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 역사를 한 눈에 알게 해주는 책이 나왔습니다. 인제대학교 박물관 이영식(가야문화연구소 소장) 관장이 펴냈습니다. 제목은 <이야기로 떠나는 가야 역사 기행>입니다.

1. 가야 역사 빠진 '삼국시대' 표현은 틀렸다

이영식은 가야 역사에 대한 최신 정보를 쉽게 전달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고 적었습니다. 하지만, 책을 제대로 읽어보면 진짜 목적은 우리 고대 역사에서 빠져 있는 가야사를 있어야 마땅한 제자리로 돌리는 데 있음을 알 수 있답니다.

"고려시대 일연 스님이 <삼국유사>에 적은 것처럼 가야가 여섯 개가 아니고, 열두 개 이상 되는 가야 나라들이, 2000년 전부터 1400년 전까지, 그러니까 백제·고구려가 신라에 통합되기 100년 전까지 600년 동안 고구려·백제·신라 삼국과 함께 나란히 해온 고대사의 당당한 주체"라는 얘기입니다.


이영식은 말합니다. "100년 먼저 망한 것과, 그 6배나 되는 600년 동안 함께 우리 고대사를 이루어 왔던 역사 가운데 어느 쪽에 더 중요한 의미를 두어야 하는지는 분명할 것입니다. 이렇게 간단한 산술의 의미조차 존중하지 못했기 때문에 가야의 역사는 홀대받아 왔습니다."

이어지는 기록입니다. "삼국시대(三國時代)라는 말이 대표적입니다. 우리의 고대사를 고구려·백제·신라 삼국만의 역사로 생각해 왔던 까닭에 가야의 역사는 빠지고 말았습니다. 가야사의 탈락은…… 600년 동안이나 가야로 불렸던 고대의 부산과 경남, 그리고 경북과 전라도 일부의 역사가 무시됨을 뜻합니다.


그렇게 한 결과는 무엇일까요? "이렇게 우리가 가야사를 거의 버려두다시피 하고 있을 때 일본은 가야사 탈락의 공백을 '임나(任那)일본부설'과 같은 식민사관으로 파고 들었습니다." '임나任那''일본日本''부府'는, 가야 땅(임나) 땅에 와 있던 왜(일본)의 사절단(부)일 뿐인데도, <일본서기>에 나오는 '임나일본부'라는 글자만을 근거 삼아 일본(왜)이 가야를 지배하고 통치하는 기구(부)였다고 억지를 부린 것이지요.


이영식은 이 책에서 "전기(1~4세기)에는 김해가 '큰 가야'였고 후기(5~6세기)에는 경북 고령이 '큰 가야'였으며, 일본이 꾸며냈다고 생각하기 쉬운 '임나(任那)'도 실은 김해와 고령을 높여 '임(主)의 나라'로 부르던 데서 비롯된 가야의 대명사"라고 요약했습니다.


당연히 일본과 우리나라 양쪽 사례 모두를 들어 설명했습지요. <일본서기>는 물론이고, 고구려 광개토왕릉비,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의 '강수전(强首傳)', 신라 진경대사탑비에도 '임나' 표기가 나온답니다.

2. 이영식이 꼽은 가야 역사의 대표선수 일곱


김해·부산·고령·합천·창녕·함안·고성의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물론 경남 전역이 다 그렇기는 하지만, '가야 옛 땅의 자취가 뚜렷하게 남아 있는 고장'이라면 정답이 되겠지요. 이영식 관장이 이번에 여기 이 일곱 군데를 돌아다녔습니다.

맨 처음 들른 데는 당연히 김해입니다. 가야 역사가 시작되는 고장이거든요. 구지봉에서 '구지가'를 거쳐 회현동 패총에 나온 중국 화폐 화천(貨泉)과 봉황대·관동리 유적의 항구 시설을 들어서, 고대에는 가락국(김해)이 거의 유일한 중개무역항이고 해상왕국이었다고 말합니다.


