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의 달인'이랄 수 있는 소설가들, 그렇지만 그이들도 잘못 알거나 또는 모르고 쓰는 잘못된 표현들은 없을까요? 그이들의 잘못된 문장 표현을 사정없이 헤집는 글이 한 문학 잡지에 기획 연재되고 있어 여러 사람 눈길을 끌고 있습니다.

계간 <문학수첩>이 2008년 봄호부터 연재해 올 봄호로 다섯 번째를 맞은 문학칼럼 '권오운의 우리말 소반다듬이'가 바로 그것입니다. 권오운(67)은 66년 등단한 시인입니다. 시집 <원님 전상서>말고도, <알 만한 사람들이 잘못 쓰고 있는 우리말 1234가지> <우리말 지르잡기> <작가들이 결딴낸 우리말> 따위를 펴낸 바 있답니다.

'소반다듬이'는 사전에 '자그마한 밥상 위에 쌀이나 콩 따위 곡식을 한 겹으로 펴 놓고 뉘나 모래 같은 잡것을 고르는 일'이라 돼 있습니다. 우리말답지 않은 표현이나 낱말을 걸러내자는 얘기입지요. 2009년 봄호 '소반다듬이'는 "'초가를 올린 토담집'은 이층집인가?"가 제목입니다.

1. <문학수첩>을 통한 권오운의 분투 노력

김연수의 <밤은 노래한다> 김숨의 <침대>·<철(鐵)> 서하진의 <착한 가족>이 불려나왔습니다. 제목에 올린 '초가를 올린 토담집'(김연수)을 두고 권오운은 "두부 먹다 이 빠진다고는 해도 어찌 이런 실수를 할 수 있을까 싶어서 눈물이 다 찔끔 나올 뻔했다"고 합니다.

"초가(草家)는 짚이나 갈대 따위로 지붕을 인 집이다. 그렇다면 토담집 위에 초가집을 올렸으니 그 집은 이층집인가?" 물었습니다. 그런 다음에 "'초가지붕을 올린', '이엉을 올린', '이엉으로 지붕을 인' 토담집이라면 되리라"고 바로잡았습니다.

김숨은 '탕비실'에서 걸렸습니다. "'탕비'는 일본어 '유와카시'로 '물을 끓이는 주전자'이다. 역겹기까지 한 이런 일본어를 통짜로 주워다가 떳떳이 쓰고 있는지 놀라울 따름이다. 두 페이지에다 열두 번이나 '탕비실'로 환을 쳐놓았다." 권오운은 내친 김에 '일본어를 거침없이 즐겨 쓰는' 손홍규도 불러왔습니다.

"뜻도 제대로 모르고 써서 읽는 사람을 놀래주는 백미는" "쇠파이프나 사시미를 든 시내파의 새파란 녀석들이 오함마나 빠루를 든 시외파의 중늙은이들을……"(단편 '상식적인 시절')이랍니다. 하하. 권오운은 "건달들이 왜 생선회를 들고 달려갔을까"라며 "어쩌다가 '회칼' 대신 '사시미'를 들이댔는지 복장이 터질 일이다"고 붙였습니다.

서하진도 마찬가지라네요. 꼬집는 대상은 "툭 던진 포망으로 엄청난 것을 낚아 올린 어부"와 "숨을 참고 조심스레 호흡을 뱉었다"입니다. '포망'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조어라며, "'툭 던'졌다는 걸 보면 '투망'이 제격인데 그것은 또 '낚아 올린'이 발목을 잡는다. '투망'은 결코'낚아 올'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고 훑었습니다.

뒤엣것은, 따져보니 오히려 더하네요. "'코나 입으로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는 일'이 '숨'이요, '숨을 쉼'이 '호흡'이다. 그런데도 '숨을 참고 호흡을 뱉'으라니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린가! 말뜻대로 풀어보면 '숨을 멈추고 숨 쉬는 것을 뱉'으라는 꼴이 된다"고 짚었습니다만.

2. '똥 진 오소리'를 싫어하는 너구리들

이렇게 날카롭게 따지니 불만을 품는 이가 적지 않은가 봅니다. 그래서인지 2008년 겨울호 네 번째 '소반다듬이'는 이를 두고 "이치적으로야 어불성설이지만 오랜 세월 입에 오르면서 글자 그대로의 뜻보다는 새로운 뜻을 더해 관용어구로 정착한 말 그리고 거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간 수사"라 한 '한 신문 어문전문기자'에 대한 반론으로 시작됩니다.


권오운은 "설익은 표현을 밥 먹듯 하는 작가나 이를 덮어주려는 세력들은 반론을 제기할라치면 으레 '케케묵은 문법적 잣대'라면서 '수사적 표현'이라는 치마폭 속으로 기어들고는 한다"고 싸잡아 나무라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신경숙을 보기로 데려 나왔습니다.

"신경숙은 '발자국을 들고 걷는다'(단편 '멀리, 끝 없는 길 위에')고 쓴 적이 있다. '발자국을 들고 걷다'니! 이것도 '수사'인가? 왜 아예 '발자국을 이고 걷'지 그래. 닭발을 그려도 '수사'요, 환칠을 해도 '수사'인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다"며 한숨을 내쉬네요.

그러고는 "도나캐나 '관용어'로 치부해주고 콩이나 팥이나 '수사적 표현'으로 싸고 돈다면 우리의 문장은 도끼 삶은 물이 되고, 글쓰기는 도투마리 잘라 넉가래 만들기가 되리라"고 덧붙였습니다. 이러고 보니까 권오운은 지난해 봄호 연재를 시작할 때 스스로 말한 것처럼 '똥 진 오소리' 꼴입니다.

똥 진 오소리는 '오소리가 너구리 굴에 함께 살면서 너구리 똥까지 져 나른다는 데서, 남들이 더럽다고 안 하는 일이나 남 뒤치다꺼리를 도맡아 하는 사람'을 이르는 놀림조 말이랍니다. 사전에도 그리 나옵니다. 이 60대 오소리를, 많은 문인 '너구리들'이 탐탁하게 여기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이런 권오운의 '똥 진 오소리' 노릇이 독자들에게 보람을 주기는 하겠지요. 그렇다면 그것은 특히 이름난 작가를 맹신·추종하는 데 대한 경종일 것입니다. 그이들 문장 표현을 격물치지해서 따져 읽고 맞는지 아닌지 줏대 있게 판단하라는 얘기입니다.

