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은, 60년대에 태어난 우리에게는 선험(先驗)이었습니다. 경험 이전에 주어진 무슨 당위 같은 것이었습니다. 국민학교 때는 동요 산토끼 가락에 “시월의 유신은 김유신과 같아서~~” 무슨 이런 가사를 붙여 부르곤 했습니다.

특히 여자 아이들이 고무줄놀이를 할 때 많이 불렀고요, 무슨 투표를 할 때마다 제가 살던 경남 창녕군 창녕읍 시골마을까지 어떤 긴장이 느껴지는 분위기였습니다.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출 같은 것 말입니다.

한편으로는, 어른들이 목소리 낮춰 수군대는 분위기도 있었습니다. 큰형은 당시 대통령 박정희가 10월 유신 헌법을 제정해 영구 집권을 하려 했을 때 대학 전자공학과 3학년이었고 79년 제가 고등학교 1학년 때는 대학원에 다니면서 대학에 강의도 나갔습니다.

큰형과 아버지는 “이런 이야기 바깥에 나가서는 하면 안 된다.” 하시면서 말씀들을 주고받았습니다. 주로 권력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들이었습니다. 누구는 박정희 대통령한테 어떻게 말했다가 정강이를 까였고 누구는 중정(중앙정보부)에 곧바로 끌려갔다…….

저는 안 듣는 척하면서 어른들 말씀에 귀를 기울이곤 했습니다. 물론 하지 말라는 얘기라 해서 바깥에서 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저도 큰형이나 아버지처럼, 조심스럽게, 사방 눈치를 살피면서, 친구들에게 ‘이렇다더라.’ 얘기를 해댔지요.

독재자 박정희 흉상

그런 유신이, 1979년 10월 26일 밤에 갑작스레 쓰러졌습니다. 박정희가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은 깜짝 놀랐으나, 어른들 얘기도 좀 듣고 작은누나 덕분에 <창작과 비평>이나 <사상계>도 뒤적인 적이 있는 저는 냉소를 머금었습니다.

유신이 자빠진 10월의 마지막 날인 오늘 31일, 제게 남은 유신에 대한 마지막 기억은 얇디얇은 사람 인심과 관련돼 있습니다. 저는 당시 대구에서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었는데 대구에는 다른 대도시와 마찬가지로 입시학원이 여럿 있었습니다.

가장 크다는 학원 가운데 하나가 이름이 <유신학원>이었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동성로 중심가에서 대봉동 나가는 들머리에 있었는데 행여 아닐 수도 있겠습니다. 이 <유신학원>이 박정희 쓰러지기 전에는 한글로 적혀 있었습니다.

짐작건대는, 박정희 10월 유신에서 따왔다는(그러니까 찬양한다는) 느낌을 충분히 줄만한 이름이었습니다. 당시 박정희는 또 한글 전용까지 밀어붙이기도 했으니까요. 그런데 이것이 박정희 쓰러진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바뀌었습니다.

시내버스를 타고 지나가거나 아니면 걸어서 돌아다니던 한 어름에, 제가 이 학원 이름이 바뀐 사실을 보고야 말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눈여겨보지도 않았고 어떤 의미도 두지 않았겠지만, 제 가슴에는 이것이 아주 날카롭게 찌르며 들어왔습니다.

한글로 쓰여 있던 <유신학원> 간판이 중국글로 바뀌어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10월 유신 할 때 그 ‘유신(維新)’이 아니고, 오로지 유(唯)에 믿을 신(信) 해서 유신이었습니다. 저는 어린 나이에도 “야 참, 이건 아닌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학원 주인이 10월 유신이 옳다는 소신이 뚜렷했기 때문에 학원 이름을 그리했으리라 짐작했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뒤늦게나마 이름을 바꾼 목적이, <유신학원>이 10월 유신이나 박정희하고는 전혀 상관없다고 발뺌하는 데 있어 보였기 때문입니다.

