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들이기와 편가르기를 넘어’는 박노자와 허동현의 논쟁을 담은 세 번째 책입니다. 이들은 이미 2003년 ‘우리 역사 최전선’, 2005년 ‘열강의 소용돌이에서 살아남기’에서 친미와 반미,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근대와 전근대 등 한국 근대 100년을 아로새긴 여러 풍경을 두고 토론한 바 있습니다.

박노자와 허동현은, 두 사람이 같이 쓴, 들어가는 글에서 ‘역사는 해석일 뿐이다.’고 못박았습니다. 관점이 다른 우파와 좌파가, “기초 사실에 대한 합의는 볼 수 있어도 해석과 서술은 각자 정치·사회적 성향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라고도 했습니다.

이처럼, 성향이 달라서 역사도 다른 이 두 학자가 그럼에도 책을 함께 펴낸 까닭은 무엇일까요? “서로가 좌우 성향의 차이를 인정할 경우 미래를 향해 같이 나아가야 할 ‘시민’ 모두를 위한 ‘총체적’ 역사 쓰기는 가능하다.”고 믿기 때문이랍니다. “차이를 적극 인정하고 토론을 통해 시민 스스로에게 ‘선택’의 권리를 주는, 그런 ‘다원적’ 역사가 가능하다는 말이다.”

그러려면 전제 조건이 필요하겠지요. “둘 다 ‘절대적 진실’에 대한 집착을 버리겠다는 의지의 수립”입니다. 또 있습니다. “배타적·자아 중심적 태도를 버려야 한다”. 이것으로도 충분하지는 않습니다. “‘나’와 의견이 완전히 다른 상대방에게서도 ‘진실의 일말’을 적극 발견해 보려는 관용의 자세를 가져야 한다.” 이를 일러, ‘소통’이라 할 수 있겠지요.

한국 근대 100년을 두고
펼쳐 보이

좌파 박노자와
우파 허동현의 논쟁

이런 전제를 갖춘 두 학자는, ‘길들이기와 편가르기를 넘어’에서 근대 100년의 지식인, 여성, 대중문화, 종교를 다룹니다. 지식인에서는 이광수와 ‘민족개조론’, 여성에서는 매춘 여성과 신여성, 대중문화에서는 한류와 영화, 종교에서는 무속과 기독교와 불교가 중심 얘깃거리로 나옵니다.

이광수를 다룬 대목만 보기로 들겠습니다. 이 글을 보시고 궁금증이 일거나 재미가 느껴지거나 아니면 마뜩찮거나 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어쨌거나 제 끼적거림이 충분하지 않다고 여겨지시면, 나머지 대목까지 몸소 읽어보십사 말씀드리렵니다.

박노자는 “이광수가 수수께끼인 가장 큰 이유는 너무나 다른 두 모습이 동시에 보이기 때문”이라 합니다. “하나는 애정 문제 탐구에 몰두도 하고 부처의 자비와 예수의 사랑을 애써 본받으려는 과민한 구도자 모습이고 다른 하나는 힘과 살인과 ‘황인종의 단결’을 예찬하는 친일 파시즘의 특색이 강했던 국가주의자 모습입니다.”

이어 박노자는 “물론 이 둘을 완전히 다르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근대’, ‘민족’이라는 공통분모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라 덧붙였습니다. 그러면서 “모순적 사상과 이념의 혼재라고 해야 할까요? 아니면 표피적으로 내세우는 지적 장식품들과 핵심으로 삼았던 이념 사이의 거리라고 해야 할까요?”라 묻습니다.

답은 무엇일까요? “주된 신조는 바로 사회진화론의 ‘적자생존’, ‘약육강식’입니다. 그러나 어린 시절 공부할 때 품었던 ‘인류애’의 이상을 완전히 폐기처분하지는 않습니다.”고 앞자락을 깔았습니다.

그런 다음 “이광수는 ‘임금의 은혜’를 부처나 부모의 은혜, 그리고 뭇 중생의 은혜보다 더 높은 위치에 올립니다.”고 하면서 “‘계급’을 아예 ‘이기적 욕망의 결과물’로 치부해 배제하고 ‘개인’을 개인 그 자체가 아닌 하나의 부속으로만 인식한다면 이와 같은 비극적 결과는 거의 필연”이라고 짚었습니다.

이광수에게는 “국가가 당연히 존재해야 할 ‘문명의 단위’이자 ‘국민’이 당연히 충성해야 할 대상”이었다는 것입니다.(이런 국가가 박노자가 보기에는 ‘소수 지배자들이 대다수를 분류, 통제, 착취, 우민화하는 폭력단체’일 뿐이랍니다.) 그러니까 국민에게 국가나 임금을 위해 희생 봉사 사랑하라고 다그치는 꼴로 간다는 얘기지요.