아울러 가락국 왕궁터로 봉황토성 자리를 짚으면서 처음 수로왕릉은 지금처럼 조그마했지만 여러 차례 개축되면서 지금처럼 커졌다는 짐작도 곁들였습니다. 그리고 수로왕과 허왕후의 출신지는 무슨 인도나 이런 데가 아니고 서북한의 고조선이나 낙랑·대방군이리라는 설명도 덧붙였습니다.


'대한해협을 건넌 가야의 부뚜막 귀신'과 '일본에서 신이 된 가야인들'도 줄줄이 다룬 다음, "가야 산성으로 확인되는 최초 사례가 될" 김해 주촌면 양동산성 아래 양동고분군을 설명하면서는 주촌(酒村)이 원래는 배 주(舟)자를 썼고 고려시대까지 항구로 크게 번성하던 곳이라 했습니다. 그러니까 김해평야가 당시에는 없었다는 말씀입니다.


이어 낙동강을 건너가 부산 동래 복천동 고분군을 만납니다. 이영식은 유물과 기록을 통해 동래는 거칠산국, 해운대는 장산국이라 하면서 5세기 전반까지는 가야의 역사와 문화를 지닌 독립국이었다가 그 뒤 신라로 편입됐다고 했습니다.


가라국이라 하는, 5~6세기 가야의 맏이 대가야였던 경북 고령. 가야 산신 정견모주가 천신의 빛을 받아 뇌질주일(朱日)과 뇌질청예(靑裔)를 낳아 '붉은해朱日'는 고령에 남았고 '새파란 후예靑裔'는 김해로 갔다는, 김해 구지봉과는 다른 신화를 소개하며 고령에 처음 반로(半路)국이 있었고 이것이 대가야로 발전했다고 해석했습니다. 청동기 시대 반로국이 있었다는 근거는, 알터라는 데에 남아 있는 암각화에서 찾았습니다.


또 임금의 우물(어정御井=왕권이 성립되기 전에는 공동체 구성원과 제사장이 구분없이 같은 물을 썼겠지만)과 가야의 피라미드라는 지산동 고분군, 그리고 거기에서 이뤄진 대규모 순장을 죽 보여주며 대가야의 규모와 실력을 얘기해 줍니다. 지산동 고분군의 주인으로 짐작되는 가실왕과 가야금과 우륵을 다룬 데서는 작곡을 지시한 가야금 12곡의 이름이 가야 12개 나라 이름이라는 해석을 내놓고 의령군 부림면 신반(산반해국) 출신인 우륵은 친백제 노선이던 대가야 가실왕에게 굴복을 당했기 때문에 나중에 친신라를 했으리라고도 했습니다.


<삼국사기>는 물론 <일본서기>에도 562년 신라의 대가야 병합 뒤에는 가야에 대한 기록이 아예 없다고 합니다. 이영식은 532년 김해 가락국의 신라 투항 이후 562년 대가야 멸망까지 부산·경남·경북·전북에 있던 가야 여러 나라들은 신라 또는 백제의 회유와 침략 앞에 격파돼 갔으리라 봅니다. 고령 대가야가 마지막 가야라는 얘기입지요.


합천 쌍책면 다라리 고분군. 다라리에는 다라라는 가야 나라가 있었습니다. <일본서기>를 따르면 6세기 전반 함안 아라국에서 열린 국제회의에 외교사절도 보냈고, 중국 양무제 때 그려진 '양직공도'에도 백제·신라·대가야와 함께 백제 둘레 이름난 나라로 나와 있습니다. 곧바로 옆에서 온전 고분군도 발굴됐는데, 4세기 전반부터 6세기 중반까지 200년 넘는 동안 가야계·신라계·백제계로 갖은 유물을 쏟아냈답니다.


창녕 교동 고분군 전경과 출토유물.


