.27 13:2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일부러 그리 했습니다. 미안합니다. 요지는 이렇습니다.

      사회주의 가치를 지향하고 싶다.

      스스로 좀더 가난해져도 좋다.

      (여기서 얘기하지는 않았지만) 생태주의를 지향하고자 한다.(제가 알기로 생태주의는 길거리 돌멩이 하나랑 자기 자신이랑의 값어치를 똑같이 무겁게 여기는 자세입니다.)

      이런 다음에야 연대를 조직을 이야기할 수 있겠다.

  3. 구자환 2008.08.26 20:2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읽으며 나름대로 공감하는 부분도 많습니다만,... 이건 너무 싫습니다.
    '먹고 살 정도조차 되지 않는다 해도, 기꺼이 기자 노릇을 하겠다는 각오가 있어야 합니다'..
    나이가 들면서 점점 불안해집니다. 내 자식조차 아버지를 이해 못할까봐 불안한 것입니다.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고 하죠... 그 불안에 영혼을 잠식당하며 가는 길이지만 여전히 두렵고 싫은 건 어쩔 수 없습니다...그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