세상 인심 참 야박하구나……, 사람 죽은 지 며칠도 안 돼 저리 이름까지 갈아 치워 버리다니……, 손바닥 뒤집기보다 쉬운 노릇이 바로 아침 이슬 같은 권력이구나……. 어쩌면 제가, 너무 일찍, 세상사는 이치 한 끝자락을 엿보고 말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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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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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미리내 2008.10.31 17:5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 이 후에도 계속 정권에 빌붙어 먹는 사람들은 변한 적이 없습니다. 이 나라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남아 있는 지혜란 외세와 권력자의 눈에 나지 않고 삶을 유지해 보겠다는 얄팍한 기회주의뿐이란 생각입니다.

  2. 실비단안개 2008.10.31 17:5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읽었습니다.
    정신이 상당히 조숙했군요.

    블로그를 운영해봐도 야박한 세상을 느끼지요.
    제가 까칠하게 구는 것 처럼 - ;;

  3. 파비 2008.10.31 19:1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도 생각난다. 지지배들이 고무줄 놀이 할 때 부르던 노래... "시월의 유신은 김유신과 같아서~" 도 생각나고,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를 부르던 지지배들도 생각나고, 우리는 연필칼 들고 고무줄 자르러 다니고...

    78년도인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가 있었는데, 학교에서 선생님들이 각반마다 우리학교 육성회장 찍으라고 집에 가서 부모님께 말씀드리라고 했고, 우리는 유신의 건아답게 시키는대로 했고, 그 육성회장 당선되었지. 요즘 대통령을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들이 뽑았다고 하면 뭔 소린지 잘 모를 걸?

    그런데 그때 그 지지배들은 자기들이 고무줄 놀이 하며 불렀던 노래를 기억이나 할런지 모르겠네.

  4. 장유촌닭 2008.11.01 09:1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김훤주나 김주완이나 이 시대 뺄갱이. 이 뺄갱이 없었으면 나 촌닭은 어디에서 놀았으리..

  5. ㅇㅇ 2008.11.01 12:1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박정희 대통령이 유신 안했으면 지금 대한민국 국민들이
    인터넷에서 손가락이나 꾸물대고 있을 거 같냐
    다들 논에서 똥장군이나 지구 날랐을테지~
    박정희 대통령은 참 대단한 분이다
    욕은 욕대로 먹지만 그 분 아니었으면 대한민국이 이렇게 되진 못했거든
    욕먹을 거 다 자기가 먹고 후대에 태평성대를 물려준 태종이랑 비슷하다

    근데 그 시절에 국민들이 정말 압제에 시달리는 암흑 시대였냐?
    유신이 총칼로 한것도 아니고 적법하게 국민투표 통해서
    찬성률 95%로 통과된 헌법인데 말이야
    유신시절에 유신 때문에 암흑기였던 넘들은 좌익빼곤 없지

    • 김훤주 2008.11.01 13:4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공화국이 무엇인지 모르시는 모양이네요. 공화국은, 좌익이든 우익이든 보수파든 진보파든 다들 잘 어울려 지내는 나라라는 뜻입니다. 우리나라 헌법은 우리나라를 공화국이라 규정하고 있습니다.

      자기 반대파를 짓밟고 깨부수는 사람을 일러 독재자라 합니다. 독재자는 모두가 함께 어울려야 하는 공화국의 적입니다. 그러니까 공공의 적이라 일러도, 전혀 틀리지 않습니다.

      박정희 같은 인간을 두고 하는 얘기입니다. 박정희 같은 인간을 대단한 분이라고 존경하는 이들은, 거두절미하고 말하자면 "인간 같잖은 존재들"입니다.

    • 꾼,, 2008.11.03 13:3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공화국이 우익,좌익,보수,진보등이 잘 어울려 지내는 뜻 이라? 누가 그러딥까? 몇페이지 몇째줄 입니까? 선무당이 사람잡고,반풍수가 세상 뒤집는겁니다.

    • 김훤주 2008.11.08 22:1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꾼,,님. 제가 보기에는 꾼,,님이 바로 선무당이고 반풍수 같은데요. '공화'에 대한 단세포보다 못한 천박한 이해를 바탕으로, 스스로에 대해서는 돌아보지도 않는 자세로 이러쿵저러쿵 얘기하는......