다음은 비사벌로 불러야 맞는 창녕. 기원 전후 전기 가야에서는 불사(不斯)국이었으나 창녕 지역에서는 고고학 발굴 조사가 늦은 시기 대형 고분만 팠기 때문에 관련 자료는 거의 없는 형편이랍니다. 비사벌은 창녕 교동 고분군 조성 시기인데, 일본 녹나무 목관이 나온 7호분(5세기 전반), 고구려 환두대도가 나온 11호분(5세기 중반), 신라 은제 허리띠가 나온 12호분(6세기 전반)을 차례로 이어가면서 신라가, 고구려의 영향을 떨쳐내며, 독자 세력이었던 가야를 지배해 가는 과정을 보여준다고 설명했습니다.


창녕 진흥왕순수비를 두고는 가야를 공략하는 신호탄이라 했습니다. 그것도 마지막 신호탄이겠지요. 561년 창녕비를 세우기 앞서 신라는 이미 555년에 창녕 땅에 하주를 설치했습니다. 창녕비문에는 스님 일행과 진흥왕을 따라온 중신(김유신의 할아버지 무력치武力智 따위)과 사방 군주(四方 軍主) 이름이 나타납니다.


창녕 비사벌 군주는 물론이고, 고구려·백제와 치열하게 맞서고 있던 한강 유역의 한성 군주까지 불러왔습니다. 한강 유역 쟁탈전과 맞먹을만큼 급박하고 중요한 일이 창녕 비사벌에 있었다는 얘기입니다. 그리고 안변의 비리성 성주, 상주의 감문 군주도 죄 불러 모았습니다. 창녕을 베이스캠프 삼아 남쪽 함안 아라국과 북쪽 고령 대가야로 창끝을 겨누는 군사 퍼레이드였습니다.


전기도 후기도 모두 번영을 누렸던 함안 아라국. 말산(末山) 고분군에서 말산은 말이산(末伊山=머리)의 잘못이라 했습니다. 왕을 머리에 모시지 끄트머리에는 모시지 않는다는 주장입니다. 또 있지도 않은 허구일 뿐인 '가야연맹설' 탓에 함안 아라의 대단함이 묻혔다고도 했습니다.

연맹(聯盟=league)은 '함께'가 있어야 하고 또 '맹주'도 있어야 하는데 가야 역사에는 '함께'와 '맹주'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 허구 덕분에 후기 대가야 고령과 전기 대가야 김해만 눈길을 끌었지만, 실제로는 아라가 한강 이남 78개 나라 가운데 랭킹 5위에 드는 큰 나라였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은, 소가야가 아닌 쇠가야 고성. 지금 이름 고성(固城)은 단단한 성이라는 뜻이고 조선인지 고려인지 한 때 이름이었던 철성(鐵城)은 쇠로 만든 성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삼국유사>를 편찬한 일연스님이 적은 소가야는 쇠(철)의 가야로 봐야 맞다고 이영식은 말했습니다.

이것은 제 생각인데요, 이전 이름인 고자(古自) 고차(古嵯) 고사포(古史浦) 따위도 죄다 곧-굳(固)을 이르는 어간을 물고 있습니다. 물론, 이영식이 책에서 말하는 바는 이런 고자(古自) 고차(古嵯) 고사포(古史浦) 따위가 (포항 호미곶처럼 툭 튀어나온 뭍을 뜻하는) '곶'이라는 것이지만, 저는 그렇기만 할까? 이리 여기는 것이지요.


어쨌거나 '소'가야가 아니고 '쇠'가야임을 뒷받침하는 유적이 있답니다. 바로 동외동 패통 유적 아랫단 야철지와 윗단 제사터에서 발견된 새 두 마리 청동 장식이랍니다. 이 대목에서, 그리고 바로 앞 함안 말산을 이르는 대목에서, 저는 사실 이영식이 가야 옛 땅에 사는 현대인에게 하고 싶은 말이 따로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 덜 떨어진 것들아, 선조들 욕보이는 잘못된 이름을 그대로 붙들고 있다니!"