독자로서는, 자기가 좋아하고 또 감동을 안겨준 작품을 써낸 작가들이 호되게 추달을 당하니까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하겠지만, 한편으로는 무턱대고 빠져드는 그런 경지에서 벗어나 일정하게 거리를 두고 객관화할줄 아는 깜냥을, 사람에 따라서는 얻기도 할 것입니다.

3. 박완서 이청준 조정래 이문열 김훈 은희경 성석제……

그래서인지 전체를 통틀어 자잘한 것은 버리고 굵직굵직한 거리를 중심으로 살피면 '원로', '대가' 박완서가 가장 앞에 세워져 있습니다. 2008년 봄호에서 다룬 박완서의 <친절한 복희씨>. 특정 낱말 하나를 쓰지 않는 바람에 글의 숨결이 가빠졌음을 보여준답니다.

"산 닭 한 마리 골라잡으면 최소한 모가지를 비틀어 잡아준다거나, 부탁하면 가게 연탄불에 얹어 놓은 양은솥 끓는 물에 슬쩍 데쳐 내어 털을 깨끗이 뽑아주게 되어 있었다." 그러고는 이 원문을 반박합니다. "생닭 파는 데서 '모가지를 비틀어' 닭 잡는 사람은 거의 없다. 닭은 멱에 칼을 찔러 숨통을 끊는다.

다음으로, 털도 안 뽑은 닭을 '데치다'니 천부당만부당하다. '잡은 새나 짐승을 끓는 물에 잠깐 넣었다가 꺼내어 털을 뽑다'는 '데치다'가 아니라 '튀하다'이다."
바로잡기가 이어집니다.

"고쳐 보면 '산 닭 한 마리를 고르면 잡아주기만 하거나(튀하지 않고 죽여만 주는 경우가 있는지도 궁금하다) 깨끗이 튀를 해주게 되어 있었다'가 된다. '튀하다'를 쓰지 않으므로 가게, 연탄불, 양은솥, 끓는 물, 데치다, 털을 뽑다 따위로 숨이 넘어가게 주워섬겨야 되게 되었다."

이청준의 <그곳을 다시 잊어야 했다>도 걸렸습니다. 권오운은 이청준의 지나친 명사화 작업을 먼저 비판을 했네요. "게으름 부림이 아니었음, 헛수선 떨기처럼, 신세짐 없이, 어둠까지의 시간 바뀜, 옷 벗음과 떠남" 등. 그러고는 "초심자가 이런 짓을 했다면 아마 누구라도 혼쭐냈으리"라 한 마디 얹었습니다. 적절합니다.(제 생각에)

막간에는 조정래도 불러낸답니다. "사실 이 작업의 대가는 조정래다. <태백산맥>에는 누구도 따를 수 없는 명품(?)들이 즐비하다. 목메임을 느꼈다. 길닦음을 했다. 여자들의 입모음이었다. 참새가 자리옮김을 했다. 가시가 엇갈림하여 돋았다. 꽃들이 꽃피움을 했다. 이쯤 되면 가히 만화방창이로세!"

본디로 돌아와 이청준. "'참대 엮음 사립'에 이르러서는 그만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이건 좀 심하다. '참대 사립'이면 그만 아닌가? '사립'이란 무엇으론가 '엮어' 만들게 마련이다. '엮음'을 넣을 필요는 없다. 아니 넣어서는 말을 망치고 만다. '쌀밥'을 '쌀 끓임 밥'이라 한 것과 뭣이 다른가."(저는 이 쌀 끓임 밥에서 폭소를 참지 못했습니다만. 우하하.)

이문열 <호모 엑세쿠탄스>에 나오는 "온 힘을 눈시울에 모아 눈을 뜨자 이번에는 눈꺼풀이 열렸다"도 딱 걸렸습니다. "'눈을 뜨고 나'니 그때에야 '눈꺼풀이 열렸'는가? '죽고 나니 숨이 끊어졌다'는 꼴이나 다름없다. '온 힘을 눈시울에 모으자 이번에는 눈꺼풀이 열렸다'면 될 것을."

<칼의 노래>로 크게 이름을 얻은 김훈도 2008년 여름호를 통해 <남한산성>에서 허방이 잡혔습니다요. "매틀에 묶여 있을 때 말이 비벼지면서 매는 더욱 가중되었다. (……) 김류의 수하들이 이시백을 곤장틀에 묶었다. 이시백은 형틀에 엎드렸다."

권오운은 매틀을 두고 "매를 때리는 틀이라고 붙여본 모양이나 엉터리 조어"라며 매틀은 '맷돌이 흔들리지 않도록 괴어 받치는 세 가닥으로 벋은 나뭇가지'를 이른다고 했습니다. 또 '곤장틀'은 아예 없고 "'죄인을 엎드리게 하여 팔다리를 묶던 틀'은 '장판(杖板)'·'장대(杖臺)'라 한다"고 쐐기박은 다음 "'형틀(刑-)'은 '죄인을 앉히는 의자같이 생긴 형구(刑具)'로 주리를 틀 때 쓴다. 이런데도 형틀에 엎드렸다니 기가 막힌다"고 덧붙였습니다.

은희경 소설집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에 나오는 "미소년 둘이 바람머리를 흔들며 싱그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도 잘못으로 지목됐습니다. "'바람머리'는 '바람만 쐬면 머리가 아픈 병'이다. '흔들었다'니까 머리칼의 어느 부위나 모양새임이 분명하다. 여자들 '애교머리'는 아닐 테고 '더펄머리'나 '덩덕새머리'는 아닐까? 아니면 '바둑머리'나 '풀머리', 그도 아니면 '이맛머리'는 아닐까?"

2008년 가을호에서는 성석제 단편 '저만치 떨어져 피어 있네'도 호출이 됐습니다. "줄 빚이 있는 사람은 문상도 오지 않았고 받을 빚이 있는 사람들은 화장터까지 쫓아왔다"는 문장이랍니다. 권오운은 이를 두고 "읽으면 읽을수록 웃음밖에 안 나온다. '남에게 갚아야 할 돈'이 빚이다. 그런데 '줄 빚' '받을 빚'이라는 말이 어디 있는가. 예문은 차라리 '빚' 대신 '돈'을 써서 '줄 돈' '받을 돈'이라 하면 시원해진다"고 했습니다. 