    • 어이구 2008.11.10 12:1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때 박정희가 아니라도 경제는 발전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럼 자네말은 사람죽여가면서 까지 나라경제살리는게 옳다고 보는것인가? 자네가 그럼 죽어볼텐가 그시절에 살았다면? 내 장담하건만 자네같은 사람은 절대 그럴사람이 아니란걸 알아.

  6. 찌찌리 2008.11.01 14:1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엿부러지는 소리하지말고 그시간있으면 열심히 일하고 애국해라 지금도 서로간에 싸우는데
    오죽 했으면 그리 햇것나 이런 글을 쓰기전에 니 가슴에 손을 대고 깊이 반성해라 등신들
    이런글 쓰면 누가 책 나가니 ㅋㅋ

    • 김훤주 2008.11.01 15:1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냥 글이 싫으면 싫다고 하시면 됩니다. 스스로 단 이름에 걸맞게 제발 '찔찔'거리지 마시고요.

      그리고 오늘 여기서 입으로 지은 죄에 대해서는 정구업진언(淨口業眞言)으로 씻어내시기 바랍니다.

  7. 파주 2008.11.02 07:4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초등학교에서 10월 유신 찬성 포스터를 작성해서, 동네 방방곡곡에 붙이려 다녔던 일을. 그때 그게 뭔지 전혀 몰랐었습니다. 선생님들이 시켜서 한 일이었죠. 순진한 어린학생까지 영구독재 집권에 강제동원했었던 폭력정권이었죠.

  8. ㅇㅇ 2008.11.02 11:1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공화국이 좌익 우익 다 같이 어울려 살아가는 나라래 ㅋㅋㅋ
    이런 정의는 또 처음보네 공화국은 왕정의 반대말이야
    공산당이 지맘대로 철권통치했던 소비에트도 공화국이고 정일이 나라도 공화국이다 알간
    좀 기초적인 상식은 머리에 집어넣고 블로그질 하자 ㅇㅋ?

    박정희가 공공의 적이면 유신헌법 찬성했던 95%의 국민들도 다 적이냐?
    다 지나고 나서 선대가 물려준 모든 혜택을 마음껏 누리며 입으로만 남욕 하는 건 쉬워
    누구나 할 수 있는 비겁한 일이지
    은혜는 모르고 입으로 뒤통수치는 위선자들을 우리는 똥.떵.어.리라고 부른다
    똥덩어리~

    • 김훤주 2008.11.08 22:1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공화의 뜻이 무엇인지 한 번 제대로 알아보시죠. 왕정의 반대말이 공화정이다, 하는 정의는 굉장히 천박한 것이지요. 특정 계급 또는 집단이 독재를 하지 않는다, 구성원 전체의 뜻에 따라 정치를 한다, 이런 것이 바로 '공화'랍니다. 하하하.

    • 김훤주 2008.11.08 22:2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울러, 선대가 물려준 모든 혜택? 부정부패? 민주주의 파괴? 정치 군부 암약? 특권집단 형성? 정당정치 폐기? 빈부격차? 간접세 중심 세제? 도대체 무슨 혜택을 얘기하시나요?

      공론을 통해 이룩한 95% 찬성인가요? 당시 열 살 안팎이던 저조차도 느껴질 정도로 살벌한 상태에서 치른 선거였어요. 박정희가 공공의 적이 아니면, 도대체 누구를 일러 공공의 적이라 할 수 있지요?

      위선자를 똥덩어리라 하든지 아니면 똥떵어리라 하든지 그것은 그 쪽 자유지만, 이것 하나는 분명합니다. 온갖 것을 다 빼앗아가고 결국에는 생각까지 없애버리려는 독재자 지배자의 실체를 제대로 알아보기는커녕, 그냥 아무 보람이 없으면서도 고맙다고 똥구멍이라도 핥을 듯이 덤벼드는 이를, 많은 사람들이 <노예>라고 하지요.

    • 이보시오 2008.11.10 12:1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러니까 헌법제1조에 우리나라는 민주 공화정이라고 명시되어 있잖소; 민주적으로 해야지 그렇게 독재를 하면 되나? 생각이 있는건지 없는건지? 헌법조문좀 봐보시오 제발....당신같은 사람들 때매 발전이 없는것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