책은 여기서 끝이 납니다. 나머지 가야는 둘러보지 못했습니다. 독로국(거제)·사물국(사천)·다사국(하동)·사이기국(의령)·산반해국(신반)·탁순국(창원)·골포국(마산)·장산국(기장·동래)과 산청·함양·거창, 전남 곡성·구례, 전북 남원·임실·장수·진안은 나중에 해야겠지요.


3. 가야가 '제4제국'이라는 최인호도 틀렸다


사실 앞선 얘기 따위는 가야 역사를 공부하는 학자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이야기로 떠나는 가야 역사 기행>의 값어치를 높이는 대목은 따로 있습니다. 물곤 쉽고 재미있다는 측면도 제대로 평가를 받아야 하겠고 잘은 모르지만 이영식에게만 있는 독특한 측면이 있다면 이또한 높게 평가해야 합니다만.


제가 보기에는, 책 말미 한 표현이 책의 값어치를 결정적으로 높였습니다. 가야를 '제4 제국'이라 이르는 등 사실보다 부풀리는 바도 옳지 않다면서 못을 박은 대목입니다. 이런 생각은, '삼국시대'라는 잘못된 표현과 마찬가지로, 고구려·백제·신라 삼국과 가야가 아닌 다른 역사를 부당하게 깎아내리고 외진 구석으로 내몬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적었습니다. "어느 소설가가 외치고 있는 모양입니다만, '제4제국'이라니요? 요즈음 가야가 좀 잘 나간다 해도 제국은 아니었고, '4국시대'라는 말도 정당한 것이 아닙니다." 여기 나오는 소설가는 바로 최인호입니다. '경아'가 나오고 눈이 '난분분 난분분' 내리는 최인호의 소설 <별들의 고향>을 읽은 어릴 적 기억이 새록새록 납니다만, 2006년 발표된 <제4의 제국>은 좀 찜찜했습니다.


이 소설은 같은 해 9월 가야세계문화축전 임진택 집행위원장이 총감독을 맡고 연극인 이윤택이 연출을 담당해 <사랑의 제국>과 <태양의 제국>으로 구성한 대형 연극으로 꾸며지기도 했습니다. 또 이에 힘입어 KBS는 2008년 3월 창사특집 다큐멘터리로 <제4의 제국 가야>를 방송하기도 했습니다.


이영식은 그리 하면 안 되는 까닭도 함께 밝힙니다. "우리 고대사에는 고조선을 이은 천년 왕국의 부여도 있었고, 옥저·동예·탐라 등의 역사도 있었습니다. 4국이라 하여 부여사를 제외한다면 중국의 동북공정을 꾸미는 사람들이 좋아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또 통일되면 부여사를 넣어 다시 '5국시대'로 해야 할까요? '제4'나 '4국시대'는 지금까지 '3국시대'라는 말 때문에 가야사가 차별받던 것과 아주 똑같은 논리와 역사 인식입니다."

멋지지 않습니까? 저는 아주 멋진데…….

김훤주

이야기로 떠나는 가야 역사여행 - 10점
이영식 지음/지식산업사


제4의 제국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최인호 (여백, 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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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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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대한민국 황대장 2009.06.19 10:4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좀 어렵다는...
    제가 공부 하는 것을 별로 좋아라 하지 않는데 천천히 몇 번을 봐야 할듯한... ^^

  2. 지구벌레 2009.06.19 11:3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재밌게 보고 갑니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3. 월산명박 2009.06.19 16:2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여러분,

    한국인 꼭 알아야 하기에 소개올립니다.
    북한이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를 더 잘 알고 있습니다.

    "김구, 여운형을 죽였고, 오늘은 노무현을 죽였다"
    노통이 돌아가신 것은 결국 친일반민족 세력을 처단 하지 않은 비극이며,
    매국노 양산하는 현 국사책은 일제 조선총독부가 만든것을
    친일파 사학자들이 이어받은 50%가짜입니다.



    친일파당과 일본산 아끼히로명박, 꼭 표로 심판합시다.