4. 김병익 김윤식 등의 주례사 비평도 씹고

권오운의 오지랖 넓은 '똥 진 오소리' 노릇은 원로 또는 대가에 대한 거침 없는 비판을 넘어서, 문단에 고질이 되다시피 한 '주례사 비평'에 대해서도 은근하지만 따갑게 꼬집는 데까지 나아가고 있습니다.(왜 이리 시원한지)
 '튀하다'는 낱말을 몰라서인지, 괜히 생닭을 털도 안 뽑고 '데쳤'다가 혼쭐이 난 박완서에 대한 주례사 비평은 이렇게 처리했네요.

"'박완서의 문장은 (요즘 들어) 빠른 속도감을 보인다'는 김병익의 덕담을 다시 곱씹어 본다"라고……, 말입니다.
 이청준에 대한 주례사 비평도 마찬가지 '그윽하게' 처리했습니다. "'하늘과 땅이 하도 아득하여 앞이 보이지 않을 때, 제일 먼저 보고 싶은 것의 하나가 이청준 씨 소설이오.' 김윤식이 이청준 소설집에 부치는 헌사다. 나도 그의 소설로 잃어버린 소설 읽는 재미의 절반을 되찾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웃음을 참을 수 없게 만들기도 하네요. 2008년 봄호에 나오는 '스토리'입니다. "몇 해 전, 이름난 한 문학상의 심사위원 한 사람은 그해의 수상작을 두고 '끌로 바위를 쪼는 듯한 눈부신 묘사'라는 극찬을 퍼부은 적이 있다(실은 '바위를 쪼는 것'은 '끌'이 아니라 '정'인데도 말이다).

그런데 그 수상작의 첫대목은 어처구니없게도 이러했다. <
여자는 콩깍지를 까고 있다. 깍지를 비틀 때면 벌어진 껍질 사이로 얼굴무늬의 강낭콩알들이 나란히 나타난다.> '콩깍지를 까다'니? 빈 껍데기를 왜 깐단 말인가? 소가 웃을 일이다. '여문 콩을 다 털어낸 빈 껍데기'가 '콩깍지'인 줄 모르고 저지른 해프닝이다. 과연 눈부신가?"

웃음보가 터지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문학상 수상자가 '콩깍지'의 뜻을 잘못 알았고, 더 나아가 '콩꼬투리'라는 낱말을 제대로 몰라서 생긴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만.

2008년 가을호에는 정영문이 나옵니다. 정영문은 지난해 '목신의 어떤 오후'로 제32회 이상문학상 우수상을 받은 소설가라고 합니다.

"정영문은 이미 2002년, '예전 같았으면 영락없이 서투른 번역투라는 비난을 면하기 어려웠을 문장'이라는 나의 면박을 받은 바 있다. 그러나 '독자에게 쉽사리 다가갈 수 있는 취향은 아니지만 우리 문학에 꼭 있어야 하는 하나의 구색으로서의 독특한 모양새'라는 이문열의 도타운 옹호 속에서 그는 오늘도 예의 그 번역투에 열심히 복무하고 있다."

권오운은 곧장 정영문의 그 '예전 같았으면 영락없이 서투른 번역투라는 비난을 면하기 어려웠을 문장'(이를테면 '후'(後)를 끝없이 되풀이한다든지 하는)을 날로 보여줍니다. 그런 다음 "'이 세계의 불가지성을 유감없이 드러내는 수작'(서영은)이라는 찬사도, '철학적 사유로 어떤 세계를 이룩하려는 독특함'(윤후명)이라는 옹호도 나에게는 그저 남대문입납이요, 비 내리는 호남선이다"는 말로 마감했습니다.

5. 토종말을 마주하는 즐거움, '이리도 모르는구나' 장탄식

권오운의 이런 글에는, 아주 익숙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크게 낯설지는 않은, 그런 토종말을 자주 마주하는 즐거움도 있습니다. 옆에 사전을 두고 읽거나 재미있어 보이는 낱말이 나올 때마다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서 사전 검색을 하면서 읽으면 아주 감칠맛이 난답니다.

이를테면 '살강거리다-설익은 곡식이나 열매 따위가 가볍게 씹히는 소리가 자꾸 나다'는 권오운이 몸소 일러주는 설명입니다. '김치주저리-무청이 달린 채로 담근 무김치나 배추김치의 잎'도 마찬가지 권오운이 몸소 일러주는 뜻풀이라 할 수 있지요.

이밖에 눈에 띄는 대로 주섬주섬 주워 넘겨보면, '메어붙이다' '대바라기' '빚꾸러기' '개탕' '도사리' '호차(戶車)' '감또개' '몬다위' '갈피표(서표(書標)·보람줄·가름끈)' '쑤석거리다' '쌀개' '오사바사하다' '쓿다' '굴퉁이' 따위가 있습니다. 

읽는 이로 하여금 새로운 낱말을 알게 해 주는 한편으로, '내가 우리말을 정말 제대로 알지 못하는구나', 장탄식을 하게도 만드는 재미 있는 '우리말 소반다듬이'입니다. 잘 나가는 소설가나 형식에 빠진 주례사 비평 탓에 더욱 쉽게 멍드는 우리말을 지키려는, 더없이 용감한 행동이라 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김훤주
※ <경남도민일보>에 3월 10일과 11일과 16일 세 차례에 걸쳐 나눠 실은 글을 새로 정리해 올립니다. 실제 기획 연재에서 잘못된 보기로 든 표현이나 문장은 여럿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그 가운데 도드라져 보이는 것만 골라서 옮겼습니다.

문학수첩(2009년 봄호) 상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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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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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주완 2009.03.16 07:5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생닭 파는 데서 '모가지를 비틀어' 닭 잡는 사람은 거의 없다. 닭은 멱에 칼을 찔러 숨통을 끊는다."고 했는데, 제가 알기론 닭의 숨이 끊어지기 전에 멱에 칼을 찌르면 닭이 사정없이 몸을 뒤틀어 피가 여기저기 튀게 됩니다.
    그래서 먼저 모가지를 비틀어 축 늘어진 후에 멱을 따서 거꾸로 든 채 피를 뺍니다. 이건 지적이 좀 틀린 것 같습니다.