허동현은 어떻게 여길까요? 아예 전제부터가 다르답니다. “‘민족’과 ‘민중(계급)’ 같은 거대담론을 내세워 어느 쪽이 역사의 주도권을 쥐는 것이 정당한가를 다툰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던 냉전 시대의 이분법적 평가는 이미 유효기간이 지난 것이 아닐까요?”

이렇게도 말합니다. “이광수가 일관되게 추구한 가치는 국가주의 내지 민족주의였고, 기독교나 불교를 비롯한 여러 사상들은 민족과 국가에 유익한지 않은지에 따라 취사선택했던 종속적 가치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한 얼굴로는 종교적 사랑을 예찬하고 다른 얼굴로는 일그러진 근대를 찬양한, 두 얼굴의 야누스적 존재이기보다는 ‘민족’이라는 실에 자신이 삶의 궤적에서 만난 다양한 사조라는 구슬을 꿴 일관된 민족주의자로 보는 편이 합리적”이라는 말이지요.

이를테면, 이광수는 ‘민족을 위한 친일’을 선택한 ‘확신범’인 만큼, 그이를 지금 관점에서 그리고 친일이냐 아니냐로 단순명쾌하게 단죄하기보다는 “‘민족을 위한 친일’의 논리구조를 파헤치고, 필경 시민적 자유의 적이 될 ‘우리 안의 파시즘’의 어두운 그림자를 지우는 데 힘을 보태는 것이 오늘의 우선과제”라는 주장입니다.

우리 사회 지적 풍토에서 이런 서로 생각이 다른 좌파와 우파 학자의 논쟁이 상큼하게 받아들여집니다. 이처럼 둘 사이에 논쟁이 가능한 까닭은 무엇일까요? 박노자와 허동현은 논쟁이 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박노자와 조갑제는 아무래도 논쟁이 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박노자와 허동현은 그래도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박노자와 조갑제는 전혀 공통점이 없습니다.(물론 둘 다 ‘국적은 대한민국’이라는 공통점은 있습니다만.) 조갑제는 아마도, 전체주의를 절대 지향한다는 면에서, 이러면 이광수가 화를 낼는지도 모르지만, 이광수와 좀 닮아 있는 그런 느낌을 줍니다.

말하자면, 박노자와 허동현은 지향하는 바가 ‘개인의 자유’라는 점에서는 같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지금’ ‘여기서’ 개인의 자유를 확보하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두 사람이 다릅니다. 이런 공통점이 있기 때문에, 이들이 ‘길들이기와 편가르기를 넘어’ 전편에 걸쳐 논쟁을 벌일 수 있겠지요.

물론 차이점도 있습니다. 다르니까 논쟁이 되겠지요. 박노자는 근대 100년을 근대국가 만들기와 선진국가(민족) 따라잡기에 종속된, ‘국민 만들기’ 프로젝트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국민과 민족이라는, 우리에게 강제된 허상을 깨는 것이 당면과제가 되는 것이랍니다.

반면 허동현에게 근대 100년은 ‘친일’이냐 ‘반일’이냐, ‘친미’냐 ‘반미’냐, ‘민족’이냐 아니냐, 민중(계급)이냐 아니냐 따위로 편을 가르는 시대입니다. 따라서 집단이 아니라 개인에게서 어떤 필연적인 작동 논리를 찾아내어 드러내 보이는 것이 당면과제입니다.

박노자는 ‘길들이기’를 없애 버려야 개인의 자유가 가능하다 하고 허동현은 ‘편가르기’에서 벗어나야 개인의 자유가 이뤄진다 하는 것입니다. 이런 두 관점이 어떤 사안 무슨 쟁점에서 어떻게 충돌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맞물려 돌아가는 궁금하시지 않은가요? 같으면서도 다른, 이 두 학자의 ‘소통’에 끼어들어 스스로도 한 번 ‘소통’을 해 보고 싶지는 않으신지요?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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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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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주완 2009.03.05 18:4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좌우의 논쟁이라...좋은 일이긴 한데, 이 책에 있는 다른 논쟁도 이광수에 대한 그런 것들이라면, 어쩐지 관념의 유희...또는 말장난 같은 게 아닐런지 하는 생각도...
    다른 논쟁의 주제는 어떤 게 있는지 궁금하네요.

    • 김훤주 2009.03.05 22:1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어째 기백이 대단하지 않다는 느낌은 저도 받았습니다만, 이어 나오는 여성과 대중문화 종교에서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사실은 제가 다 읽지는 못했습니다. 미안합니당. 그래서 나머지 부분은 나중에 올릴게요.)
      여성에서는 매춘 여성과 신여성, 대중문화에서는 한류와 영화, 종교에서는 무속과 기독교와 불교를 다룹니당.

      고백하자면, 이 글은 사실, 저 개인의 취향이 많이 작용한 것입니다. 저는 이 책에서 이광수 부분을 읽을 때에, "관점이 어떻게 다르기에 해석이 그토록 달라질까" 하는 데 관심이 좀 많이 가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