    북한 공산당처럼, 친일파1당 독재 영구집권을 위해 미디어법

    미친듯이 몰아부치고 있습니다.
    또한 악귀히로 일본에서의 실체를 아셔야 합니다.
    그는 한국인이 아니었습니다. 창시개명했는데 동영상 꼭 보세요.




    아울러 거/북/선 실제사진 원본공개합니다.
    조선말기에 선교사가 전라도지방에서
    찍은 유일한 실제사진인데 반잠수정같습니다.

    위 제필명을 누르시면 '부끄러운유산방'에 있습니다.

    • 김훤주 2009.06.19 19:1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고맙습니다. 회원이 아주 많으시네요. 좋으시겠어요.

      그런데, 부그러운 유산 방은 못 찾았어요. 나중에 다시 들르겠습니당~~~~~~.

  4. 라디오 2009.06.19 17:5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다라국은 '독로국'이라고 표시가 된 '거제도'를 뜻한다고 봅니다. 짐작이지만..

    홍익대 김태식 교수의 책에서도 나오듯이, 합천에는 대형 고분이 없습니다.
    합천은 고령의 '대가야' 영향권下에 있었다고 보는게 합당합니다.

    그러므로, 다라국은 다른 곳에서 찾는게 합리적입니다.

    • 김훤주 2009.06.19 19:2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김태식의 글이 제게는 좀 안 맞습니다. 지금은 달라졌는지 모르지만, 1999년과 2000년 어름에 <화랑세기>를 두고 쓴 글은 분명 그랬습니다. 논쟁적인 데 더해 무엇인가 훈시하는 듯한 태도가 글에 배여 있었습니다. 그래서 잘 안 읽게 됐는데, 그이가 합천에 대형 고분이 없다고 이른 모양이네요.

      그렇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합천군 쌍책면 옥전 고분군은 1985년 발굴이 시작됐고 그렇게 해서 확인된 고분이 119개라고 합니다.

      이영식은 거제=독로국이라는 얘기도 하면서, 그와는 따로 다라국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근거는 앞에 말한 옥전 고분군 출토 유물과 함께 <일본서기>의 기록, 그리고 중국 양나라 무제 시절의 '양직공도'에서 찾고 있습니다. 아울러 신라 시대 합천을 대야大耶 또는 대량大良이라 일렀다는 기록에서도 짐작하는 근거를 찾았습니다. '대'와 '다'의 친연성에 눈길을 두는 것입니다.

      김태식은 제가 잘 모르지만, 이영식의 설명이 제게는 꽤 그럴 듯하답니다. 하하.

      어쨌거나 일부러 힘들여 의견 주셔서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 라디오 2009.06.24 15:3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옥전고분이 있엇죠. 그런데, 합천면 초계면쪽은 '초팔국'으로 봐야죠.

      포상8국란이 일어난 소국이죠.

      포상8국이 일어난 해가 AD270년입니다.
      삼국사기보다는 60년하향조정해서 봐야죠.

      옥전고분에 대해서 좀 더 알아 봐야겠군요.

    • 라디오 2009.06.24 15:4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파사이사금기 25년.

      二十五年 正月 加耶世主遣其三子靑裔 入朝
      25년(AD150년) 1월 加耶世主(가야세주)가 그녀의 셋째아들 靑裔(청예)를 보내 入朝(입조)하였다.

      三月 以吉門爲伊伐飡 茶耶爲稟主 沙乙那愛吉元 而不肯爲稟主 上許其志 遂以茶耶代之 摩帝爲中外大軍事 美禮爲大軍母
      3월 吉門(길문)을 伊伐飡(이벌찬)으로, 茶耶(다야)를 稟主(품주)로 삼았다. 沙乙那(사을나)는 吉元(길원)을 사랑하여 稟主(품주)가 되는 것을 꺼려하였다. 왕이 그 뜻을 받아들여, 마침내 茶耶(다야)로 대신하게 하였다. 摩帝(마제)를 中外大軍事(중외대군사)로, 美禮(미례)를 大軍母(대군모)로 삼았다.