    • 김훤주 2009.03.16 12:4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제가 박완서 소설을 읽지 않아서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권오운이 인용한 부분만 보고 얘기하자면, 멱을 따지 않고 잡아준다고 한 것 같고 그런 상태에서 부탁을 하면 닭털을 뽑아주기도 한다는 얘기인 것 같습니다. 이에 대한 지적으로 저는 봤습니다.

      그리고, 하도 오래 전 기억이라 좀 가물가물하기는 한데, 집에서 어머니가 닭을 잡을 때는 분명히 목을 먼저 비틀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목을 잘라냈습지요. 그런데 시장통 닭집에서 잡을 때는 목을 자르지 않고 곧바로 멱을 땄고 닭도 바로 늘어졌습니다. 닭집에서는 한꺼번에 여러 마리 닭을 멱을 따기도 한 것 같은데, 그래서 제가 아주 신기해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집에서 엄마가 잡는 것하고는 다르구나!' 하고 말입니다. ^.^ 그래서 시장통 닭집에서 잡은 닭들은, 모두 머리가 몸통에 붙어 있엇습니다.

      선배님 지적에 대한 답이라기보다는, 제게 남아 있는 기억을 그냥 적어 봤습니당~.

  2. 정암 2009.03.16 17:2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우리말의 참맛을 보는거 같습니다..
    작가들이 우리가 일상에 사용하는 말들을 작품에 그대로 사용하는거 같군요..
    많이 배웠습니다..

    최근 어느 연예인이 예능 프로그램에 나와서 "다리가 얇다"는 표현을 하는것을 보고 지적했더니
    아들놈이 요즘 애들 다 그렇게 말해요 해서 황당했던 기억이 나네요..

    • 김훤주 2009.03.16 22:1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저도 많이 배웠습니다.

      한편으로는, 권오운이라는 분의 기개랑 배짱이 참 대단하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서울에서 글 쓰고 대학 강의하면서 산다는데, 그래서 같은 문인이라 이리저리 부딪히고 배려할 수밖에 없는 관계가 많을 텐데도, 이리 하고 있습니다. ^.^

    • 안미영 2009.03.17 12:3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권오운 선생님 지적 글을 몇 번 접하면서 저 또한 문인들의 용감한(?) 미사여구적 낱말(문장) 사용을 안타깝게 여겼습니다.
      권오운 선생님의 말씀-"도나캐나 '관용어'로 치부해주고 콩이나 팥이나 '수사적 표현'으로 싸고 돈다면 우리의 문장은 도끼 삶은 물이 되고, 글쓰기는 도투마리 잘라 넉가래 만들기가 되리라"-이 영롱한 보석빛 처럼 느껴집니다.

      시대와 상황에 비굴하게 굴복하지 않으시고, 할 말 하시는 권오운 선생님의 기개에 큰 박수 올립니다.
      그리고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참 말 하는 사람이 너무나 적은 작금에 귀하신 분 이니까요.

    • 우연 2009.03.18 05:0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수사학적 표현이란 소설가 김훈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게 미사여구가 되었건 수사학적 표현이 되었건 작가 특유의 스타일이라면 그걸 문제 삼아서는 곤란하지요. 그건 좋다, 나쁘다가 아니라 내 취향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니까요. 문법에 맞게, 올바로 썼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것인데, 이 또한 사회적 책임 운운할 정도로 큰 일이 아닙니다. 소설은 교과서가 아닙니다. 틀릴 수도 있고, 틀린 게 있으면 그 다음에 바로 잡으면 그만이죠. 이렇게 문예지에 글까지 올려 "우리나라 유명 작가들이 이렇게까지 글을 엉터리로 써서야, 쯧쯧' 하는 식의 지적에 대해서는 탈레반 같은 근본주의가 느껴지는군요. '도투마리 잘라 넉가래 만들기가 되리라'? 수십년 시소설 접해왔으나 사전을 찾기 전에는 무슨 말인지 도무지 모르겠군요. 이게 보석인가요? 제 눈에는 보석은커녕 너무나 불편한 문장으로 읽히는데요? 그렇다고 나쁘다는 건 아닙니다. 이건 취향의 문제입니다. 예술에서요,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경직성입니다. 지적을 하더라도 어깨에 힘 좀 풀고 해야 하지 않을까 싶군요. 근데 도투마리가 뭡니까? 사전 찾기 귀찮아서리... 또 넉가래는?

    • 김훤주 2009.03.19 02:5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우연님. 김훈이 썼다고 하는 매틀과 곤장틀과 형틀이 어째서 수사학적 표현인지 좀 설명해 주시겠어요? 제가 보기에도 그것은 잘못 쓴 표현일 뿐인데.

      권오운의 얘기는요, 경직성이 아니고요, 기본은 지켜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 아닌가요?

      넉가래, 도투마리, 다 한 번 찾아보시죠. 저는 그것 한 번 찾아보고서는 뒤로 넘어가도록 웃었답니다.

  3. 늘 생각하는 거지만 2009.03.17 03:0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문, '순 우리말'을 고집하고 '외래어, 외국식 표현 배척'에 이렇게 엄격해야 할 절대적 필요성이 과연 있을까하는 의문을 늘 가지고 있습니다. 언어는 늘 변하곤 합니다. 지금 우리가 쓰는 말은 결코 조선시대 훈민정음 만들어질 당시의 말이 아닐 것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100년쯤 후에 쓸 말도 결코 아닐 것을 확신합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어원을 따져가며 이런저런 표현들에 규제를 두고 틀을 짓는 건... 작가가 손을 자유롭게 뻗을 수 있는 폭을 협소하게 만드는게 아닌가 합니다.
    물론 귀여니류나 어설픈 번역체 소설같은건 결코 지향할 바가 못된다고 생각하긴 하지만요.
    과연 비문 단 하나 없이 '순 우리말', '순 우리식 표현'으로만 쓰여진 책이 단 한 권이라도 있을까요?
    만약 있다 쳐도 그 단 한권, 아니 몇권만이 이 땅의 모든 작가가 필사적으로 지향해야만 하는 걸까요?
    예술, 문학의 큰 장점은 자유로움, 자기 자신에 대한 직-간접적 피력이 아닐까요?

    • 김훤주 2009.03.17 11:4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의견 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런데 권오운의 주장은 순 우리말을 써야 한다는 얘기가 아니고요. 알맞은 말, 아주 소극적으로 얘기하자면 틀리지 않은 말을 쓰면 좋다는 것일 뿐입니다.

      이를테면, 방문 아래 끼워 쉽게 여닫을 수 있도록 하는 장치를 두고 어떤 작가가 '도르레'라 쓴 것을 두고 틀렸다고 지적하면서 '호차'(戶車)라는 낱말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우리말' 여부를 따지자면, 도르레가 호차보다 더 가깝겠지요.
      그리고 김훈의 잘못이라는 매틀과 곤장틀과 형틀은, 틀린 말을 확인 없이 쓰는 바람에 생겼는데, 글 쓰는 사람 처지에서는 그리 꼬집어 주면 오히려 고마워해야 하지 않을까 저는 생각합니다만.

  4. 우연 2009.03.17 04:1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작가는 신이 아닙니다. 문장을 쓸 때 100% 문법에 맞게, 말되게 쓸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출판사에 편집자가 있는 거고 또 그래서 신문사에는 교열부가 있는 것입니다.
    권오운씨의 오류 지적. "이름있는 작가들이 글을 틀리게 쓴다"는 지적은 별 의미가 없다고 봅니다.
    "이런 것도 있구나' 정도의 지적일 뿐이죠. 영어로 이런 표현 있지요? "So What?"

    권오운씨가 유명 작가의 글을 지적하는 게 아니었다면, 그의 글은 잡지에든 신문에든
    절대 실리지도 않았을 겁니다. 하다 못해 국어교과서의 오류를 지적했어도 별 주목을
    받지 못했을 겁니다. 권씨의 오류 지적이 알려지는 것마저도 '유명' 작가에게 기대어 있으니,
    그 지적은 역설적으로 별 의미가 없다는 거지요. 말이 되남???

    최근 이문구 소설을 읽었습니다. 예전에는 읽는 것 자체가 너무 어려워서 맛을 전혀 몰랐습니다.
    나이가 좀 들어 찬찬히 읽어보니, 아!, 이문구는 우리 문화의 산맥이었습니다.
    그 소설에서 비문을 찾으라면 엄청 많습니다. 권오운씨의 잣대를 들이대자면
    이문구의 소설은 소설도 아닙니다. 언어의 정형은 문법 테두리에서만 의미가 있습니다.
    그 작은 계량컵(문법)으로 바닷물(예술)을 측정하겠다고 하는 건
    언어도단입니다.

    과거 어느 신문사에서 일하던 배테랑 교열자의 말이 생각납니다.
    "대한민국에서 어떤 넘의 글을 가져와봐라. 손댈 곳이 없는지..."

    작가들은 또 이렇게 말할 겁니다.
    "그래, 나, 걍 꼴리는 대로 썼다. 우짤래?"

    • 김훤주 2009.03.17 11:5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신문기자인 저도 글쓰기에 사회적인 책임을 느낍니다. 잘못 썼다고 누군가 꼬집어 주시면 고맙게 생각합니다. 물론 귀찮고 번거롭다 여겨질 때도 있지만 말씀입니다.

      한 번 펴 냈다 하면 곧바로 베스트셀러가 되는 그런 소설가들의 사회적 책임은, 저 같은 존재도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은 기자보다는 훨씬 더 무거울 텐데, 그런 이들이 선생님 말씀처럼 "꼴리는 대로 썼다, 우짤래?" 이러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제 생각에는.

  5. 우연 2009.03.17 07:0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예를 하나 들어보지요.
    권씨는 성석제씨의 '빚'을 문제 삼았지요. 사전적인 정의야 권씨가 정확하다고 믿어주도록 하죠.
    그런데 '줄 빚'을 '줄 돈', '받을 빚'을 '받을 돈'이라 쓰지 않았다고 '웃음밖에 나오지 않는다'고
    비웃고 있지요?

    사전적인 정의야 어떻든, '받을 빚'과 '받을 돈'의 어감은 많이 다릅니다. 어째 그 다름과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웃음밖에 나오지 않는다'며 비웃는지 나로서는 과연 권씨가 '글쟁이'이기나 한 것인지
    정말 모르겠더래요. '줄 빚 = 줄 돈"이 확실하기는 한 겁니까? 내가 보기에 의미의 폭이나 넓이가
    조금 다른 것 같은데요? 한 두 개, 약점이라고 딱 잡아놓고 유명 작가들 놀려대는 재미가
    좋은 모양입니다.

    우리 어른들은 시장에 쌀 사러 갈 때 '쌀 팔러 간다'고 하셨습니다. 워낙 일상적으로 쓰이는 말이어서
    소설에는 그대로 들어올 수 있습니다. 권씨의 논리대로라면 '시장에 쌀을 사러가면서, 왜 팔러간다고
    하는가야? 아무리 읽어도 웃음밖에 나오지 않는다"가 됩니다.
    뜨거운 국물을 마시면서 "어 뜨겁다" 하지 않고, "어 씨원하다" 하는 건 어떻게 설명됩니까?
    이문구의 소설에 자주 나오는 "역전앞"이라는 표현은요?

    권씨의 지적은, 일면 옳아보이지만 우리 문화를 자꾸만 정형 속에 몰아넣으려 합니다.
    전체주의가 별겁니까? 바로 이런 게 전체주의적 사고 방식이 아닐는지요?

    • 김훤주 2009.03.17 11:5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이를테면, 보기로 드신, 쌀 팔러 간다는 사회문화역사적 맥락이 있는 표현입니다. 옛날에는, 쌀을 팔아 돈을 샀지요. 이런 객관 사실에 바탕을 둔 표현과, 작가가 임의로 만들어낸, 작가가 제 맘대로 쓰는 틀린 표현과는 차이가 나지요.

      잘 나가는 작가의 잘못 '하나'를 꼬집은 것은 절대 아니고요, 그래서 제가 글 끄트머리에다 "권오운의 글에는 작가들의 '한 가지' 잘못이 아니라 '여러 가지' 잘못을 올려놓고 있다"고, "그렇지만 여기 제 글에서는 대표가 될 만한 하나 또는 둘만을 끄집어 내었다"고 했습니다.

      <문학수첩>을 한 번 사 보시든지, 아니면 <문학수첩>이 있을 만한 도서관에 가서 빌려보시든지 하면 그런 오해를 푸실 수 있겠네요. ^.^ 2008년 봄호부터 올해 봄호까지, 다섯 권입니당~~~.