      十二月 音汁伐與悉直谷爭界 王命其地老辨之 地老曰 “加耶王子靑裔多智 可以立議” 上許之 汗門爲京都兵官 汗兒子也
      12월 音汁伐(음즙벌)과 悉直谷(실직곡)이 경계를 다투었다. 왕은 그 地老(지로)에게 명하여 변별하도록 하였다. 地老(지로)가 말하기를 “加耶王子(가야왕자) 靑裔(청예)가 지혜가 많으니 의논할 만합니다.” 라고 하였다. 왕이 이를 허락하였다. 汗門(한문)을 京都兵官(경도병관)으로 삼았는데, 汗兒(한아)의 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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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본기 파사이사금 23년(AD102년)
      二十三年 秋八月 音汁伐國與悉直谷國爭疆 詣王請決 王難之 謂金官國首露王 年老多智識 召問之 首露立議 以所爭之地 屬音汁伐國 於是 王命六部 會饗首露王 五部皆以伊湌爲主 唯漢祇部 以位卑者主之 首露怒 命奴耽下里 殺漢祇部主保齊而歸 奴逃依音汁伐主陁鄒干家 王使人索其奴 陁鄒不送 王怒 以兵伐音汁伐國 其主與衆自降 悉直·押督二國王來降 冬十月 桃李華
      23년(102) 가을 8월에 음즙벌국(音汁伐國)과 실직곡국(悉直谷國)이 강역을 다투다가, 왕을 찾아와 해결해 주기를 청하였다. 왕이 이를 어렵게 여겨 말하기를 "금관국(金官國) 수로왕(首露王)은 나이가 많고 지식이 많다."하고, 그를 불러 물었더니 수로가 의논하여 다투던 땅을 음즙벌국에 속하게 하였다. 이에 왕이 6부에 명하여 수로를 위한 연회에 모이게 하였는데, 5부는 모두 이찬으로서 접대 주인을 삼았으나 오직 한기부(漢祇部)만은 지위가 낮은 사람으로 주관하게 하였다. 수로가 노하여 종 탐하리(耽下里)에게 명하여 한기부의 우두머리 보제(保齊)를 죽이게 하고 돌아갔다. 그 종은 도망하여 음즙벌국의 우두머리 타추간(抒鄒干)의 집에 의지해 있었다. 왕이 사람을 시켜 그 종을 찾았으나 타추(抒鄒)가 보내주지 않았으므로 왕이 노하여 군사로 음즙벌국을 치니 그 우두머리가 무리와 함께 스스로 항복하였다. 실직국(悉直國)과 압독국(押督國) 두 나라의 왕도 와서 항복하였다. 겨울 10월에 복숭아꽃과 오얏꽃이 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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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사이사금기 26년.
      二十六年 二月 靑裔巡遊六部 部氓以其神智聚觀之 部主皆以伊干迎之 厚饗 漢祇主保齊 獨以家奴接之 甚薄 靑裔之臣耽下里恥之 殺其奴 逃依音汁伐主 上命索之 不應 命吉元伐之 以爲郡 悉直君奉治押督君王乙 皆以其地納之
      26년(AD151년) 2월 靑裔(청예)가 六部(6부)를 巡遊(순유)하였다. 部氓(부맹)들은 그가 神智(신지)하다며 모여 들어 구경하였다. 部(부)의 主(주)는 모두 伊干(이간)으로서 그를 맞이 하여 후하게 대접하였지만, 漢祇(한지)의 主(주) 保齊(보제)는 홀로 家奴(가노)로서 그를 대접하니, 심히 박하였다. 靑裔(청예)의 신하 耽下里(탐하리)는 수치스러워서 그의 종을 죽이고, 도망하여 音汁伐(음즙벌)의 主(주)에게 의지하였다. 상은 그를 찾으라 명령하였지만, (음즙벌의 주는) 응하지 않았다. 吉元(길원)에게 명하여 그들을 쳐서, 郡(군)으로 삼았다. 悉直君(실직군) 奉治(봉치)와 押督君(압독군)의 王乙(왕을)은 모두 그 땅을 바쳤다.