    • 우연 2009.03.18 03:4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쌀 팔러간다는 사회문화역사적 맥락이 있는 표현, 맞습니다. 그러나 저 표현이 처음 나왔을 때, 권오운 같은 분이 왜 지적을 안했겠어요? 왜 팔러간다고 해? 사러 가면서... 작가는 임의로 만들어낼 수도 있기 때문에 작가입니다. 표현상의 실수라면 반드시 바로잡아야겠으나, 임의로 만든다면 그건 비판할 거리가 못됩니다. 작가가 제맘대로 쓰겠다는데, 황지우가 시를 꼴리는대로 쓰겠다는데, 그거 문법 안맞아, 그게 시냐? 백날 떠들어대봤자 떠드는 사람 입만 아프죠. 시인 작가는 제맘대로 쓸 자유가 있지요? 그걸 문학적 허용이라고 하나? 권오운씨의 지적 방식이라면 "분수처럼 울려퍼지는 푸른 종소리"는 어찌되는 겁니까? 종소리에 무슨 색깔이 있으며, 소리가 어째 분수처럼 퍼진답니까? 이게 말이 되냐고요. 물은 물이고 소리는 소리인데... 애초의 글에서 보이는 "너, 어째 이런 것도 모르고 쓰냐?"고 빈정빈정대는 품이 참 못마땅해서요. "지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는 실수라지 않겠습니다"라는 말을 하고 싶지 않겠어요. 내가 작가라도...

    • 김훤주 2009.03.19 03:0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쌀 팔러 간다"는 표현이 처음 나왔을 때, 아마 권오운은 태어나지도 않았습니다. 1905년 생이신 저희 할아버지께서도 쓰시던 표현이니까요. 당대의 언중이 이미 쓰고 있던 표현이었고 또 대대로 이어져 오는 표현이기도 했습니다. 만약 권오운 같은 분이 당대에 있었다면, 그리고 누군가가 같은 당대에 가사를 쓴다면서 '쌀 산다'고 했다면, 바로 이 "쌀 산다"는 표현을 두고 잘못됐다고 꼬집었겠지요. ^.^

      이에 대해서도 권오운은 자기 글에서 기준을 밝혀놓고 있습니다. 한 번 읽어 보시고 비평을 해 주시기 바랍니다만.

  6. 잘 읽었습니다 2009.03.17 12:0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말과 글이 날로 가벼워지는 시대에, 권오운씨의 작업은 분명 의미있다고 생각합니다.
    문학 계간지에서 이런 연재를 허용(?)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이 작업의 중요성을 말해준다고 보고요.

    권오운씨 지적에 모두 동의하는 것은 아니고
    어떤 부분에선 잣대가 너무 엄격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그러나 권씨의 지적이 작가의 창작폭을 제한한다는 말에는 별로 동의하지 않고요.
    이 분이 문학계의 거물급 인사도 아니고, 이 분의 말씀이 구속력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니까요.)
    권오운씨가 옳네 그르네 라는 반응을 하기 보다는
    자신의 말과 글을 돌아보는 계기로 삶는 게 더 바람직하지 않을까 싶네요.

  7. 사람 2009.03.17 12:2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작가가 어법이나 문법을 지적받는 것이 뭐 그리 대수겠습니까?
    "아이쿠 제가 잘못 알고 썼나요? 다음 쇄 찍기 전에 손을 보겠습니다.' 할 수도 있지요.

    단지 느끼는 바 한가지는
    권오운 선생의 그 지적하는 태도가 영 글러먹었다는 데 있지요.
    비아냥거리고 비웃으며 어이없다는 반응인데...
    권오운 선생,
    학식이 높은 줄은 알겠으나
    교육자의 자질을 갖추지 못하고 누굴 가르치려 드시오.

    • 김훤주 2009.03.17 12:4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권오운이라는 분이, 편하게 살 수 있을 텐데도 왜 그럴까 하고 저는 한 번 생각해 봤습니다.

      성격을 탓하면(제가 그 분 성격을 모르기도 하거니와) 문제를 개인 차원의 어떤 우연으로 여기게 되는 잘못이 있을 것 같습니다.

      제게도 그런 비아냥이 조금은 느껴지는데요, 권오운 그 분 처지에서 보자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작가 된 책무로, 사전을 한 번만 뒤적거리면 하지 않을 그런 잘못을, 그야말로 이름난 작가들이 하고 있는 실정이거든요.

    • 안미영 2009.03.17 13:2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바로 님과 같은 생각의 관용 논리로 작가조차도 바른 글, 바른 낱말을 쓰게 되는게 아니라 어떻게든 미사여구를 남발하여(몰라서 잘 못 쓴 경우도 많겠죠)독자 입맛에 맞추게 되는 겁니다.
      음식재료와 상관없이 양념(조미료) 질퍽하게 넣어서 입맛을 홀리는 것처럼요.

      그리고 사람님이 바른 글쓰기와 사용에 관심도 없고, 상식도 부족하시고, '아 좋은게 좋은거지. 그깟 글 문장, 어법 하나 잘 못 썼다고 뭔 큰 일 있어?" 식의 관점을 가지신 분이라 권오운 선생님의 소신있는 지적을 비아냥 거렸다는 식으로 받으들이게 되는 겁니다.
      점입가경으로 '교육자의 자질을 갖추지 못하고 누굴 가르치려 드시오' 훈계까지 하시다니요? 조롱하신건가요? 알고 하십시오.
      학식이 높든 낮든 각자 갖춘 위치와 자리에서 쓸 말이 있습니다.
      님이 권오운선생께 '자질을 갖추지 못했으면서 누굴 가르치려 드느냐?' 비아냥 거릴 정도의 인품과 상식, 전문성을 갖추었는지 먼저 자신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전문가란, 교육자란 틀림을 보고 지적 할 수도 있고, 안타까워 할 수도 있고, 들을 만한 사람들(들어야 하는 사람들)에게 조언을 주거나 계속 틀리거나 본질을 벗어난 행동에 화를 낼 수도 있습니다.
      또한 지적받은 문인들이 권오운선생께 '비아냥 거렸다고, 자질이 없다고, 누굴 가르치려 드느냐?'며 모멸감만을 느꼈을거라 생각하시나요? 님 말처럼 비아냥을 받은 사람들이 느낄 감정들이죠.
      제 생각으론 지적받은 문인들은 부끄럽고, 한편 고마워서 그러지 않을 겁니다.
      글 쓰는 일을 직업으로 가진 사람들이-그 일로 돈을 벌고, 한국문학을 이어가는 사람들이-몰라서 제대로 못 쓰고, 어법에 맞든 안맞든 말 꾸밈에만 심히 열중하는데 '배워서 써라, 알고 써라, 바로 써라, 책임을 느껴라' 지적해 줄 선배도 없고, 교육자도 없고, 선생도 없어야 합니까?
      우리 글, 바른 글에 전문가가 되시고, 사랑하시고, 아껴보십시오. 아니, 타분야 라도 그렇습니다.
      그러면 지금과 같은 댓글 절대 다실 수 없습니다.

    • 우연 2009.03.18 03:5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안미영씨, 말씀 잘 하셨습니다. 알고 쓰라, 바로 쓰라, 책임을 느껴라, 지적해주는 선배, 선생, 교육자가 있으면 참 좋겠지요. 그리고 안미영씨가 하시는 말씀은 굳이 말씀 안하셔도 기본 양식만 갖춘 사람이라면 누구나 기본으로 가진 상식입니다.
      그런데 권씨는 "웃긴다"고 합니다. 작가가 실수한 것을 두고 웃긴다고요? 이게 선배로서 애정을 가지고 가르치는 자세입니까? 그가 이청준과 박완서 선생에게 선배이기는 한가?
      전, 이청준 선생의 문장을 두고 한 표현을 보고 아주 기함하는 줄 알았습니다. 부정확한 거, 바로 잡는 거 좋지요. 그래야 하고요. 그런데, 인간이 하는 일이니 비웃지는 말자고요. 서양의 유명한 엘리어트나 보들레르는 뭐 틀린 거 하나도 없는 줄 알아요? 후세 연구자들이 그건 실수라고 바로 잡고, 어떤 것은 의도적인 실수라고 분석하고, 그렇게 하는 거죠. 근데, 거기서 시인 작가가 틀렷다고 해서 "웃긴다" 혹은 "한심하다"는 식으로 표현한다면 문제가 있지 않겠어요? 난 권오운씨의 "볼수록 웃음이 난다"는 말에서, 마치 무슨 대단한 실수나 잡아낸 것인양, 유명작가가 되어 그거 하나 모르냐고 힐난하는 오만방자함이 느껴지는데요. 나만 그런가?

    • 사람 2009.03.20 14:5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안미영씨가 볼지 어떨지 모르겠으나...

      문단의 손꼽히는 문인들의 글을
      독자 입맛에나 맞추려고 양념칠범벅한 음식처럼 깎아내리다니요

      모름지기 사람의 말이란
      content보다 attitude가 중요한 법
      그래서 '아'다르고 '어'다르다는 말이 있는 겁니다.

      내 자신을 돌아보라니 돌아보건데
      상식이 부족하지 않은 사회적 위치에 있습니다만
      남의 말을 듣거나 가르칠 때 비아냥거리는 짓은 하지 않습니다.

      지적을 탓한 것이 아니라,
      지적하는 태도를 탓한 것인데도
      여전히 '왜 지적도 못하게 하고, 지적해도 받아들이지 않느냐'는 식으로 답글을 다시니
      나도 이쯤이면 문맥 파악 못하는 댁의 행동에
      '웃음 밖에 나오지 않'는다고 해야 할까요?

      전문가 운운하지 마시고,
      인간 됨됨이를 먼저 배우고 오세요.
      바른 말 전문가는 비아냥거려도 된답디까?
      국어사전에 적힌 말들만 하고 원칙대로 산답디까?
      잘못을 지적하되 비꼬지 않고 품위있게 하자는게
      댁 보기에는 비전문가의 비상식적 관용논리입니까?

  8. 우연 2009.03.18 03:3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글의 달인 정도가 아니라 글의 신이라도 글을 틀리게 쓸 수가 있는 법입니다. 옥에도 티가 있는 법인데
    하물며 사람에게 그 정도의 티가 왜 없겠습니까? 사전을 한 번만 뒤적거리면 하지 않을 잘못도,
    순간적으로 착각하여, 아니면 지금껏 잘못 알아 뒤지지 않을 수고 있겠고, 그 작품을 편집하는 출판사의 그 꼼꼼한 편집자들도 그냥
    넘어갈 수도 있습니다. 여러 분이 말씀하신 대로 "나의 틀린 점을 잡아주니 고맙습니다"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밧뜨, 그 책은 읽어보지 않았으나 권오운이라는 분이 지적하는 스타일을 보니, 작가도 아니고 그냥
    작가들을 좋아하는 나 같은 사람도 입에서 욕지거리부터 나옵니다. 그렇게 비아냥대고, 웃고,
    이청준 선생께는 또 뭐라고라? 무슨 큰 약점이나 잡은 듯, 그렇게 씹어대니, 글 조금 읽는다는 일개 독자인 나도 기분 存나게 나쁜 거 아잉교?
    저는 권오운이라는 함자를 이번에 처음 들었거니와, 저 분이 무슨 뜻을 가지고 남의 글을 저렇게
    헤집고 다닌 것인지, 왜 그 대상을 이름 있는 작가들로만 한정한 것인지, 고것이 진정 알고 싶은데...
    작가들의 글에서 오류는 얼마든지 발견됩니다. 유명 출판사에서 나온 책에서도 간혹 오자가
    보이잖아요. 글자에 귀신이 씌었다는 건 글을 좀 쓴다는 사람이면 누구나 다 알고, 그것을 줄여가려는
    노력을 하는 건 기본 중의 기본인데, 마치 무슨 대단한 것을 발견한 것인양 "볼수록 웃음밖에 나오지
    않는다"라는 표현까지 쓰니... 내 인생과 전혀 관련 안된 야그지만 열 받는다 이거요.
    요즘 잘 나가는 작가들 말고, 70년대 최고의 작가 최인호와 80년대 중후반 최고의 작가 조정래를 한번
    살펴보라고 권하고 싶소. 과연 저 정도가 흠이 되는지... 또한 이 문구 선생의 그 질펀한 사투리는 또 어찌할 거요?
    뭐 대단한 흠이 된다고, 남의 약점을 잡지에 그렇게 오랫 동안 연재씩이나 하는지, 지난번
    시인들 등수 매긴 것만큼이나 나에게 우습게 보입니다. 권오운씨 글을 한번 보고 싶군요.
    과문해서 아직 한번도 듣도 보도 못했는데, 증류수처럼 깨끗하게 모든 거 갖춰가며 쓰는 글이 얼마나 큰
    감동을 안겨주는지... 또한 거기에는 단 한 글자도 틀린 곳이 없는지... 내가 아는 그 신문 교열자에게
    가면 보나마나 빨간줄 북북 그어지겠지만서도...