    • 라디오 2009.06.24 15:4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이영식 교수가 쓴 저 '가야 여행' 책자에는 님이 얘기하신 부분..

      "'붉은해朱日'는 고령에 남았고 '새파란 후예靑裔'는 김해로 갔다는,"

      얘기가 책에는 안 나오더군요.
      님의 사견이 들어가 있지 않나요?

      파사이사금기를 보지 않으면 대학 교수도 모를 텐데..
      이영식 교수는 고령의 대가야 건국설화를 인용하면서, 촛점을 잘 잡았다고 생각해요.

      주일은 정견모주의 3째 아들로서, AD158년, 대가야의 아시금으로 등극하지요.

    • 라디오 2009.06.24 15:5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대야大耶의 의미는 저는 '대가야'의 줄임말로 보고 있습니다.

      大와 多의 친근성에 대해서는 조금 부정적인 생각입니다.

      저는 합천은 위의 고령의 대가야의 영향권내로 생각하기에.. 김태식 교수의 의견에 동조하는 편입니다.

      다라국은 <양직공도>같은 곳에 달랑 1개 나오는 나라명인데..

      조금 신라 후대로 내려 봐야 하지 않나 싶군요.

    • 김훤주 2009.06.25 17:0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거듭, 고맙습니다.

      1.
      포상8국 가운데 하나가 합천 초계에 있었다고 보시는 셈이네요. 저는 포상8국이 모두 남해 바닷가에 있었다고 들었고 그런 나라 가운데 하나가 합천에 있었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습니다. 앞으로 관심 두고 찾아보겠습니다.
      2.
      주일은 정견모주의 셋째 아들이 아닌 것 같은데요. ^.^ 선생님께서 쓰신 파사이사금기 25년 기사에도 주일이 아닌 청예가 셋째아들로 돼 있거든요.
      3.
      "'붉은해朱日'는 고령에 남았고 '새파란 후예靑裔'는 김해로 갔다는" 얘기가 이영식이 쓴 <가야역사여행>에 들어 있습니다. 물론 <가야역사여행> 149쪽에는 주일과 청예를 정견모주가 낳았다는 얘기만 나옵니다. 주일과 청예가 저마다 고령과 김해에 자리잡았다는 말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얘기는 179쪽에 나옵니다. "대가야왕은 주일(朱日), 붉을 주(朱), 해 일(日)의 '붉은 해'로 칭송되었으나, 금관국왕은 청예(靑裔), 푸를 청(靑), 후손 예(裔)의 '새파란 후손'이라는 뜻으로 격하되었습니다.", 라고 적혀 있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마음대로 지어낸 글귀가 아니라는 말씀이랍니다.

      늘 건강하세요. ^.^

  5. 라디오 2009.06.19 17:5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가라국이라 하는, 5~6세기 가야의 맏이 대가야였던 경북 고령. 가야 산신 정견모주가 천신의 빛을 받아 뇌질주일(朱日)과 뇌질청예(靑裔)를 낳아 '붉은해朱日'는 고령에 남았고 '새파란 후예靑裔'는 김해로 갔다는, 김해 구지봉과는 다른 신화를 소개하며 고령에 처음 반로(半路)국이 있었고 이것이 대가야로 발전했다고 해석했습니다. 청동기 시대 반로국이 있었다는 근거는, 알터라는 데에 남아 있는 암각화에서 찾았습니다.
    ------------------------------------------------------

    婆娑尼師今記(파사이사금기) 30년 AD155년
    三十年 正月 稟主加亥病免 上以愛女毛利命爲稟主
    30년(AD155년) 1월, 품주 加亥(가해)가 병이 들어 사직하였다. 상은 愛女(애녀) 毛利(모리)에게 명하여 稟主(품주)를 삼았다.

    上與史后幸押督 賑民
    상은 史后(사후)와 함께 押督(압독)으로 행차하여 백성들을 구휼하였다.