    • 김훤주 2009.03.18 21:4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일러드릴게요. 아래 책들을 사서 보시든지 빌려서 보시든지 하시면 되겠네요. ^.^ 제가 쓴 글 안에도 있습니다만.

      <알 만한 사람들이 잘못 쓰고 있는 우리말 1234가지>
      <우리말 지르잡기>
      <작가들이 결딴낸 우리말>

      작가들, 특히 이름난 작가들은 자기 글에 대해 사회적 책임을 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만큼은 어느 누구도 아니라 부정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틀린 말과 표현을 쓰지 않음으로써 사회적 책임을 작으나마 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면에서 권오운은, 권오운 같은 분들은, 좀 비웃을 권리가 있다는 생각을 저는 합니다.(또 그이의 비웃음이 지나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물론 그런 비웃음을 두고 기분 나쁘다, 옳지 않다고 비평을 할 권리는 누구에게나 다 있기는 할 것입니다.

      <문학수첩>은 꽤 이름난 문학잡지니까, 쉽게 사실 수도 있을 것이고요, 또 그럭저럭 쓸만한 도서관에서 충분히 쉽게 빌릴 수 있을 것입니다. 2008년 봄호부터 연재하고 있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니까, 일단 한 번 찾아 보시지요. ^.^

    • 어휴 답답하네요 2009.03.19 04:0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주인장님의 '유명 작가들의 사회적 책임'이란 말 전혀 못 알아들으시나봐요. 왜 자꾸 유명인들만 까냐고 되풀이하시는 것 보니. 한국인들의 말과 글 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정도가, 유명작가가 큽니까 아니면 맞춤법 맨날 틀리는 옆집 초등학생 철수가 큽니까? 당연히 작가들이잖아요. 그러니 그 사람들을 깔 수 밖에요. 그럼으로써 바르고 고운 말에 대한 환기를 더 효과적으로 할 수 있고요.

      그리고 님이 착각하시는 게 있네요. 권오운씨가 거명 좀 했다고 독자들이 이청준 무식해, 박완서 실망이야, 이렇게 반응하나요? (님이 언급하신대로) 글의 신이라도 글을 틀리게 쓸 수 있는 거 다 알고요, 이청준 박완서 틀릴 수 있다는 거 다 알아요. 거기까지에요. 이청준 박완서 틀린 건 틀린 거고, 이청준 박완서 위대한 것도 사실이란 말입니다. 하지만 작가들의 문학적 업적이 아무리 위대해도, 중고등학생 수준의 기본적인 것을 틀렸다면(확인하는 데 게을렀다면) 권오운씨는 물론 중고등학생들에게도 우스울 수 있는 거고요, 그들이 1+1은 3이라고 썼다면 초등학생들도 비웃을 수 있는 거고요,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한국의 대표적인 작가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는 말입니다.(여기서 대체 선후배 얘기는 왜 나오나요? 참나. 지금 그런 '끈끈한' 선후배 관계, 주례사 비평에 대해 비웃고 있는 게 권오운씨잖아요. 그렇게 선후배 따지다 보니 틀린 걸 틀렸다 못 말하고, 문학계 표절 문제도 늘 묻히는 것 아닙니까.)

      마지막으로, 이 글 읽고 '네까짓 게 뭔데'라고 반응하는 게 제일 어리석다고 생각하는데요. 우연님은 계속 권씨가 유명세를 위해 유명작가 물고 늘어지는 것처럼 은근히 말씀하시는데, 이 분도 이 바닥(바른 말 쓰자 뭐 이런...)에서 나름 유명하실 걸요. '네까짓 게'라고 은근히 무시하시기 전에, 이번 기회 삼아 이 분 책이나 좀 읽어보세요. 겨우 기사 한 쪼가리 읽고 광분하지 마시고요.

  9. 우연 2009.03.19 05:0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휴 답답하네요'씨. 글쓰시는 품을 보니 나름대로 글쟁이 흉내는 좀 내시는 모양인데, 아무리 인터넷상의 익명으로 대화한다 해도 점잖은 이야기들이 오가는 블로그에서 예의는 지켜가며 이야기합시다. 기사 한 쪼가리, 광분이 뭡니까? 김훤주 기자의 기사가 어째 한 쪼가리가 되며, 제가 언제 광분을 했답니까? 광분은 그대가 하신 듯한데...
    유명 작가들의 사회적 책임이라는 데 대해 모르는 바 아니니 못 알아듣는다고 답답해 하지 마시길...
    그 사회적 책임이라는 게 얼마나 크길래 굳이 문예지의 지면을 빌려 꼬장꼬장 따지고, 따지는 것으로
    그치면 좋을 것을, 그대의 말처럼 작가에게 흠집 낼 일도 아닌데, 그게 뭐 그리 대단한 문제가 된다고 한 마디씩 비웃음을 달았답니까?
    우리 말에서 일본어 잔재 골라내기를 평생 업으로 삼으셨던 이오덕 선생의 진지한 태도를 좀 배웠으면 하고요.
    또 제가 언제 선후배 문제를 거론했다고 왜 저한테 퍼부으시나요? 전 수십년 시, 소설을 읽어왔으나
    권오운이라는 함자를 이번에 처음 듣는다고 야그한 것밖에 없는디유?
    그 사회적 책임이라는 것도 그런단 말씀입니다. 소설에서 표현이 조금 잘못되었다 치더라도 그게 국민 대중의 글쓰기 전체를 바꾸어놓는다는 건가요? 아, 그래서 사회적 책임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나는 권오운씨가 유명세를 위해 유명작가 물고 늘어지는 것처럼" 말한 적 없고요, 왜 국민대중의 글쓰기에 더 큰 영향을 끼치는 교과서 같은 데서는 찾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들어서 그렇게 말씀드린 것뿐이고요.

    그런데요, 그대가 쓰신 "유명세를 위해"라는 것이 말이 되나요? "유명세를 얻기 위해"가 정확한
    표현이 아닌감? 아니면 "유명해지기 위해"로 써야 하는 거 아닌가? 그리고 전 "네까짓 게"라고 무시한 적이 없걸랑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