    (3월, 7월 기사 생략)


    八月 比只與多伐草八作亂 命虹盧加樹討平之 比只太子宝日戰沒 次子朱日自召文還主和 其弟靑裔奔于金官
    8월, 比只(비지)는 多伐(다벌), 草八(초팔)과 함께 란을 일으켰다. 虹盧(홍로, 남로군사)와 加樹(가수, 마두성주)에게 명하여 討平(토평)하도록 하였다. 比只太子(비지태자) 宝日(보일)은 전쟁에서 죽고, 次子(차자) 朱日(주일)은 召文(소문)으로부터 돌아와 화친을 주도하였다. 그의 동생 靑裔(청예)는 金官(금관)으로 도망갔다.

    婆娑尼師今記(파사이사금기) 33년 AD158년
    十一月 加耶世主正見殂 子朱日立 自稱阿豉今
    11월, 加耶世主(가야세주) 正見(정견)이 죽었다. 아들 朱日(주일)이 즉위하니, 스스로 阿豉今(아시금)이라 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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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사이사금기 30년 기사를 보지 않으면 정확히 모르는 사항인데..
    이영식씨는 "가야 산신 정견모주가 천신의 빛을 받아 뇌질주일(朱日)과 뇌질청예(靑裔)를 낳아 '붉은해朱日'는 고령에 남았고 '새파란 후예靑裔'는 김해로 갔다는,"

    어떻게 알았는지 놀랍군요.

    *靑裔청예란 뜻은 "파란, 젊은 자손, 후손(동생)"이란 뜻이죠.

    심당전서에 그 유래가 나와 있습니다.

    辛未, 가라왕세자비 정견모주가 꿈에 해를 보고 아들을 낳아 이름을 朱日이라 하였다
    甲戌, 가라왕세자비 정견모주가 꿈에 靑衣童子가 들어오는 것을 품고 아들을 낳아 이름을 靑裔라 하였다


    *辛未= AD131년. 甲戌= AD134년.

    158년- 131년= 27살.

    만일 심당전서의 辛未년이 신뢰가 있다면... 朱日은 '28살'에 왕위에 오르는 것입니다.

  6. 틀렸다 2009.06.20 04:5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글 잘읽고 갑니다........만.........

    한가지 아쉬운 점을 이야기 하고 갑니다. 잘 아시겠지만 최인호님은 소설가입니다.


    책도 소설 제4의 제국이고요, 최인호님은 역사가가 아닙니다. 가야라는 역사를 가지고 소설적으로

    풀어낸 글이지 역사가가 쓴 학술지가 아니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왜 소설가가 소설을 쓰는데 틀렸다라뇨......소설가는 시나 보도자료, 수필등을 쓰면 안되는 것인가요?

    틀렸다라는 표현보다는 좀 더 완만한 표현이였으면 더 좋았을 것을 하는 생각을 가져 봅니다.

  7. entropy 2009.06.24 21:5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읽었습니다.

    그런데 한가지 의문점은

    세계사를 뒤져보면 정치형태는

    같은 시대 같은 성격을 띠고 나타나고 있습니다.

    조금의 시대적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100여년을 넘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바로 옆은 나라인데

    그 방대한 지역이 나라가 아닌 상태로

    수백년 존재한다는것은 비과학적인 분석이라 생각되어지는 군요?

    • 김훤주 2009.06.25 16:2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제가 생각하는 바는 이렇습니다. ^.^ 가락국 가라국 아라국 같은 나라가 수많이 있었고요. 신라의 뿌리가 되는 사로국도 그와 비슷한 나라였는데 자꾸 힘이 세어지면서 옆에 있는 이런 가락국 가라국 같은 다른 나라들을 통합하게 됐습니다.
      그러니까, 낙동강에서 섬진강까지 사이에 있었던 가야들 관점에서 말하자면, 그 수많은 나라들이 일부는 신라에 병합됐고 일부는 백제에 흡수됐겠습니다.